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88. 유예 >
[드디어 미쳐버린 거냐, 김우진!]
수차례의 실패와 개량을 거듭하며 완성된 마력포들은 생각 이상의 준수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죄수들은 모조리 쓸려나갔고 호송관 역할을 하는 집행자들도 정면으로 맞은 놈들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신을 상대로 유효타를 주기 위해서는 더욱 개량을 거쳐야겠지만 일단은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베리안의 반응을 보니 더욱 더.
“미안하군. 내 밑에 애들이 적인 줄 알고 포격을 해버린 모양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느냐. 어제 분명히 죄수가 간다고 연락을 주었을 텐데?]
“물론이다. 죄수를 맞이할 준비를 확실하게 하고 있었다. 허나, 너도 알다시피 최근 들어 마물들이 연옥을 침범하는 사태가 한두 번 벌어진 게 아니다 보니 모두 조금 예민해져 있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그따위 것을 변명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다. 착각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일일 뿐이다. 심심한 사과를 건네지.”
[김우진, 넌 계약을 어겼다.]
“내가? 그럴 리가.”
김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수를 하긴 했지만 일단 계약의 문제는 없는데. 그들은 죄수(진)이었지 아직 죄수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죽은 자들 중에 신이 있었나? 난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내가 지금 심연에 끌려가지 않고 멀쩡히 너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프흐흐, 김우진이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고의가 다분했다는 것을 김우진도 알고 베리안도 안다. 아니, 백신전의 모두가 안다.
그럼에도 계약에 묶여 함부로 이빨을 드러낼 수 없으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김우진을 묶어두기 위한 올가미에 스스로 발이 묶인 꼴이라니.
[네놈. 언제까지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올 수 있을 것 같으냐.]
“적어도 지금 당장은 꿀릴 게 없긴 하지.”
[네 휘하의 교도관들이 마력포를 발포했다고 했느냐? 그들의 죄를 백신전에서 직접 묻겠다. 백신전으로 압송하도록.]
“그건 안 되지. 내가 책임자인데 밑에 애들 커버 하나 못 쳐주면 어디 가서 명함 내밀고 살겠어?”
허나, 김우진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다.
“실수 한 번 가지고 너무 그러지 마. 우리가 하루 이틀 안 사이도 아니잖아?”
김우진이 비실비실 웃었다.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 의미는 사뭇 달랐다.
[다음 번에는 꽤 기대해도 좋을 거다.]
“기대되네.”
연락이 끊어졌다. 김우진이 대소했다.
“통신구가 언제 4d가 됐지? 빡침이 전해지네.”
신들이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크게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 잘했어. 나?
“그래. 너무 잘했어.”
데르카인에게 이 작전에 대해 들었을 때만해도 그저 죄수들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물들이 쳐들어 왔을 때, 자폭하던 드워프들의 모습이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 달 동안 드워프들은 개량과 보강을 반복하며 쓸만한 마력포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쓸만함의 기준은 신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였다.
당연히 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용사 혹은 죄수들 따위는 단숨에 지워버릴 수 있다.
아주 만족할 만한 성과다.
- 응. 이상 무. 경계.
릴리가 날개를 이마에 가져다 대며 경례 자세를 취했다.
“군인 놀이에 빠졌네.”
딱히 경계 근무를 하라고 한 적은 없다. 죄수들이 오면 모조리 쏴버리라고는 했지만.
굳이 저런 행동을 하는 건 얼마 전에 보았던 군대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봐서다. 요즘 들어 지친 릴리에게 휴식 겸 티비를 보여줬더니 영화나 드라마 마니아가 되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
“그럼 이제 가서 쉬어.”
- 응! 이병, 나르! 앞으로!
- 끼잉!
호랑이의 머리 위에 앉은 릴리가 위풍당당 사라진다.
저렇게 보니 역시 아이는 하나가 아니라 둘 이상 있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둘이서 알아서 잘 논다나.
똑똑-
“들어오십시오.”
“신들의 반응이 어땠지?”
알베니우스가 들어오자마자 제 집마냥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예상대로입니다. 화는 내지만 딱히 무언가 할 수는 없죠. 계약이 존재하는 한.”
“한다고 이야기는 들었는데 정말로 해버릴 줄이야. 김우진, 넌 정말 미친놈이다.”
“욕입니까, 칭찬입니까?”
“보통은 욕이지만 이 경우에는 칭찬이겠지. 커피는 안 주나?”
“알아서 타 먹으세요.”
“여기는 손님 대접이 꽝이야.”
알베니우스가 궁시렁 거리면서도 알아서 커피를 탔다. 딱히 무언가를 추가하지 않은 에스프레소였다.
“손님입니까?”
“네가 불렀으니까 손님이지.”
딴에는 맞는 말이다.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뭐지?”
“만약 릴리가 신을 완전히 빨아먹어버리면 남은 미라는 신입니까, 아닙니까?”
