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96. 용사 김우진(5) >
“···정말로요?”
두 남자의 정수를 권능으로 흡수하던 김우진이 멈칫했다.
“정말로 이놈들이 신의 사자가 맞다고요?”
“정확히는 집행자다.”
포식.
상대의 정수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기성이 짙은 권능.
“···맙소사.”
김우진이 두 남자의 힘을 꾸역꾸역 흡수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부다 흡수했으나 몸이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방대했다. 소화불량에 걸린 것 마냥 속이 더부룩해졌다.
“그럼 이놈들의 말이 진짜라고요? 알베니우스 당신, 신들에게 반기를 든 반역자입니까?”
“신들에게 쫓기는 것은 맞다. 하지만 딱히 반역을 한 적은 없다.”
“어쩐지, 그 정도의 강자가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게 이상했어. 생각해보면 신이 아니면 저런 괴물을···.”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냐?”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상념에서 벗어났다.
“···뭡니까, 대체?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건 네가 선택해야지.”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닙니까? 당신을 돕다가 같이 반역자가 되었는데?”
“누가 그래? 네가 반역자라고.”
“아닙니까?”
“아니야.”
알베니우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김우진에게 포식 당한 두 집행자는 시신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했지만 전투의 여파로 공동은 붕괴하기 직전이었다.
“일단은 자리를 좀 옮기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장소가 변했다.
“여긴?”
“이 차원에 만들어 놓은 내 여러 안가 중 한 곳이야.”
알베니우스가 차를 내왔다. 커피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궁금한 건 다 알려줄게. 일단은 생명의 은인이니까. 뭐든 물어봐. 나도 은혜는 무조건 갚는 편이거든.”
“정말로 신의 사자들이었습니까?”
“현실을 부정하고 싶다는 건 알겠지만 그들은 신의 사자, 아니 집행자가 맞아.”
“···그렇다면 제가 그들을 죽였음에도 반역자가 아니라는 건 뭡니까?”
“그들은 나를 쫓아왔고 나와 싸웠지. 내가 놈들을 죽인 거야.”
“그런다고 속아줍니까? 신들인데?”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알베니우스가 픽 웃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신들은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아. 신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지만 딱 거기까지야. 저들은 집행자들이 내 손에 죽었는지, 너의 개입으로 죽었는지 네 스스로 실토하지 않는 이상 알 방법이 없어.”
“그게 무슨···.”
신들이 전지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고? 그렇다면 왜 그들을 신이라고 부르는가. 모순이다.
“네가 생각하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다만 실제 신은 그래.”
결코 완벽하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너무 혼란스러운데요.”
“하지만 결국엔 믿을 수밖에 없을 걸.”
“어째서죠?”
“증거가 사방에 넘쳐나니까.”
“증거?”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네가 왜 용사가 되어 여기서 구르고 있어야 하지? 그냥 신이 사라져라, 명하면 마물들이 사라져야 하는 것 아니야? 아니지. 애초에 저런 게 생겨나면 안 되는 것 아니야?”
“아.”
너무도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워낙 지구에서 소설과 만화, 영화 등으로 접한 클리셰였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기고 있던 의문들이기도 했다.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종말이 생겨.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막기 위해 대리인인 용사들을 소환하고,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으니 그럼에도 멸망하는 차원이 나와.”
“···믿을 수밖에 없겠군요.”
믿고 싶지 않지만 모든 정황과 증거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신은 결코 김우진이 생각하는 신만큼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들이 진정으로 신의 사도라면 당신은 왜 신들에게 쫓기는 겁니까?”
“그건 앞서 말한 이야기가 도움이 되겠군.”
알베니우스의 설명은 꽤나 길고 복잡했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짧았다.
“···당신이 신이 되는 게 두려워 죽이려고 한다고요?”
그딴 게 신?
“너희들이 신이라 믿는 백신전은 오래 전부터 이 우주를 다스려왔어. 그리고 자신들의 세력을 넘볼 만한 자들을 경계하고 미리 대처해왔지.”
대처란 크기 전에 사전에 박멸하는 것을 뜻했다.
“신들이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것과 선하다 믿고 있던 자들이 이 세상에 다시없을 악신이라는 사실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믿기 힘들었다.
“믿든, 믿지 않든 네 자유야. 나는 다만 네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할 뿐이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잖습니까?”
“그럴 이유가 있나?”
