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92화 (92/150)

# < 091. 이야기 >

전투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포위망이 순식간에 좁혀졌고, 수십의 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압도적인 물량공세에 김우진과 죄수들은 재빠르게 연옥 안으로 몸을 숨겼다.

그렇게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음.”

김우진이 팔딱 거리는 알비츠의 팔을 들고 눈살을 찌푸렸다.

“···큰일 난 거 아닌가요?”

“큰일 났지.”

놓쳤다. 어깨를 자르고 중상을 입히긴 했지만 놈은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버티고 버티다가 때마침 도착한 신과 집행자들을 방패삼아서.

그 과정에서 어깨를 하나 내주긴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다.

그걸 뚫고 도망칠 줄이야. 과연 주신인가.

물론 김우진이 전력을 다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자칫 잘못해서 김우진이 놈을 죽여 버리면 계약을 어긴 게 되어 심연으로 끌려가 버리니까.

신들도 두려워하는 그곳의 정체는 모르지만 모두가 기피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굳이 궁금증을 해소하러 갈 필요는 없다.

“죽이지 못해서 아쉽지만 일단은 최선의 결과야.”

주신을 죽이지는 못했으나 호송대원으로 따라온 집행자들을 전멸시키고 41명의 죄수들을 모조리 잡았다.

“입을 막고 연옥에 쳐 박아 놔. 내가 원할 때가 아니면 나갈 수 없게.”

죄수들은 좋은 카드다. 이전에 10명의 죄수들과 이들, 그리고 이전에 내보냈던 자들을 합하면 50명이 넘는다.

저들이 원할 때 계약이 끝나는 건 원치 않지만 김우진이 원할 때 계약을 끝내는 건 또 다르다.

죄수들은 아주 좋은 카드가 될 것이다.

“비록 감히 소장신님을 사칭하는 악마를 징죄하지는 못했으나 그들에게 주신의 저력을 보여주셨으니 더 이상 함부로 날뛰지 못할 것입니다.”

정확하다.

김우진의 칼카르를 먹었다는 것을, 두리쉬마와 손을 잡았다는 것을 알아 분노하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에 함부로 할 수 없다. 둘의 전력이 각각 주신에 필적하기 때문이다.

일곱의 신들도 있고.

그나저나 데르카인도 들켰으려나?

“그래, 일단은 그런데 장기적으로는 좋지 않아.”

전력이 약하다고 평가 받는 것은 김우진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저들의 오만함과 어우러져 방심을 유도할 수 있는.

그렇기에 이번에 반드시 알비츠를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쩝, 김우진이 아쉬움에 입을 다셨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알비츠를 얕보지도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저 주신이 주신의 이름에 걸 맞는 수준을 보여주었다. 그뿐이다.

“일단은 재정비를 좀 하자.”

말은 그랬지만 크게 재정비라고 할 건 없었다.

전투는 연옥 밖에서 이루어졌고 소수의 신들이 나선 게 전부였다.

“릴리, 나르. 연옥의 방벽 강화에 힘 좀 더 써줘.”

- 응.

- 낑.

전투의 여파로 손상된 차원의 방벽 복구를 부탁하고 교도관과 죄수들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집무실에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율리아가 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저.”

“말해.”

“신을 한 명도 죽이진 못했지만 전투는 끝났으니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쭈뼛거리는 율리아의 모습에 김우진이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좋아. 너도 당사자니까 아는 게 좋겠지.”

“당사자요?”

“뭐가 궁금하다고?”

“···세이드의 마지막이요.”

“세이드는 아크 리치 드래곤의 입속에서 씹어 먹혔어.”

“네?”

“그래도 그 정도면 꽤나 괜찮은 죽음이었어.”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죠.”

“세상에 차원은 많아.”

뜬금없는 소리지만 율리아는 아무 말 없이 경청했다. 김우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종말은 그 차원의 수만큼 다르지.”

그 중에서도 다른 차원들과는 차원이 다른 악의가 덮친 차원도 있었다.

오염된 차원은 순식간에 종말을 향해 치달았고 신들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 용사를 소환했다.

허나, 용사는 큰 이변을 일으키지 못하고 죽었다.

애초에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된 차원이었다.

