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91화 (91/150)

# < 090. 하나 더 >

“그거 사망플래그다.”

전투에 나서기 전에 모든 것을 들으려고 하다니. 이제 이야기를 듣고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다짐을 하면 꼭 죽는다.

아니지, 반대도 마찬가지인가?

꼭 전투가 끝나면 뭘 하겠다고 하면 죽던데.

똑같은 결말에 김우진이 잠시 고뇌했다.

“사망플래그요? 그게 뭔데요?”

“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세이드에 대해서 듣고 싶다고?”

“네.”

“호위였다고 그랬나?”

“아버지 같은 분이셨어요.”

“세이드라.”

그리운 이름이다. 등을 맞대고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함께 싸웠던 용사.

김우진을 제외하면 가장 강했고, 그래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결국 죽었지만 그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구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서로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주고받았으니.

“꽤 수다스러운 놈이었지. 재미없는 농담도 치고.”

“거짓말.”

“거짓말?”

“세이드는 수다스럽지 않아요.”

“처음에는 과묵하긴 했어.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그 끔찍한 세상 속에서 과묵한 엘프가 수다스럽게 변한 것은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여기까지.”

“···뭘 말하기는 한 건가요?”

“내 마음이야. 나머지는 백신전을 무너트린 뒤에 들어.”

“그런···!”

“억울하면 너도 그때 같이 있던가.”

“그건 완전 억지잖아요.”

“신을 둘 죽이면 알려주지.”

“···좋아요. 정 그러시겠다면.”

김우진이 손을 흔들며 축객령을 내렸다.

“제가 꼭 듣고 말거예요!”

율리아가 사라졌다.

김우진의 시선이 그녀가 나간 문에서 한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군.”

쯧, 김우진이 혀를 찼다.

누군가는 그를 괴물이라 부른다.

허나,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믿고 있는 용사들이 쓰레기처럼 죽어나가는 그런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살아남았다면, 살아남으려면 누구나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수많은 동료들을 잃었고, 그들의 부탁과 함께 흡수했다.

신에 대한 증오는 자연스레 생겨났다.

하물며 신들은 마지막에 그들을 버리려고까지 했으니.

김우진이 아공간을 열었다.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수많은 편지들을 보며 쓰게 웃었다.

김우진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달달한 카페 모카가 들어가자 기분이 좋아졌다.

* * *

“또 새로운 신이 발탁되었다.”

이번이 몇 번째더라. 다섯 번? 여섯 번? 이번에도 백신전의 집행자들은 손가락만 빨았다.

더욱 화가 나는 건 이 사태가 왜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다.

마물이 납치를 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한 명씩 차근차근 간을 보듯이 신을 죽인다는 것을 믿어야 할까.

아니면 제 3의 인물이 신들을 납치해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제 3의 인물이라고 해봐야 김우진 밖에 없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김우진은 아니야.”

“이주일의 유예 기간동안 죽은 신이 몇이냐! 누가 봐도 수상하잖느냐!”

“하지만 그들을 죽인다고 김우진에게 득 될 게 있나? 애초에 김우진은 계약에 묶여 죽일 수도 없다.”

죄수들 따위는 감히 신들을 죽일 권능도 없다.

무엇보다 신들이 납치당했을 때, 김우진은 분명히 연옥에 있었다.

아니라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그 마물의 파도와 51명의 집행자들이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할 수가 있나.

이제 갓 자란 세계수가?

억압 받는 죄수들이?

고작 항복한 집행자 열 명으로?

김우진이 없다면 그건 무리다. 연옥은 그 파도를 견뎌낼 힘이 없다.

그렇다고 김우진이 아니면 신들을 납치할 자가 있느냐면 그것 또한 의문이다.

신이 괜히 신이라 불리겠는가.

결국 의심할 수 있는 건 마물뿐이다. 주신 알비츠와 그를 따르던 수많은 신들이 목격했던 괴물.

주신과 대등한 전투를 벌이며 악착같이 신 하나를 죽였던 놈.

하지만 의문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알비츠는 분명히 타이탄을 극한으로 몰아붙였고 놈은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신 여럿을 납치할 정도로 빠르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허나, 그 의문은 결국 김우진을 끝장내면 해소 된다.

정말로 김우진이 한 짓이 맞는지 아닌지, 놈을 족치면 확인할 수 있다. 맞다면 정확한 판단이었고 아니라고 할지라도 뒤에 후환을 남겨두고 마물들과 싸울 수는 없다.

때문에 이주일 간의 유예기간이 지났을 때, 알비츠는 직접 나서기로 했다.

“직접 호송관으로 들어가 내부 또한 살펴보고 오겠다. 대체 김우진이 무얼 믿고 그리 막 나가는지.”

