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94화 (94/150)

# < 093. 용사 김우진(2) >

차원, 클라크의 종말이 시작된 이후, 인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평화를 만끽한 적이 없었다.

전투 이후의 짧은 연회나 축제는 말 그대로 틈새의 안식에 불과했다. 언데드가 주축이 된 마물들은 언제나 인류의 영역을 침공했고 인류는 그것들을 막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 대륙 전체를 아우르던 인류는 동남쪽 끝까지 밀렸고, 수십 개가 넘어가던 제국과 왕국들은 이제 고작 10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간신히 버티는 게 고작이다.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알베니우스.’

역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고 역사서에도 없다. 왕도의 도서관에서 역사서를 뒤적이던 김우진이 책을 덮었다.

물론 역사서는 주로 이 나라의 역사를 다루지만 큰 정세 같은 것은 모두 적혀 있다. 알베니우스 정도의 인물이 나타났다면 기록되지 않을 리가 없는데 조금의 언급도 없다.

‘이 차원의 존재가 아니라고?’

그건 더 믿을 수 없다.

그는 용사가 아니었다. 용사끼리는 그냥 보는 순간 알 수 있다. 상대가 용사라는 걸.

하지만 알베니우스는 용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에게 부여받은 용사의 힘을 다루고 있었다.

‘대체 뭐지?’

용사가 아니면서 용사의 힘을 다루다니.

수백 명의 용사들이 죽어나간 이곳에서 가장 강한 용사로 꼽히는 그가 손도 제대로 써보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니.

이게 가능한 건가?

혼란스러웠다. 김우진이 자신의 오러와 불꽃을 깨부수던 그 가공할 힘을 떠올렸다.

그의 불꽃은 정령왕의 것이었다. 정령왕과 합일했던 하이엘프의 유지에 따라 정수를 흡수했다. 더 없이 순수한 불꽃. 쉽게 깨어지지도, 깨어질 수도 없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리고 김우진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거지?”

“아니, 아무것도.”

“그런 것 치고는 어딘가를 가고 싶은 생각이 다분해.”

“잠깐 볼 일이 있어서.”

“출정이 내일 모래다.”

마하르 왕국 서부 이스텐 영지 방면으로 대규모 언데드 군단이 진군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마하르 왕국은 연합에 정식으로 김우진의 출정을 요청했고 받아들여졌다.

이틀 후, 김우진은 세이드를 비롯한 열 명의 용사들, 그리고 일천의 병사들과 함께 마하르 왕국으로 떠나야 했다.

“오래 안 걸려.”

아마도?

“국왕이 널 보고 싶어 하던데.”

“알아서 잘 둘러대 줘. 보나마나 또 왕녀와 만찬을 하라는 거겠지.”

맨 손으로 오크 열 마리는 때려잡을 것 같은 왕녀 보고 세상에서 제일 연약하다며 지켜줄 강한 용사가 필요하다고 했나.

이곳, 비엔데르크 왕국만 특별한 건 아니었다. 세상은 빠르게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강자에게 의탁하는 것은, 강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생존 본능이다.

김우진은 글라크 최고, 최강의 용사이자 유일한 희망이며 누구든 손에 넣고, 품에 쥐고 싶어 하는 최고의 인재다.

공주나 왕녀가 존재하는 모든 왕국에서 매파를 보냈으며 직계 공주가 없는 자들은 방계를 찾아서라도 보냈다.

그 수많은 공주들 중 누구 한 명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이지만 오랜 전투로 피폐해지고 지구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 본능을 가진 지금의 김우진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구였다면 엎드려 절이라도 했을 텐데 말이지.’

쓰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한 내에 돌아온다면 상관은 없다만, 적어도 어디 가는지는 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왕도 외곽.”

“무얼 하러?”

“그냥 산책.”

“그렇게 말해두지.”

김우진도 세이드도 그게 아니란 걸 알았지만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전장에서 쌓인 신뢰가 있었다.

“갔다 온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데인 왕국의 왕족들이 왔다고 들었다만.”

“그래서?”

“왕국의 1공주도 함께라더군.”

“그게 끝이지?”

“헬카르스 왕국도 조만간 도착한다고 한다.”

“그럼 더 빨리 떠나야지. 알아서 잘 둘러대 줘.”

질색한 김우진이 별궁을 빠져나갔다.

똑똑-

김우진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기척이 느껴졌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렸다. 화려한 금발에 푸른 눈, 아름다운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인이 우아하게 들어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세이드 용사님.”