어둠은 인간에게 해츨링을 잃어버린 드래곤을, 분노에 차 인간들의 왕국을 멸망시키다가 죽음 직전까지 몰린 드래곤로드를 사도로 선택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심장은 이미 꿰뚫려 있었고 어둠의 가호를 받았다고 한들 멀쩡히 살아날 수는 없었다. 죽음에서부터 돌아올 수는 있었어도.

“그렇게 아크 리치 드래곤이라는 끔찍한 혼종이 탄생했다.”

평범한 아크 리치도, 아크 리치를 평범하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저 그런 아크 리치도 능히 재앙에 가까운 존재다. 헌데 드래곤이, 그곳도 고룡급의 드래곤이 그렇게 되었으니 어찌 되었겠나.

하물며 놈은 인류를 사냥하며 더욱 힘을 축적해나갔으니.

“···막을 수 있는 건가요?”

“신들은 계속해서 용사를 소환했어.”

그럼에도 종말을 막는 것은 요원해보였다.

다음 용사도. 그 다음 용사도. 그 다음 다음 용사도.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마물의 군단은 빠르게 대륙을 황폐화시켰고 인류는 내몰렸다.

위기를 느낀 신들은 용사‘들’을 소환했다.

하지만 수많은 용사들을 먹어 치운 악의는 더욱 힘을 키웠고 신들은 더 많은 힘을 부여해야만 했다.

그렇게 수십 번, 수 백 번이 반복되고.

용사 ‘김우진’이 소환되었다.

“세이드도 함께.”

이것은 한 인간과 엘프가 글라크라는 세상을 종말로부터 구하기 위한 이야기다.

* * *

“하아, 하아···!”

알비츠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온 몸이 욱신거린다. 오른 팔이 공허하다. 이런 상처를 입어 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주신이시여. 상처를···.”

“피해는?”

“그게···.”

“피해를 물었다.”

“모든 죄수들이 죽거나 저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호송대로 나섰던 집행자 열이 죽었으나 다행히 신들의 피해는 없습니다.”

“저들의 피해는?”

“···그게.”

“없구나.”

“자잘한 부상은 있겠지만 유의미한 타격은 없었습니다.”

알비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당해버렸다. 설마 입구 바로 앞에서 칼을 뽑아들 줄이야.

“칼카르를 김우진 놈이 죽였을 줄이야.”

“김우진이 칼카르를 먹었을 줄이야!”

“김우진이 어둠의 사도와 손을 잡았을 줄도!”

“여섯의 신들을 육성했을 줄도!”

“세계수가 둘이나 있을 줄도 몰랐다!”

알비츠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스로에 대한 분노이자 자신의 팔을 자른 김우진에 대한 분노였다.

응어리진 열기는 사방에 냉기를 퍼부어대도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일단 상처를 회복하셔야 합니다.”

“이미 다 회복 되었다.”

흘러나오던 피는 멈췄고 도마뱀처럼 솟아난 팔이 빈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주신의 권능은 잃어버린 팔 하나 재생하는 것쯤은 쉬웠다.

“···백신전. 백신전으로 간다.”

“예.”

칼카르를 먹은 김우진, 어둠의 사도와의 공조, 여섯의 신들.

수많은 혼란들이 알비츠의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가장 강렬하게 남은 건 역시 하이엘프가 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로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온 신. 용납할 수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백신전이 아니라면 가장 유력한 건 연옥의 죄수들이었고 베리안이 직접 확인하기 위해 호송관이 되었다.

그리고 베리안은 연옥에서는 새로운 신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주신인 그가 신격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가능성은 하나만 남는다.

배신.

베리안이 백신전을 배신했다.

하지만 의문은 또 남는다.

대체 왜?

아카식 레코드에게 처음 선택되어 주신이 된 이후 지금까지 세상은 백신전이 만든 판 아래 순리대로 흘러갔다.

베리안은 알비츠와 함께 그런 구도의 정점이다. 배신할 이유도, 당위성도 없다. 그렇기에 알비츠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배신할 이유가 없는 이가 배신을 했다.

‘아니, 잠깐만. 설마 진짜로 속여 넘긴 거라면?’

이전이라면 조금도 믿을 수 없는 개소리다.

하지만 김우진의 진면목을 본 지금은 조금은 달랐다.

백신전 몰래 두 그루의 세계수를 심었다. 칼카르를 죽이고 흡수했으며 여섯의 신들을 만들어냈다.

아무리 주신이라고 한들 결국 조금 더 강한 신일 뿐, 만능은 아니다.

