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94. 용사 김우진(3) >
세이드는 최근 이상함을 느꼈다.
대상은 김우진이다. 십수 년을 함께 해온 그가 최근 들어 달라졌다.
행동도, 말투도, 태도도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본질적인 것.
“이전보다 더 능숙해졌다.”
“갑자기 뭐가?”
“네 놈 말이다. 이미 정순한 정령왕의 불꽃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꽃 또한 더 정순해지고 밀도가 높아졌다. 그리고 불꽃에 담긴 용사의 힘도 농밀해졌고.”
처음에는 착각인줄 알았다.
“지난 번, 이스텐 수호전도 그렇고 이번 전투도 마찬가지다.”
김우진의 활약은 늘 눈부시다. 가장 앞장서서 싸우고 가장 많은 적을 주살한다.
허나, 그에게도 한계란 있다. 인간인 이상 체력이, 마나가, 권능이 끝이 없이 샘솟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두 번의 전투와 이전의 전투에서 김우진은 달랐다. 더 힘이 넘쳤고 더 장시간, 더 큰 활약을 했다.
“갑자기 이런 게 가능하다고?”
“나는 용사니까. 마물을 잡을수록 업을 쌓고 성장하지.”
“나도 용사다. 나도 성장하지만 너는 정도를 넘었다.”
“그러니까 내가 영웅이라고 불리는 거야.”
“헛소리.”
세이드가 앞으로 내달렸다. 에메랄드 빛의 오러가 싱그러움을 내뱉으며 죽음에서 돌아온 자들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
그때,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소름끼치는 괴음이 들렸다. 세이드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고 묵빛의 검기가 공간을 격하고 날아들었다.
쩌엉, 세이드가 힘으로 그것을 받아냈다. 불의 파도가 주춤하는 그를 지나쳐 상대를 덮쳤다.
상대를 녹여냈다.
“이것 봐라! 데스 나이트를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어놓고 평소 그대로라고?”
“데스 나이트는 원래 쉬운 상대야. 너한테도 마찬가지면서 새삼스럽긴.”
죽음의 군단장이라는 데스 나이트는 하나하나가 강력한 마물이지만 적어도 김우진과 세이드에게는 아니었다.
고작 데스 나이트 정도에서 고전했다면 그들은 결코 인류의 희망이라고, 영웅이라고 불리지 못했을 거다.
“지난 번 이스텐 수호전 이후, 매일 같이 어딜 갔었지?”
“산책.”
“너는 산책을 하루 종일 하나?”
“나무 위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똥 폼 잡는 엘프가 할 소리는 아닌데.”
“숲의 정기를 다스리는 거다. 그리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우리가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털어놓는 사이는 아니잖아. 지킬 건 지켜야지.”
알베니우스의 당부 때문이었다. 그는 용사의 힘을 더 제대로 다루는 법을, 정령왕의 힘을 더 원활하게 끌어내는 법을 알려주는 대신 누구에게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비록 김우진의 협박으로 인해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상대의 호의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좋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널 위해 애써줄 필요가 없겠군.”
“네가 언제 날 위해 애써줬다고?”
“네가 산책을 떠나면 널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기껏해야 셋이겠지. 아이닌, 알리나, 레아.”
“하나 더 있다. 마하르의 3공주.”
“하나가 더 늘었다고?”
“앞으로 더 늘겠지. 비엔데르크 왕국으로 연합의 왕족들이 모이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지는 너도 알고 있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가망이 없는데.”
“그렇다고 말라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지. 더 늦기 전에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건 그렇다.
김우진은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알베니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아 더욱 정순해진, 더욱 뜨거워진 순수한 불꽃을 일으키며 언데드 군단을 갈랐다.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세이드가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 * *
붉은 빛의 화염이 어두운 공동을 밝힌다.
화살처럼 뻗어나가는 화염이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는다.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꺾인다.
그럼에도 간신히 목표물 - 자그마한 마나석에 도달한다. 하지만 그 코앞에서 마나석이 흩뿌리는 알베니우스의 권능을 이기지 못하고 사그라든다.
“또 실패군.”
“젠장, 뭐가 이렇게 빡셉니까?”
“우주의 힘을 제대로 다루기만 한다면 충분히 맞출 수 있다.”
간단해 보이는 훈련이나 꽤나 큰 심력을 소모했다.
사방에 퍼져 있는 알베니우스의 영역의 권능은 용사의 힘 자체를 빠르게 소모시켰으며, 공간의 권능은 불길의 방향성을 틀어버리고, 마나석에 심어진 힘은 용사의 힘을 상쇄시켜버린다.
세 가지 장애물을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용사의 힘과 마나의 결속력을 높여야 한다. 권능으로 비틀린 각도를 즉각적으로 수정하기 위해서는 항시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며, 마나석에 심어진 힘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마나를 방출해야 한다.