“오랜만입니다. 알리나 전하.”

“두 분이 함께 별궁에 기거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김우진 용사님은 어디 계십니까?”

“조금 늦으셨군요. 김우진은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책이라면 이곳, 왕궁 정원입니까?”

“정원으로 가신다 한들 찾지 못하실 겁니다.”

세이드가 당장 달려 나가려는 모션을 취하는 데인의 1공주를 말렸다.

“그러면 왕도입니까? 왕도 어디로 가셨죠?”

“저라고 해도 그것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희가 전우이긴 해도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는 또 아닌지라.”

“···혹시 누굴 만나러 간 건 아니겠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이드 용사님, 제대로 말씀해주세요. 설마 아이닌, 그 오크로 태어나야 하나 신의 실수로 인간으로 태어난 여자를 만나러 가신 건 아니겠죠?”

아이닌은 비엔데르크 왕국의 왕녀였다. 선왕의 늦둥이이자, 현 국왕의 동생으로 국왕이 김우진과 혼인을 시키고자 애를 쓰는 여인.

알리나 데인과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김우진이라는 하나뿐인 용사를 사이에 두고 치정을 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물론 세이드가 보기에 김우진은 둘 모두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의 우정이 참으로 눈부십니다. 허나 저희가 안지도 꽤 되었는데 용사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정도는 말씀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김우진은 제게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알리나가 힘없이 문을 닫았다. 그 직후, 거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김우진을 찾아 드레스를 들고 달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 모습에 세이드가 실소했다.

“김우진, 너를 만난 뒤로는 꽤 재미난 일들만 생겨나는군.”

김우진을 찾는 여인들을 보고 있자니 고향 차원에 남은 자가 떠올랐다.

그를 믿고 따르던 자식 같은 아이.

“율리아.”

김우진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세이드에게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종말을 막고 돌아갈 것이다. 반드시.

그가 책의 다음 장을 넘겼다.

똑똑-

“김우진 용사님 계신가요?”

“김우진은 산책을 나갔습니다, 아이닌 전하.”

다시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지금은 읽을 때가 아닌 것 같았다.

* * *

말을 타고 달렸다. 그때, 그곳은 무작정 달리다 도착한 곳이지만 한 번 갔던 길을 되짚어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불타서 잿더미가 되어버린 일대. 알베니우스에게 저항하느라 조절하지 못한 불꽃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김우진은 은은하게 느껴지는 잔열을 식히며 주변을 수색했다. 하지만 알베니우스의 존재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떠났나?’

떠났든, 떠나지 않았든 김우진보다 강자다. 작정하고 숨기면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러니 가는 게 아니라 오게 만들어야 한다.

딱,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정령왕의 불꽃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말미암아 탄생한 불의 정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저 일직선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알베니우스라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그리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 또 온 거냐.”

“생각보다 일찍 나타났군요.”

“갑자기 말투가 착해졌다?”

“막나가도 되는 놈과 그렇지 않은 놈은 구분하는 편이라.”

김우진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평평한 바위에 앉아 손가락으로 옆의 것을 가리켰다.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궁금하고 묻고 싶은 게 참 많습니다.”

“궁금한 것? 그걸 왜 내가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일단 첫 번째는···. 절 아십니까?”

잠시 김우진을 응시하던 알베니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아주 막무가내군. 인류의 용사, 다른 용사들의 유지를 받은 진정한 영웅. 거리에 조금만 나가봐도 네 이야기로 떠들썩한데 모를 수가 있나.”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였군요. 음, 좋습니다.”

“어째 네가 나를 취조하는 것 같은데.”

“그럴 의도는 없습니다.”

“······.”

능글맞은 김우진의 표정에 알베니우스가 혀를 찼다.

“잘못 걸렸군. 괜히 모습을 드러냈어.”

“그러게 말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흥미가 가서.”

“흥미?”

“나는 이곳이···. 아니, 됐다.”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을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두는 것이고 두 번째는.”

“두 번째는?”

“······.”

“···하. 이거군.”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든 이제 찾아오지 마라. 나는 이곳을 떠날 거고 너도 나와 엮여서 좋을 건 없을 테니.”

“싫습니다.”

“내가 숨으면 넌 어차피 날 찾지 못해.”