‘김우진은 신이 된 게 하이엘프라고 했다.’

그리고 세계수에게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신력이 느껴졌었다. 하이엘프의 힘을 세계수에게 준 거라면?

대신 세계수의 정기를 채우고 구속구를 채운다면?

아이러니하게도 구속구는 신들이 만든 만큼 그 성능은 확실하다. 상황만 잘 맞아 떨어진다면 어지간한 하위 신들까지 속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거기까지 생각이 흘러가자 또 다른 가정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백신전의 내분을 일으키기 위한 수작일 수도 있다는 가정.

허나, 무엇이든 속단은 이르다.

“주신이시여?”

분노에 차 성큼 성큼 걸음을 옮기던 알비츠가 멈춰 섰다. 심호흡하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가자.”

“예.”

백신전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대부분의 신들이 연옥의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참여하고 있었고 전투 이후, 복귀하는 중이었다.

“주신이시여, 괜찮으십니까?”

“김우진 그 놈이 선을 넘어도 단단히 넘었습니다!”

“어둠의 사도와 손을 잡다니! 용사라는 자가 자각이 없단 말입니까!”

“칼카르님의 죽음에 김우진이 관여하다니! 놈을 결코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됩니다!”

“김우진을 죽여야 합니다!”

신들 중 그 누구도 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김우진이 백신전의 위신을 깎아먹으며 여러 문제를 양산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관계의 주도권은 백신전에서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그 누구도 신을 상대로 주도권을 가질 수는 없으니.

허나, 그 예상이 무참히 깨어졌다. 하물며 김우진은 주신 칼카르를 먹어 주신에 필적하는 강자가 되어버렸다.

자그마한 위기, 위험하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가 턱 밑까지 올라와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베리안은 어디 있지?”

알비츠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베리안을 찾았다. 하지만 베리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방금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러 가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말이냐?”

“이런 상황이니 더욱 확인해 볼 게 있으시다고···.”

“아카식 레코드로 가겠다.”

베리안을 만나 확인해야만 하는 게 있었다.

알비츠가 표정을 굳힌 채 백신전을 벗어났다.

* * *

새하얀 세상, 거대한 기둥. 기둥 바로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베리안이 있었다.

“베리안.”

“왔느냐.”

“묻고 싶은 게 있다.”

“뭐지?”

“정말로 몰랐느냐?”

“서두가 빠졌다만.”

“율리아 카르센. 그녀가 신이 되어 있었다. 김우진이 그러더군. 집행자가 아닌 다른 자가 신이 된 첫 번째라고.”

“그걸 믿나?”

“믿고 싶지 않았으나 김우진은 마물 사태 때 신들을 납치했다. 신이 아니라면 연옥에서 놈의 공석을···지금 뭐하는 거지?”

파지직, 미약한 스파크. 아카식 레코드가 흔들렸다. 그 이변에 알비츠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베리안은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김우진를 끝장낼 해결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

“뭐라고?”

“너의 전투를 보았다. 어둠의 사도와 김우진의 불꽃. 그리고 여섯 신들. 김우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숨겼다.”

“그래서?”

“주신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더 이상 무조건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그에 따른 대안과 대처가 필요하다.”

대안? 좋다. 대처법을 찾겠다? 그것 또한 좋다.

“그게 네가 이 상황에 아카식 레코드에 들어와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우리가 김우진을 상대로 계속 당하는 이유가 무어라 생각하지?”

“계약.”

김우진을 옭아매려고 만들었던 계약이 반대로 백신전을 옭아매고 있다.

“그래, 계약이다. 계약으로 인해 김우진을 죽이지 못하고, 계약으로 인해 연옥 내부로 숨어들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계약은 사라져야만 한다.

“나는 계약을 없애버릴 생각이다.”

“누가 그걸 모르느냐. 그래서 죄수들을···.”

“나는 계약을 없애버린다고 했다. 끝내는 게 아니라.”

“···뭐라고? 그런 건 불가능하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란 건 결국 아카식 레코드가 보증을 선다는 거다. 위대한 우주의 의지는 자신이 보증 선 계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용납하지 않지.”

때문에 계약을 어긴 자는 심연으로 들어간다.

심연이 정확히 어딘지, 어떤 곳인지 가본 자는 없다. 간다고 돌아올 수 있을 지도 모르고.