“반역자라는 걸 숨기기 위해서.”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쉽게 믿을 수 없다는 것쯤은 이해해. 점점 겪어보면 알겠지.”
알베니우스는 그의 불신을 개의치 않았고 그게 더 믿음이 가게 만들었다.
질문과 대답은 계속되었다.
알베니우스는 정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백신전은 신들의 집합체다. 말 그대로 백 명이 소속되어 있지.”
백신전이 무엇인지.
“그건 아무도 몰라. 아카식 레코드만이 알고 있겠지. 단지 신들은 우주의 힘을 가진 모두를 경계할 뿐이다.”
정말로 신이 될 수 있는지, 된다면 어떻게 신이 될 수 있는지.
“아카식 레코드는 이 우주의 거대한 의지다. 빛의···.”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종말은 차원의 죽음···.”
어째서 종말이 일어나는지.
“일반적으로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차원은 하위 차원이다. 아카식 레코드에 의해 상위의 존재인 신들은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신들이 왜 용사들을 소환하는지.
“종말을 막아낸 쓸만한 용사다.”
집행자들이 무엇인지.
“···그럼 저 버러지들이 이야기하던 게 정말이란 겁니까? 신들이 글라크를 버린다는 게?”
그리고.
“나는 신이 아니니까 정확한 속사정은 몰라. 하지만 정황이라는 게 있지. 신들은 이미 글라크에 미련을 버릴 만큼 버렸어. 수십 년간 수백의 용사를 투입했는데 안 되면 안 되는 거니까.”
정말로 글라크가 버려지는지.
“글라크의 사람들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이곳에서 신을 찬양하며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고요.”
“이 우주가 탄생한지, 신들이 생겨난지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지? 그 중 멸망을 맞이한 차원이 한두 개일까? 과연 멸망한 차원이 하나도 없을까?”
“······.”
김우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수백의 용사들을 만났지만 같은 고향 차원의 용사들은 드물었다. 그렇게 많은 차원들이 존재한다. 알베니우스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을 거다.
“글라크는 차원의 힘이 강하고 세계수도 존재한다. 그래서 종말이 더 크게 다가왔고, 그래서 신들이 보다 미련을 가져 보았지만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너에게나, 글라크의 인류에게나 특별한 거다. 신들에게 글라크는 널리고 널린 차원 중 하나일뿐이다.”
“···그럼.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들에 의해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끌려온 사람들은?”
“너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어.”
“···다 죽는다고요?”
“종말을 맞이한 차원에서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것 또한 종말의 일부니까.
“···하.”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하하···!”
아니, 그냥 웃음이 나왔다.
김우진은 웃었다. 정말 미친 듯이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역겹고, 분해서.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하면서 부려먹다가 안 될 것 같으니 그냥 다 버린다는 겁니까? 명색이 신이라는 작자들이!”
십수년을 개처럼 구른 대가가 고작 이거라고?
“네 분노는 이해해. 하지만 아직 속단하기는 일러.”
“신들이 버렸다면서요! 용사가 더 이상 내려오지 않고, 가호를 뺀다는 건데 이르긴 뭐가 이릅니까!”
“네가 막아버리면 그만 아니야?”
“···뭐라고요?”
“신들이 글라크를 버리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네 격이 지금의 수준에 다다랐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야. 아니, 애초에 그건 상관없지. 네가 그냥 종말을 막아버리면 모두 의미 없어지니까.”
“······.”
그것도 그렇군.
“···조금 흥분했습니다.”
“이해해.”
알베니우스가 느긋하게 차를 홀짝였다.
* * *
“헌데 아무리 신들이 전지전능하지 않아도 자신의 사도가 죽은 걸 모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권속이 죽은 걸 모르지는 않지. 이미 눈치 챘을 거야.”
그럼에도 알베니우스는 여유가 있다고 했다.
“하위 차원인 이상 신들이 직접 나서지 못해. 기껏해야 지금처럼 집행자들을 보내는 건데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당분간은 괜찮아.”
“그런데 신들이 당신이 신이 될 것이 두려워했다면서 사도 둘한테 왜 쩔쩔맸던 겁니까?”
“난 지금 부상 중이야. 이전에 신들에게 입은 상처가 너무 크거든.”
“어떻게 다치면 신 후보라는 자가 고작 신의 사자 둘 한테···.”