“그렇겠지만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베니우스라는 이름을 알릴 수는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이름이 알려지면 좀 곤란한 상황에 처하신 것 같은데.”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그렇게 들리셨다면 정답입니다.”

알베니우스의 표정이 굳었다. 어떠한 기세도 끌어올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우진은 피부가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협박이라는 건 강자가 약자에게 하는 것이다.”

“아니죠. 절박한 사람이 필요한 걸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하는 겁니다.”

하지만 김우진은 지지 않고 응대했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냐.”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째서 멸망을 막는데 손을 보태지 않습니까?”

“그 이유까지 말해줄 이유는 없다.”

“이유는 딱히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저나 지금의 용사들로는 도저히 종말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이야 현상 유지가 고작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현상 유지도 끝이다.

정령왕을 현신시킨 하이엘프 용사의 희생 덕분에 사룡, 티타니아드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다.

놈이 부상을 회복하고 다시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 인류의 종언이다.

그전에 놈을 끝내야 한다. 하지만 인류에게는 놈에게 닿을 만한 칼이 없다. 가장 강한 용사라는 김우진 또한 마찬가지. 수십, 수백 만의 언데드 군단을 뚫고 아크 리치 드래곤의 핵에 불태울 자신이 없었다.

조력자가 필요하다. 더 많은 강자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우진 이상의 격을 가진 자, 알베니우스는 결코 놓칠 수 없는 존재였다.

“···네 절박함은 이해해. 하지만 나 또한 사정이 있다. 난 직접 나설 수 없어.”

“누구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겁니까? 당신 같은 자가?”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지. 너한테는 내가 신으로 보이겠지만 나보다 강한 자들이 수두룩하다.”

“신으로 보인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하는군. 역시 인간이란.”

쯧, 알베니우스가 혀를 찼다.

“그건 당신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신경 꺼라.”

“그래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도망친다면 저는 이 대륙의 모든 이가 당신의 이름을 알게 할 겁니다.”

“방금 내 이야기는 무엇으로 들었지?”

“저 또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정을 용납해줄 만큼 넉넉한 상황도 아니라서요. 제 코가 석 자라.”

“영웅이라더니 순 날강도였군.”

“이곳의 인간들에게 저도 똑같이 당했습니다. 그대로 돌려줄 뿐입니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널 죽인다면?”

“저는 이를 악물고 도망칠 겁니다. 만약 도망치는데 실패하면 죽겠지만 제 계획은 성공할 겁니다. 제 동료에게 제가 돌아오지 않으면 퍼트려달라고 이야기 했거든요.”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어차피 저도 이판사판입니다.

독기 찬 눈빛에 알베니우스가 이마를 짚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군. 괜한 호기심 때문에.”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늦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알베니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라.”

그의 손짓에 김우진이 뒤따랐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나설 수 없다.”

“대체 어떤 죄를 저지르신 겁니까? 아니, 누구에게 쫓기시는 겁니까? 당신 정도의 강자가 두려워할 정도라면 엄청난 강자인데 종말을 막지도 않고.”

“그들은 종말을 막는데 애쓰고 있다.”

“딱히 들어본 적 없습니다만.”

“더 묻지 마라. 한 번만 더 내 신상을 캐물으면 그냥 가겠다.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작은 동굴이었다. 아니, 입구는 작았으나 내부는 엄청나게 큰 공동이 펼쳐져 있었다.

“여기는?”

“내 보금자리다.”

중앙에 선 알베니우스가 가볍게 목을 스트레칭했다.

“말했다시피 내가 직접 나설 수는 없다.”

하지만 네 사정이 안타깝고, 이 세상의 종말을 바라지도 않으니.

“네게 조금 가르침을 내려주마.”

“가르침이라면?”

“우주의 힘, 너희가 용사의 힘, 혹은 신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을 보다 원활하게 컨트롤 하는 법.”

“용사의 힘을 말입니까?”

“너는 네 몸에 잠자고 있는 우주의 힘의 편린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럴 리가···. 설마 모든 용사들이 그렇다는 겁니까?”

“아니, 너만이다.”

그래, 그래서 조금 호기심이 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정령왕은 반신의 존재거든. 진짜 신에 비하면 부족할지언정 일개 용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우주의 힘을 품고 있다.”

그리고 넌 단순히 불꽃만 다를 뿐, 아직 그 힘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했고.

“희망이 없다고 했지?”

걱정 마라.

“아직 너에게는 희망이 있으니.”

시간은 촉박하지만 재능도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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