“갑자기?”
“마력포를 보니 조금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개량에 개량을 거쳤고 지금도 거치고 있는 마력포의 화력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그만큼 세계수들에게서 받는 에너지가 많아진다는 소리였다.
“아직 멀었다만.”
“아직이 언제 이제가 될지 모르는 겁니다.”
“뭐, 그렇긴 하지. 아마도 신일 거다.”
“뭡니까, 그 모호한 대답은.”
“내가 신이 되어본 것도 아니니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 않느냐.”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알베니우스님이 알고 있는 선에서는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마나하트가 파괴 되어도 격을 잃지는 않는 겁니까?”
“내가 알기론 그래. 신의 격은 단순히 강하다는 차원을 넘어선 무언가니까.”
제법 납득이 갔다.
신이 단순히 더 강한 집행자라면 신이라 불릴 이유도, 아카식 레코드가 딱 백 명만 고를 이유도 없겠지.
그렇다면 큰 문제는 없는 건가.
“역시 새로운 신을 잡아야 되나?”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데?”
“후보들을 신으로 만들려면 지금 잡은 놈들은 다 죽여야 합니다. 그 이후에는 배터리가 사라지는 것 아닙니까?”
“잡을 수는 있고?”
“음, 당장은 역시 무리겠죠?”
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마물의 범람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애초에 쓸데없는 걱정이야. 세계수가 단순히 신들의 힘을 통과하고 정제하는 통로라고 생각해? 세계수들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걸 보고도 모르겠어?”
“물론 그건 알고 있지만 말입니다. 드워프들의 집착이 점점 더 심해지는 꼴을 보니···.”
골치아프다는 듯, 김우진이 이마를 짚었다.
“뭘 걱정하는 지는 알겠는데 한 그루면 몰라도 두 그루면 그럴 일 없어.”
“하긴, 그렇겠죠?”
“그래.”
김우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통신구가 신호를 잡았다.
“통신구?”
“···백신전 직통입니다.”
갑자기 왜 다시?
묘한 불안감을 애써 눌러두며, 김우진이 통신을 받았다.
그리고 통신이 끝났을 때 김우진의 안색은 더 없이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지?”
“죄수들이 온 답니다.”
“다시 온다고?”
“예. 내일 바로 온다네요.”
아무래도 죄수들을 모두 죽여버린다는 경우의 수를 생각했던 것은 김우진과 데르카인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 *
“미친놈이구나. 제대로 미친놈이야!”
알비츠가 대소했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 화가 나서 웃음이 나왔다.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이 이름 세 자가 이렇게까지 그의 마음을 박박 긁게 될 줄, 과거의 알비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그러지 않았느냐.”
김우진에게는 분노를 여실히 표출하던 베리안은 꽤나 평온한 안색이었다.
“김우진이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아무리 그렇다고 진짜로 죄수들을 몰살 시키는 게 말이 되냔 말이다!”
“죄수가 아니다. 죄수가 되기 직전의 용사지. 놈의 말대로 계약서상의 문제는 없다.”
“넌 누구의 편이냐, 베리안.”
“당연히 백신전의 편이다. 그러니 이런 일을 대비해서 대안을 만들어놓지 않았느냐.”
프흐흐, 베리안이 웃었다. 김우진에게는 분노한 척 했지만 사실 그는 별로 화나지 않았다.
김우진에게 더 없이 당해왔던 백신전이었다.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내일 바로 가라.”
“그러지. 이번에는 어떻게 나올지, 직접 가보겠다.”
그래서 용사들을 모았다. 43명이 아닌, 93명을.
진짜 죄수들을 모으는 것에 비해서 훨씬 쉬웠다. 그저 적당한 딜을 해주면 신의 과업이라고 좋아하며 개처럼 꼬리를 흔들어 댔으니까.
일을 무사히 마치면 집으로 잘 보내주거나 집행자로 삼아주겠다는 것을 싫어하는 자는 없었다.
그리고 설사 약속했다 한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가 아니라면 굳이 지킬 필요도 없다.
굳이 86명이 아닌 93명을 모은 건 또 다른 수작에 대한 대비였다.
계약서에 따라 다시 한 번 죄수들이 간다는 고지를 내렸다.
“놈의 반응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김우진은 은근히 표정 관리가 잘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황했을 거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음 날, 베리안이 직접 50명의 죄수들을 이끌고 연옥으로 향했다.
저 멀리, 차원의 방벽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오는군.”
죄수들을 몰살시키고 백신전에 큰 엿을 선사했던 그 광선이다. 느껴지는 신력으로 미루어 보아 동력은 아마도 세계수겠지.
─────!
섬광이 번쩍인다. 무식한 기운을 품은 채, 죄수들을 쓸어버리려 한다.
“과연.”
베리안이 없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되었을 거다.