“뭐, 임마?”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그놈들도 비슷한 소리를 했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 자리로 돌려보내주마. 다음에는 찾아오지 마. 흔적을 최대한 지워 찾을 수도 없을 테니. 필요하면 내가 찾아가지.”
“예.”
종말을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이유가 더 늘었다.
김우진은 우선 왕도로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온···너.”
“나중에 설명해주마. 누가 날 찾거든 한 일주일 정도, 나 바쁘다고 해줘.”
“···나중에 물을 거다.”
“그래.”
별궁에 존재하는 개인 연무실로 들어간 김우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집행자들이 지금의 너를 본다면 반드시 이상함을 눈치 챌 거다. 포식으로 흡수한 기운들을 다스리는 게 먼저다.’
굳이 알베니우스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두 집행자를 흡수한 이후, 계속되는 더부룩함을 김우진의 심기를 거스르고 있었다.
기운의 통제가 원활하지 않고 자꾸만 새어 나온다. 정리할 필요성이 있었다.
‘집행자들은 용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던 강자들이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다. 정령왕의 기운에 그들의 힘까지 완벽하게 다스린다면 사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급하게 하다보면 기운이 폭주해서 네가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시간이 없다. 종말은 다가오고 있고 신들은 글라크를 버리려고 하고 있으니.
기운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 *
“오늘도 인가요?”
“예,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에요. 세이드 용사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니죠.”
애초에 사과할 일이 아니기도 했다.
김우진은 두 달의 유예기간을 제안한 뒤, 폐관에 들어갔다. 사룡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무어라 할 수는 없다.
비록 벌써 한 달이 지났지만.
하지만 여러 번 찾아왔음에도 허탕을 치고 심란해지는 마음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왕녀, 아이닌 비엔데르크가 한숨을 쉬었다.
‘김우진 용사님.’
김우진은 영웅이다. 암울해지는 세상속에서 반드시 필요한 빛이며, 아이닌은 그가 세상을 구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이후의 일.
용사 김우진은 글라크에 별 관심이 없다. 그에게 글라크는 그저 막아야만 하는 차원인 뿐인 걸까.
용사 세이드를 제외하면 그 누구와도 친분을 유지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 그의 마음을 반증했다.
“······,”
오라버니는 그의 마음을 얻어야지만 왕국이 살 수 있다고 했으나 글쎄. 그녀가 보기에는 조금의 가망도 없는 일이었다.
마하르, 헬카르스, 데인 등 여러 왕국의 공주들이 모두 달려들어도 아예 관심이 없으니.
“애초에 잘못 판단하고 계셔.”
김우진은 잡아야 할 규격 외의 전력이 아니다. 떠날 생각으로 가득한 사람을 잡는 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한다.
오히려 해야 하는 건 그가 마음 편히 떠날 수 있도록 준비를 해주는 게 아닐까?
오라버니께 말씀을 드려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어?”
진득한 불길함. 그녀의 피부가 갑자기 곤두섰다. 무언가가 감각 안으로 들어왔다. 소름끼치는 섬뜩함에 숨을 삼켰다.
위.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들려고 했다.
──────!
세상이 뒤집어졌다.
“아···.”
얼마나 지났을까. 아이닐은 스스로가 정신을 잃었었다는 것을 인지했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드레스는 반쯤 찢어지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사방에 널브러졌다.
운이 좋았다. 돌과 돌 사이에 끼어 깔려 죽지 않았으니.
그녀가 한 순간에 바닥난 마나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간신히 틈새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목격했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을.
폐허가 되어버린 왕도를.
사방에서 부르짖는 죽음의 비명소리를.
비명을 사냥하는 죽음의 군단을.
“···맙소사.”
지옥이었다. 현세의 지옥이 강림해있었다.
“스, 습격···!”
마물들의 습격이었다. 언데드들이 하늘에서부터 강습하여 비엔데르크의 왕도를 습격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경악도 잠시, 왕도 외곽의 거대한 존재에 압도당한 그녀가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아···!”
나오는 건 절망에 가득 찬 비명뿐이었다.
왕도 외곽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동체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다.
거대한 압박감과 숨 막힐 듯한 마기, 모든 것을 찍어누르는 살기와 광기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없었다.
사룡, 티타니아드.
인류가 반드시 멸절해야할 대적이 강림했다.
눈이 마주쳤다. 아이닌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티타니아드의 입이 벌어졌다.
─────!
독기로 가득한 숨결이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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