그게 무엇이든 이제는 끝이겠지만.

알비츠는 그의 손으로 확실하게 김우진을 끝내고 싶었다. 그로 인해 손상된 백신전의 위신과 직접적인 피해들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다.

그 모든 수치와 굴욕을 되돌려주기 위해 반드시 스스로의 손으로 김우진의 끝을 장식하고 싶었다.

감히 신에게 도전한 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갔다 오지.”

알비츠가 호송관의 모자를 썼다.

“내가 돌아오는 그 순간, 진격할 준비를 해라.”

“기다리고 있겠다.”

“가자.”

“예!”

50명의 죄수들을 이끌고, 알비츠가 연옥으로 떠났다.

* * *

───!

섬광이 일렁였다. 알비츠가 손을 휘젓자 생성된 얼음의 벽이 그것을 온전히 받아냈다.

“그 건방짐도 오늘로 끝이다, 김우진.”

어디 마음대로 해봐라.

입술을 짓이기며 이를 갈았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연옥의 앞에 당도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죄수들을 호송해온 호송대다! 문을 열어라!”

호송대원을 맡은 집행자가 소리쳤다. 허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알비츠가 방벽을 확인했다.

“강화시켜놨구나.”

물씬 풍겨나는 신의 기운과 세계수의 기운은 차원의 방벽을 한 단계 진화시켰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주신인 그 앞에서는 결국 조금 단단해진 가벽일 뿐, 부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김우진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이런 멍청한 짓을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어서 머리가 돌아버렸나?

그렇다면 실망이다. 백신전에 그리 큰 피해를 입힌 개자식이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지는 버러지라는 건 백신전이 그만큼 별 볼일 없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알비츠는 김우진이 대적에 걸 맞는 최후를 보여주기를 바랐다.

“마지막 경고다. 문을 열어라!”

호송대원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 직후, 문이 열렸다.

“들어···.”

하지만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들어오라고 연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가기 위해서.

화륵, 새하얀 백염이 알비츠의 눈앞을 가득 채운다.

본능적으로 힘을 끌어 올렸다. 차가운 냉기가 불꽃이 만나 격한 수증기가 끓어오른다.

“이건?”

불꽃의 기이함을, 알비츠는 눈치 챘다.

다르다.

지금까지 봐왔던 김우진의 불꽃이 아니다. 더 정순하고, 더 새하야며, 더 신력이 풍부하다.

김우진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허나, 수증기를 뚫고 들어오는 건 김우진의 검이다.

카앙, 얼음이 뒤덮인 손이 불의 칼날을 붙잡는다. 얼굴을 마주하고 알비츠가 으득, 이를 갈았다.

“네놈, 대체 뭐냐. 어떻게 이런 힘을?”

“대답해줄 의무가 있나?”

“감히 나를 공격하다니. 계약을 어길 셈이냐?”

“여긴 연옥이 아니야.”

밖이지.

김우진의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된다. 집행자들이 그 불꽃을 감히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다.

그리고 열린 차원의 입구들 사이로 또 다른 자들이 나타난다.

콰콰콰콰, 폭풍을 머금은 채 돌진하는 하이엘프, 아니 신.

“···신이라고?”

은빛의 털이 찬란한 은광으로 뒤덮인 짐승, 아니 신.

“······!”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침내 가짜들이 따르는 악마를 처단하노니, 이 땅에 정의가 바로 서리라!”

베른을 섬기던 집행자 또한 신이었다.

“드디어 내 손으로 신의 명줄을 끊을 기회를 얻었구나!”

“가까이만 가면 제가 뼈와 살을 분리해버릴 수 있습니다!”

화살을 날리는 엘프 또한, 식칼을 들고 덤비는 자 또한 신이었다.

신, 신, 신, 신, 신.

넘쳐나는 신들에 알비츠는 한 가지 진실을 깨달았다.

“···너구나.”

애초부터 가정이 잘못 되어 있었다.

“너였어···!”

신들을 납치한 건 마물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패퇴시킨 어둠의 사도도 아니었다.

김우진이었다. 그가 그토록 경계하던, 백신전의 위신을 손상시켰던 김우진이 그 난리 속에서 신들을 납치한 것으로도 모자라 연옥을 지켜냈다.

하지만 어떻게?

“설마 처음 그 신이···?”

“그래, 저 하이엘프다.”

프흐흐, 김우진이 웃었다.

그래, 그랬다. 처음부터 신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니 그 공세를 막아낼 수 있는 거다. 하물며 하이엘프이니 세계수와의 공조가 얼마나 좋겠는가.

“그럴 리가! 베리안이 죄수들을 확인했다! 저 년이 신이 되었다면 못 찾아냈을 리가 없다!”

“그건 베리안에게 가서 물어보고.”