헌데 그가 있는데도 마력포를 쏘다니. 신이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함인가, 아니면 쏴도 죽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에 마음 놓고 쏘는 것인가.
아마도 후자겠지. 김우진이 그리 허술할 리가 없으니.
포격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신력을 머금은 포격이 100km를 주파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찰나였다.
그리고 베리안이 거대한 빛의 방패를 만들어내는 것도 찰나였다.
─────!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부스러진 파편과 충격파가 사방을 덮쳤다.
허나 방패의 뒤로는 그 무엇 하나 넘어오지 않았다. 포격 따위로는 감히 주신의 권능을 넘을 수 없었다.
“어디 더 해봐라, 김우진.”
하지만 추가적인 공격은 없었다.
베리안은 느긋하게 죄수들을 이끌고 연옥에 당도했다. 그리고 문을 열려고 했다.
“···이런 건 헛수고라는 걸 알 텐데.”
문은 잠겨 있었다. 주신으로서 가진 권능도 통하지 않았다. 이유는 안다. 세계수를 이용해 출입을 통제해버린 거다. 아무리 그가 주신이라고 할지라도 차원 하나에 대한 간섭은 차원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만 못하다.
물론 그게 강제로 부수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베리안이 힘을 끌어 모았다. 빛이 환하게 일렁였다. 내리 치려는 순간, 차원의 방벽에 작은 구멍이 생겼다.
“주신을 뵙습니다. 저는 연옥의 부소장입니다.”
“네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다. 왜 문을 열지 않지? 감히 계약을 어기겠다는 뜻인가?”
“방금 백신전에 통신을 했는데 듣지 못하셨습니까?”
“무슨 뜻이냐.”
“소장님이 개인적인 일이 생겨 휴가를 신청하셨습니다.”
“···뭐?”
“해서 이주일간 연옥을 출입을 통제하고 누구도 들이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시길.”
구멍이 사라졌다.
“하하···!”
베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없어서도,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생각해낸 게 고작 이주일의 유예라니. 네 꼼수도 다 떨어진 모양이구나.”
김우진이 보여주는 하찮은 수가 그가 어떤 상태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서였다.
이주 뒤가 김우진의 마지막이다.
그는 확신했다.
* * *
“자, 일단 이주 벌었고 이 다음은 뭐라고 했지?”
“죄수들을 받아놓고 입을 봉하는 겁니다. 소장님. 출소하고 싶다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그리고 전부 진실한 신이 누군지 깨닫고 소장님의 신도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 한다고는 안 했어.”
하지만 주신의 위엄과 신앙을 퍼트리는 것은 당연한 건데···. 디아네가 구석으로 쪼그라들었다.
“일단 이주 안에 모두 신으로 만들 겁니다.”
맨 처음이 율리아였고 타르칸까지 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은 아직이다. 지난 3개월간 꾸준히 훈련을 거듭해 모두 성장하긴 했지만 타르칸만큼의 확신은 없었다.
주로 타르칸에게 집중했었으니까.
“가장 유력한 건 저 광신도다. 그 다음은 소지라는 인간과 엘프고. 제일 떨어지는 건 독인간이군.”
두리쉬마가 죄수들의 수준을 확인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신의 대적자인 그였기에 반대로 누가 가장 신에 근접한지 알 수 있었다.
“이주동안 강민식을 가장 집중적으로 가르쳐야겠군요.”
“내가 하지. 저 독 인간의 독기에는 마기가 섞여 있으니.”
“만약 이들이 전부 신이 된다면 주신을 잡을 수 있을까요?”
“주신을? 조건이 어떻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일단 네가 있으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또 뭘 꾸미는 거야, 김우진. 연옥 안에서 백신전과의 전투는 불가능하잖아.”
“연옥 밖에서 하면 되죠.”
정확히는 연옥에 들어오기 전.
“베리안이 온 걸 보고 생각났습니다. 놈은 오만해서 혼자였고 나머지는 죄수나 집행자였죠.”
그렇다면 그 때 놈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설마 그런 상황에서 공격당할 줄은, 이곳에 여섯의 신이 있을 줄은 모를 겁니다.”
“불가능하다고 본다. 상대는 주신이고 저놈들은 포위망을 풀지 않았어. 전투가 벌어지면 신들이 달려올 거다.”
“그럼 바로 튀어야죠. 일단 해보고 아니면 마는 겁니다.”
“신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싸움을 최대한 회피하기 위해서인데 지금 하는 꼴을 보니 의미가 없어져서요.”
어차피 서로 뒤가 없이 끝을 보고자하고 있으니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
“만약 모두가 신이 되고 그래서 내가 여섯 신을 죽이고 본래의 힘을 되찾는다면. 그래서 너와, 이들과 함께 합공한다면.”
잠시 고민하던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할 것도 없다고 본다.”
이미 칼카르를 잡은 경험이 있으니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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