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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98화 (98/150)

# < 097. 용사 김우진(6) >

마물들은 빠르게 영역을 넓혀온다.

모든 인류를 죽이고 대지를 황폐화시킨다.

마물의 습격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다.

언데드는 어디서든 나타난다.

종말이 시작된 이래로 숱하게 경험해온 것들이었으나 인류는 설마 종말의 주체가 직접 군단을 이끌고 연합의 왕도로 강습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꺄아아악! 살려주세요!

모두 대피해!

적이다! 적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어떻게 왕도를! 왕도의 수호부대는 뭐하고 있는 거야!

끄아아악!

살려줘!

비명과 괴성이 난무한다. 화마가 올라오고 진득한 독기가 모든 것을 중독시킨다.

짙은 혈향은 엘프의 후각을 곤두세운다.

“이런 빌어먹을···!”

용사, 세이드가 반쯤 부서진 별궁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목격한 왕도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저 멀리 보이는 사룡의 강림은 왕도 전역에 펼쳐진 방어 마법진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기며 왕도의 대부분을 집어 삼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궁은 이중, 삼중으로 마법진이 중첩되어 피해가 덜했다는 것이지만 말 그대로 ‘덜’ 일뿐이다.

세이드가 기운을 끌어 모아 돌진했다. 도망치던 일가족을 기습하려던 듀라한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가, 감사합니다!”

“당장 동문으로 도망쳐라.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동문으로 도망치고 이르고.”

“예, 예!”

왕도 전체가 아비규환에 빠진 시점에서, 왕국군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왕도를 벗어나는 게 답이며 왕도 서부에서 꿈틀거리는 사룡을 피하는 게 최우선이다.

일가족을 보낸 세이드가 열 마리의 구울들을 베었다. 허나, 여전히 언데드들은 끝이 없었다.

무엇보다 왕도 서쪽에서 움직일 기미를 보이는 사룡은 이전보다 더 전율스러운 마기를 품고 있었다.

“···다 나았군.”

인류가 상정하던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김우진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전에 기습을 했어야했다. 하지만 과연 그런다고 승률이 있었을까?

“제기랄.”

무엇이 옳든, 이미 상황은 글러 먹었다.

“전하?”

그때 그의 시야에 아이닌 비엔데베르크 왕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언데드들과 싸우며 사람을 모으고 있었다.

그때.

“···설마?”

사룡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 주둥이가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목표물은 아이닌 왕녀. 세이드 델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전하!”

외침과 동시에 숨결이 토해졌다. 모든 것을 녹이는 지독한 독기와 마기는 세이드보다 빨리 왕녀에게 당도했다.

그 순간.

────!

포탄처럼 튀어오르는 불꽃이 거대한 장벽을 만들었다. 사룡의 독기를 받아냈다.

“···김우진?”

아니, 다르다.

김우진의 불꽃이나 김우진의 불꽃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떠한 것보다 더 순수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용사의 힘이 넘쳐났다.

마치.

“···신?”

그래, 그가 처음 이 세계에 소환되었을 때 만났던 신처럼.

* * *

집행자란, 보다 우수한 용사가 신의 선택을 받아 용사의 힘을 더욱 보강 받고 반신이 된 자들이다.

그들의 힘은 일반적인 용사와는 궤를 달리하나 신의 권속이기에 아카식 레코드의 제약에 묶인다.

하위 차원에서 전력을 다할 수 없다는 제약. 원한다면 그만한 업을 소모해야한다는 제약.

하지만 그런 대가가 있기에 그만큼 그들이 품은 신의 힘은 막대하다.

그것들이 정령왕의 힘과 어우러지면서 김우진은 새로운 벽을 넘어섰다.

온 몸 가득 채워지는 고양감은 처음 용사가 될 때보다 더 강렬하다.

김우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달뜬 호흡을 내뱉었다.

“······.”