용사의 힘은 용사의 힘으로 대응하는 게 더 효율적이다. 더 많은 용사의 힘을 더 견고하게, 더 세밀하게 컨트롤해야 한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많이 나아졌어. 처음에는 마나석 근처는 커녕 스스로의 엉덩이에 불을 쏘더니 이제는 근처까지 가잖아?”
“언젠가 그 엉덩이에 맞춰드리겠습니다.”
김우진이 이를 악물며 훈련을 재개했다. 그렇게 모든 힘을 소모하자 바닥이 난 마나 하트를, 정령왕의 정수가 신의 힘을 채우기 시작했다.
“정령은 더 없이 자연에 가까운 존재야. 흐름을 따라가며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많은 곳이 있으면 물러가고 빈 곳이 있으면 채우지. 마나 하트가 바닥나면 네 온 몸에 퍼져 있는 정령왕의 기운이 자연스레 마나 하트를 채운다.”
알베니우스가 김우진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우주의 힘이 김우진의 몸속으로 넘어가 몸을 두들이기 시작했다.
끔찍한 고통에 김우진이 신음을 삼켰다.
울컥, 피를 토했다. 그의 육신이 빠르게 죽음의 사신을 찾기 시작했으나 그 순간, 몸 곳곳에 잠들어 있던 정령왕의 기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령은 자연의 기운이다. 그리고 자연의 생의 성향을 강하게 띤다. 죽어가는 육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살리기 위해 흘러나온 정령의 기운들이 알베니우스의 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김우진이 드러누운 채, 거친 숨을 헐떡였다.
“생각보다 더 진행이 빠르군. 확실히 넌 재능이 있어, 포식의 권능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용사들 중에서도 특별하게 강한 건 이유가 있는 법이지.”
“칭찬 감사합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조만간 네 몸에 잠들어 있는 모든 정령왕의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거다.”
“예. 덕분입니다.”
“알긴 아는군.”
알베니우스가 아공간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따스한 차 한 잔을 내렸다.
“한 잔 할 테냐?”
“커피 없습니까? 고급 초콜릿을 듬뿍 넣은 달달한 카페 모카로.”
“그게 뭐지?”
“그럼 됐습니다.”
김우진이 눈을 감았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욱신거리는 게 그냥 푹 자고 싶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뭐가.”
“대체 누구한테 쫓기시는 겁니까?”
“내 개인적인 일은 궁금해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갑니다. 납득이.”
김우진이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당신도,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들도 어째서 이 차원의 종말을 지켜만 보고 있는지. 대륙이 멸망 직전까지 몰렸는데 왜 가만히 있는지. 세상이 멸망하면 모두가 다 죽는 겁니다. 모든 게 끝이라고요.”
종말은 단순한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다. 전쟁이 끝나도 왕조만 바뀌는 게 아니다. 차원 자체가 멸망한다. 생명체가 말살 당한다.
그런데 어째서.
김우진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누구는 이 세상의 존재도 아닌데 필사적으로 발악하는데, 누구는 이런 힘을 가지고도 방관한다니.
“나는 널 돕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돕고 있는 거죠. 본래는 그럴 마음이 없으셨잖습니까?”
“하지만 알려주고 있고 그 대가로 더는 묻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긴 했죠.”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어. 너도 약조한 것을 최선을 다해 지켜줬으면 좋겠는데.”
“명심하죠.”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평화.
김우진에 의해 일시적인 평화를 맞이했으나 인류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점점 늘어나는 마물과 언데드들의 수, 잦아지는 습격 빈도, 검게 물들어가는 대지의 확장.
김우진 덕분에 인류는 잠시의 유예 기간을 얻었을 뿐이었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인류는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연합의 수장들은 그 마지막 기한이 사룡, 티타니아드가 부상을 완전히 떨쳐내는 순간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마물과 언데드들은 티타니아드가 회복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때문에 인류는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것보다 최후의 반격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연합국의 왕들이, 왕이 나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제1후계자가, 왕국의 중추를 책임지는 대귀족이 최전선이라고 할 수 있는 비엔데르크 왕국의 왕도에 모인 이유였다.
“더 이상 뒤는 없습니다. 백성들의 안위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총공세로 나서야 합니다.”
데스 나이트의 손에 선왕을 떠나보낸 비엔데르크의 젊은 왕이 의장역을 맡아 회의를 주도했다.
연합의 선두에서 가장 많은 공세를 받아 많이 쇠하긴 했으나 한 때는 제국의 자리를 넘보던 비엔데르크 왕국의 체급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공세를 펼치자는 의견에는 동의하네. 하지만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어. 우리는 사룡이 영웅, 하이든의 희생으로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만 알뿐, 놈의 위치도 놈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수색대를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왕국의 영역 밖은 대부분 죽음의 대지가 되었고 마물과 언데드들이 넘쳐난다.
말 그대로 사지인 곳에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한 명, 한 명의 전력이 소중한 연합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막대한 손실을 감내할 여력이 없었다.