허나, 신들은 심연을 두려워한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단편적으로 심연에 대한 기록을 찾았기 때문이다.

끝없는 어둠. 공허한 어둠.

간결하지만 그렇기에 더 섬뜩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용납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건가?”

“우리가 오랜 시간을 함께 하긴 했지만 서로 정답게 말장난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 따위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이도 아니지.”

알비츠의 표정이 굳었다.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거냐?”

“모를 리가. 네 생각이 맞다.”

베리안이 몸을 돌렸다. 서로의 시선이 부딪혔다.

“나는 지금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네 놈!”

알비츠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곳이 아카식 레코드의 앞이 아니었다면 그의 권능이 베리안을 덮쳐을 지도 모른다.

“감히 위대한 우주의 법칙에 간섭을 하겠다고!”

“허면 네게는 다른 방법이 있나?”

알비츠와는 반대로 베리안의 얼굴은 태연했다.

“네가 끌고 간 죄수들도 전부 죽거나 붙잡혔다. 어둠의 사도는 주신인 우리와 필적하는 강자가 되었고 김우진 또한 칼카르를 먹음으로서 그 정도 수준이 되었지. 시간이 지나면 놈은 더 강해질 거다. 어쩌면 지금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계약으로 인해 우리는 그 기회를 붙잡을 수가 없다.”

“우리는 백신전이다. 조금 흔들릴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물론 패배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한 명의 피해로 막을 것을 열 명, 백 명의 피해로 막게 될 거다.”

그 과정에서 백신전의 치세는 흔들리고 마물들이 범람할 거다. 악순환이 계속되며 이 우주 전체가 흔들린다.

“너는 그런 미래를 바라나?”

“그렇다고 위대한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것이 옳다고 정당화 시키지 마라.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법칙이다.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글쎄.”

베리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백신전은 신들의 집합체다. 그리고 우리는 주신이다. 신이 무엇이냐. 전지전능한 존재다. 무엇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우주의 법칙을 따르는 자를 진정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신격을 아카식 레코드가 준 것이다.”

“그래서 더 문제라는 거다.”

명색이 주신이라면서 아카식 레코드의 눈치나 보며 살살 기어야 한다니.

“그러니까 김우진이 우리를 관리자라 불러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김우진을 제외하면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못한다!”

“김우진이 부른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네놈부터가 아카식 레코드를 신성시 여기는데 누가 널 신으로 보지?”

선택되는 신. 그것 또한 옳지 않다.

전지전능한 존재가 어찌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려야만 하는가.

“네가 아주 돌아버렸구나!”

“그래서 한편으로는 김우진에게 감사하고 있다. 버러지 하나를 치워준 것에. 도구 주제에 적당한 쓰임을 모르고 그 이상으로 설치고 있지만 말이다.”

“···네놈 설마.”

알비츠의 눈이 커졌다.

“백신전을 배신한 거냐!”

“틀렸다. 장애물을 치운 거지. 진정한 신이 되기 위한 길을 막는 장애물을.”

“어찌 주신의 이름을 달고 그 따위 짓거리를 할 수 있느냔 말이다!”

“신이라면 마땅히 법칙 위에 서야 한다. 법칙 아래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칙 위에서 군림해야 한다. 그것이 신이다. 올바른 신.”

나는.

“백신전을 진정한 백신전으로 만들 거다.”

“궤변이다! 아카식 레코드가 네놈을 용납할 것 같으냐, 아니 네놈 따위가 감히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하는 게 가당키나 하다고 생각하느냐!”

그 순간.

───!

섬광이 알비츠를 스쳤다. 타오르는 피부에 알비츠가 신음을 삼켰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 하군.”

“···어떻게?”

아카식 레코드의 주변은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으로 점철되어 있다. 더 없이 신성한 곳. 그 누구도 이곳에서는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

그래. 그래야만 하는데.

“너는 모를 거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준비해 왔는지.”

얼마나 신이면서 신이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했는지.

“이 정도면 충분히 대답이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아카식 레코드에 간섭할 수 있는지, 없는지.

계약서를 무효로 돌려버릴 수 있는지, 없는지.

“물론 단순히 이곳에서 힘을 사용하는 것과 계약서를 무효로 돌리는 건 꽤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네 선택지는 두 가지다.”

나를 따르거나.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거나.”

선택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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