주먹을 쥐었다 폈다. 넘쳐나는 힘은, 가벼운 몸과 원활한 기운의 흐름은 그가 새로운 경지에 발을 들였음을 증명한다.

“···지금이라면.”

사룡도 두렵지 않았다. 전지전능한 힘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진짜 그렇지는 않겠지만.

김우진이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무너져 내리던 별궁의 천장이 그의 주먹질에 박살났다.

“···마기.”

참으로 공교롭다. 수련을 끝내자마자 지독한 마기와 비명 소리가 느껴지다니.

습격이다. 그것도 사룡이 직접 왕도를 기습했다.

김우진이 잔해를 헤치며 밖으로 나왔다. 생각 이상으로 더 처참한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붕괴한 건물들, 사람들의 비명, 그들을 학살하는 언데드들. 그리고 저 멀리 고고하게 존재하는 사룡, 티타니아드.

왕국군은 어디 있지?

기사들은?

왕도에 모였던 각국의 왕족들은?

왕도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하는 자들이 있었으나 역부족으로 보였다. 결국 모든 건 사룡을 끝장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그때, 눈이 마주쳤다.

소름끼치는 언데드 특유의 붉은 동공은 여전히 껄끄러웠다.

놈의 주둥이가 벌려졌다. 숨결이다. 이전이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피하려고 했을 드래곤의 권능. 하지만 지금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아이닌 전하?”

하지만 사룡과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던 아이닌 비엔데르크는 아니었다. 김우진이 달렸다. 어느새 그는 사룡의 숨결과 아이닌 사이에 끼어들었다.

볼꽃을 피워 장벽을 만들었다.

────!

거대한 충격이 전해졌다.

이전이었으면 이 한 방에 화염은 소멸하고 그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버틸 만 하다. 아니, 오히려 반격을 할 여유가 넘쳤다.

드높아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벽이 그저 자그마한 울타리로 보였다. 발로 툭 차면 쓰러질 것 같이 낡은.

“···김우진 용사님?”

“아이닌 전하. 이곳은 위험합니다. 생존자들을 찾아 왕도를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전하를 지키면서 싸울 여유가 없습니다. 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왕도의 사람들을 최대한 멀리 대피시켜주십시오.”

“···네.”

아이닌이 사라졌다. 사룡은 그때까지 김우진에게 고정된 시선을 때지 않았다.

- 김우진.

성대가 없는 뼈에서 칠판을 긁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티타니아드.”

- 달라졌구나.

“상처는 다 회복했나 보지? 앗, 뜨거하고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친 게 엊그제 같은데.”

- 도망친 건 네놈이겠지.

- 많이 달라졌구나. 역시 네놈을 살려서 보내면 아니 됐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이지. 그리고 네가 자비를 베풀어서 살려준 것처럼 말하지 마. 내가 알아서 살아남은 거니까.”

사람들은 티타니아드를 피도 눈물도 없는 광룡으로 생각한다.

이미 죽은 시체인지라 피도 눈물도 없는 게 맞긴 하다. 하지만 이지가 없는, 파괴 본성만 존재하는 괴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인간들에게 해츨링을 잃고 스스로 어둠에게 몸을 맡긴 드래곤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인류를 멸하겠다고 다짐한 광룡.

드래곤답게 분노는 차갑고 냉철하다. 이성을 유지하며 항상 보다 많은 인류를 효과적으로 절멸시킬 방법을 찾는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두려운 존재다.

- 저 가증스러운 신들의 가호를 잔뜩 받은 모양이구나.

그녀가 날개를 펼쳤다.

퍼져 나오는 마기가 시체들을 일으켜 세웠다. 본래부터 그녀를 따르던 군단이 보다 넘쳐나는 사기에 괴성을 내질렀다.

- 너와 나 사이의 결판이 나는 게 빠를까.

- 아니면 네가 지키는 자들이 모두 죽는 게 빠를까.

“나를 초조하게 만들 생각인가 본데. 그게 오히려 내 사기를 올려주고 있다는 건 모르나 보네.”