“다행히 그 부분은 저희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
헬카르스의 여왕이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새롭게 저희 왕국에 소환된 용사들 중, 마기를 수색하는 권능을 가진 용사가 있습니다. 그 자의 권능이면 능히 사룡의 위치를 특정해낼 수 있을 겁니다.”
“천운이구려. 꼭 필요할 때에 그런 용사가 나타나다니.”
“신들께서 아직 저희를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뜻이겠지요.”
여왕의 말에 왕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성호를 그었다.
종말이 이어진 지난 수십년 간 신들은 끊임없이 용사들을 소환했다. 그들의 희생과 활약이 아니었다면 글라크는 진작에 종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신들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던 차원. 글라크의 모든 인간들이 백신전의 신들을 믿고 따르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이곳에 올 때, 그 용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곳에 온 직후부터 가장 강력한 마기를 수색하고 있으니 사룡의 위치는 시간이 해결해줄 것입니다.”
“이 넓은 대륙 전역을 수색할 수 있다는 뜻인가?”
“괜히 권능이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신께 감사하네.”
작은 희망에 왕들의 얼굴에 웃음 꽃이 피었다. 하지만 사룡을 토벌하기 위한 회의는 이제 시작이었다.
“찾는다고 한들, 무작정 토벌대를 보내서는 안 된다고 보네. 어떤 마물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 따른 대처가 필요하니.”
“지난 5년간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저들은 1년에 한 번씩 거대한 공세를 합니다. 그것을 받아낸 뒤에 토벌대를 출정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마물의 수를 최대한 줄여야 가는 길이 조금이라도 편하지 않겠습니까?”
“용사들은 전원 포함시켜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
“하지만 용사들이 전부 빠지면 오염된 땅에 근접한 왕국들의 피해가 커집니다.”
“감수해야겠지. 어차피 사룡을 죽이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네.”
“아무리 그래도···!”
의견이 맞는 부분도, 맞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왕들은 타협을 하기도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다.
그러길 한참, 헬카르스의 여왕이 회담장의 의자 하나를 차지 한 채 멍을 때리고 있는 김우진에게 물었다.
“용사 김우진.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예?”
김우진의 눈이 빛을 찾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물었네. 모든 용사들을 토벌대에 포함시켜 조금이라도 성공 가능성을 높이는 게 나은지, 아니면 최소한의 용사들을 두어 연합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게 나은지.”
“음.”
“편하게 이야기 하게. 결국 용사들을 이끌고 사룡의 목에 칼날을 들이미는 당사자는 그대가 아닌가.”
모든 왕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대가 아니면 대안이 없으니.”
사룡은 자신의 생명력을 불태워 불의 정령왕과 합일한 하이엘프마저도 죽이지 못한 괴물이다. 그를 죽일 유일한 희망은 그런 정령왕의 정수를 권능으로 흡수한 김우진뿐이었다.
김우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딱히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막지 않으면 다 죽으니까.
다만.
“그러면 둘 다 하지 말죠.”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린가?”
“용사 김우진?”
지금의 김우진의 머릿속에는 왕들이 고민한 방법들보다 좋은 방안이 있었다.
“용사들만 이끌고 가겠습니다.”
단 한 명의 병사와 기사들도 포함시키지 않는 방법.
“그러면 근접 왕국의 방비를 걱정할 필요도 없겠죠?”
“용사들은 기껏해야 80이네. 그들이 강하다는 건 알지만 그들만으로는 사룡 앞에 당도하는 것도 힘들어!”
“만용이다! 그대가 강한 것은 알지만 이건 불가능해!”
“나도 같은 생각이네. 그건 그냥 자살행위에 불과해!”
“아뇨.”
김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병사들이 많아지면 행렬이 늘어지고 느려집니다. 그러면 오히려 마물과 언데드들의 포적이 되어 실패 확률이 올라갑니다. 소수 정예로 가는 게 맞습니다. 연합을 지키는 문제도 있고요.”
“그건 물이 무서워서 마시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멍청한 짓이네! 상대해야 할 마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설사 기적적으로 당도한다해도 지치고 피폐해진 상태로 사룡을···.”
“제가 그것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김우진이 왕들의 말을 끊었다.
“이 자리의 누구보다 앞장서서 싸웠습니다. 가장 많은 마물과 언데드들을 죽였고 사룡의 어금니를 부러트린 게 접니다. 놈들의 무서움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럼에도 가능하다. 멍청한 아집 같은 게 아니다.
결국 문제는 사룡을 벨 칼이다. 그것이 없어 인류는 속절없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단. 두 달 뒤에.”
곧 달라진다.
알베니우스가 그랬다. 앞으로 두 달이면 능히 불의 정령왕의 정수를 완전히 취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때가 된다면 상대가 아무리 사룡이라고 해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김우진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왕들이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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