“설마 거짓말을···?”

주신인 베리안이 신격을 알아보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념은 거기서 끊어졌다.

불꽃들이 그를 붙잡았다. 더 가까이서 새하얀 백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거 설마?”

처음 마주했을 때,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정순하고 뜨겁다. 마치 주신의 불꽃처럼.

알비츠는 뒤늦게 김우진의 권능을 떠올렸다. 신의 힘을 받아 각성된 그에게 내재된 힘.

포식.

“네놈 설마 칼카르를!”

“그래, 먹었다.”

꺼억, 김우진이 트름을 했다.

“너무 화내지 마라. 너도 곧 그 뒤를 따라가게 해줄 테니.”

“어떻게? 너 따위 놈이 칼카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칼카르를 먹어 버린 지금은 그와 비등한 존재지만 그 이전에는 분명 아니었다. 김우진이 아무리 대단해도 결코 칼카르를 죽일 수는 없다.

김우진이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붙잡는 불꽃이 더욱 맹렬히 타올랐고 위기감을 느낀 알비츠 또한 필사적으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김우진이 작정하고 쏟아내는 불꽃은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힘겨루기 속에서 신들의, 백신전이 아닌 신들의 공세가 주신을 향해 쏟아진다.

“주신이시여!”

“도우겠나이다!”

집행자들이 기겁하며 달려왔으나 김우진의 불꽃을 넘을 수는 없었다.

“감히 그 정도로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칼카르를 먹어치운 김우진이 변수지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연옥을 중심으로 포위망이 형성되어 있다. 전투 사실을 알면 그 즉시 포위망을 좁히고 김우진을 징죄하려 할 터.

잠깐이면···

“···되는데.”

그림자가 졌다.

그리고 알비츠는 김우진이 어떻게 칼카르를 죽였는지 깨달았다.

종말 차원에서 만났던 그 망치가 그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으니.

“네놈들! 애초에 전부 한패였구나아아아아!”

알비츠가 절규했다.

“지금 와서 알아봤자 늦었다.”

“명색이 용사였던 자가 어둠의 사도와 손을 잡다니 부끄럽지도 않느냐!”

“용사를 지들 체스말로 써먹고 마음대로 토사구팽하는 네놈들이 할 소리는 아니지.”

“계약, 계약을···!”

“다시 말하지. 여긴 연옥의 내부가 아니다. 그리고 내가 널 직접 죽이지도 않을 거고.”

“노오오오오옴!”

“주신의 마지막 한 마디 치고는 별 것 없군.”

“···하하.”

김우진이 백신전의 위신에 손상을 입힌 만큼, 그만한 상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하찮은 자에게 패배했다는 게 알려지면 그만큼 백신전도 하찮아 지는 것이니까.

하지만 맹세코.

이렇게까지 대단하기를 바란 건 아니었다.

저 마굴을 누가 봐서 연옥이라고, 용사들을 가두는 감옥이라고 하겠는가.

새로운 백신전이면 몰라도.

망치가 떨어진다.

‘웃기지 마라. 나는 주신이다. 위대한 백신전의 주인.’

고작 김우진 따위에게, 버러지 같은 어둠의 사도 따위에게 죽지 않는다.

작은 실수일 뿐이다. 조그만 버티면 신들이 온다. 1 대 1이라면 이렇게 허무하게 죽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죽인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찰나의 순간, 알비츠의 눈이 활로를 찾았다. 신들을 토해내고 여전히 닫히지 않는 연옥의 방벽.

저기만 통과하면 된다. 연옥 내에서의 전투는 금지이니 들어가고 지원군이 올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모든 게 네 뜻대로 될 것 같으냐!”

모든 힘을 일거에 폭발시켰다. 빙정의 폭풍이 일순간 화염을 밀어냈다. 김우진이 주춤거리며 물러났고 신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거대한 얼음의 방패가 어둠의 사도의 망치를 비껴냈다.

그리고 그 짧은 틈, 알비츠는 진한 탈력감을 느끼며 연옥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넣는 듯 싶었다.

- 너. 못 가.

“···세계수?”

파랑새가 무방비한 그의 싸대기를 후려쳤다. 신의 힘이 농밀한 세계수의 날개는 끔찍한 고통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버텨냈다. 그는 주신이었으니까. 여기서 김우진 따위에게 죽을 자가 아니니까.

신이 된 죄수들, 그리고 세계수. 이제 나올 건 다 나왔다.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감히 주신에게 유효타를 먹일 무언가가 더 있지는 않을···

- 끼이이잉!

작은 호랑이의 몸통 박치기에 그의 신형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튕겨져 나갔다.

“···세계수가 둘?”

허무한 단발마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망치가 떨어졌다.

─────!

우주가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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