아무런 수작 없이 싸우던 자가, 굳이 새로운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한다.

통한다. 그의 수준이 사룡, 티타니아드가 경계할 만큼 올라갔다.

“얌전히 땅속으로 기어들어갈 시간이야.”

- 너만 죽이면 인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김우진이 돌진했다. 사룡이 숨결을 토해냈다.

* * *

──!

─!

───!

마기가 폭발하고 불길이 넘실거린다.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충격파에 반쯤 바스라진 건물들이 완전히 허물어진다.

“빨리 나오세요!”

“왕도를 벗어나야 합니다!”

“마물을 죽여라!”

“사람들을 구조해라!”

“이쪽에도 마물들이!”

기습적인 공세에 비엔데르크의 왕도는 크나 큰 피해를 입었다.

성벽은 무너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들이 다시 언데드가 되어 살기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왕도였다.

중첩된 마법진들은 피해를 최소화했고 살아남은 기사와 병사들은 피해를 수습하고자 했다.

병단은 차츰 무리를 갖추고 효과적으로 언데드들을 격퇴하기 시작했으며 용사들이 가세하자 속절없이 밀리던 인간들은 반격의 시작을 알렸다.

그 선봉에는 세이드 델름이 있었다.

김우진에 의해 빛이 바래지긴 했으나 호랑이가 없는 곳에서 여우가 왕이듯, 김우진이 나설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가 최고의 용사였다.

“일부는 나를 따라라.”

“명령을 받듭니다!”

“나머지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저와 함께 사람들을 구조합니다!”

“예!”

기사단과 병사들이 세이드와 아이닌 비엔데르크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원활하게 병력들을 지휘하며 상황을 수습해 나갔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끝이 없었고 왕도는 넓었으며 초기의 피해가 너무 컸다.

왕도 곳곳에서 합류하는 병력들은 모두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그들은 빠르게 지쳐갔고 피해가 증식되어갔다.

“어떻게든 해야 해요!”

“일단 왕궁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왕성에는 폐하와 귀빈들을 비롯한 왕실의 정예들이 있으니 한결 나을 겁니다.”

“하지만 왕궁은 전투의 여파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아요. 아마 오라버니께서도 이미 왕궁을 벗어나셨을 거예요.”

“그렇다면 역시 서문을 통해서···.”

그때였다.

“용사님들과 전하를 도와라!”

“마물들을 물리쳐라!”

왕족들을 따라와 왕도 밖에 주둔지를 만들고 지내고 있던 각국의 정예병들이 왕도로 진입했다.

그들은 마물들을 토벌하며 빠르게 전진했다.

덕분에 세이드와 아이닌은 간신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용사님, 왕녀님, 괜찮으십니까?”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헌데 저건···.”

“김우진 용사님과 사룡입니다. 병사들에게 절대 곁으로 다가가지 말라고 일러두세요.”

“예. 굳이 그게 아니라도 다가갈 간 큰 놈은 없을 것 같긴 합니다만···.”

마하르 왕국의 지휘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왕녀에게 저지른 무례였으나 아이닌은 그를 탓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 때문이다.

“···정말 굉장해요.”

김우진을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낸 믿음이었다.

김우진이 아니면 대안이 없으니까. 제발 이겨달라고 억지로라도 믿는 거다. 희망이 없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우진은 자신이 장담한 대로 사룡과 대등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대체 한 달 만에 어떻게···.”

“아니, 저건 대등한 전투가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죠?”

“···거짓말이 아니었습니다.”

세이드가 멍하니 전장을 살폈다.

여전히 뜨거운 열기와 섬뜩한 마기를 방출하고 있으며 그조차 함부로 다가갈 수 없다.

누가 승기를 잡고 있는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그럼에도 엘프의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불길이 마기를 잡아먹고 있습니다.”

김우진이 이기고 있다고.

도저히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희망이 보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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