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85. 판 >
집무실로 돌아오니 세 개의 작은 형체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파랑새, 새끼 호랑이 그리고 그 중간에 떡하니 자리 잡은 초소형 소인까지.
그 모습이 꽤나 이질적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 하마!
- 끼잉!
초소형 소인과 파랑새, 새끼 호랑이가 연달아 대답했다.
“조용히 해라. 너희들의 일이 아니다.”
- 아냐?
- 낑?
고개를 갸웃거리는 릴리와 나르의 모습이 썩 귀여웠다. 김우진은 슬그머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내렸다.
“두리쉬마님이 릴리와 나르랑 그렇게 친해지신 줄 몰랐습니다.”
“친하지 않다.”
- 치구!
- 끼잉!
“친구 아니다. 저 막무가내 녀석들은 믿지 마라.”
두리쉬마는 근엄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있었지만 양 옆에서 조잘거리는 두 세계수들로 인해 근엄함은 물 건너 간 상태였다.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차를 드시겠습니까?”
“커피인지 뭔지, 그게 맛있더군.”
김우진이 손수 커피를 타왔다. 위에 휘핑크림까지 올린 카페 모카였다.
릴리와 나르에게는 하르인이라는 꽃잎을 우린 차를 주었다. 율리아가 좋아하는 꽃차 중 하나인데 한 번 줘보니 정령체인 릴리도 꽤나 좋아했다.
“어떻게, 연옥은 좀 지낼만 하십니까?”
“마기가 거의 없다는 것과 이 두 나뭇가지들만 아니면 좋을 것 같다.”
“그래도 나름 적응을 잘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 나!
“그래, 네 덕분이야. 릴리. 잘했어.”
“그놈 덕분 아니다. 그리고 잘 적응했다고도 안 했다.”
두리쉬마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으나 릴리와 나르는 개의치 않았다.
“마기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연옥 자체가 아카식 레코드와 꽤나 근접한 교차 차원이다 보니.”
아카식 레코드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 아카식 레코드로 다가갈수록 마나가, 멀어질수록 마기가 풍부해진다.
당연히 중앙에 근접하고 신들의 기운이 충만한 연옥에는 마기가 없었다. 그나마 현재 잔재가 남은 건 얼마 전 있었던 마물 침공 덕분이었다.
그들이 죽으면서 남긴 마기의 잔재가 차원 곳곳에 스며들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힘을 잃어버린 두리쉬마의 성에는 차지 않겠지만.
“알고 있다.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온 것이니 누굴 탓할 일은 아니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두리쉬마는 굴욕을 감수하고 연옥으로 왔다. 백신전을 부수기 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기에.
다만, 재기의 발판이 생각보다 더 미약해 곤란한 부분은 있었다.
“널 찾아온 건 그걸 어느 정도는 해결할 방안이 생겼기 때문이다.”
“연옥을 나가는 건 안 됩니다.”
“포위망을 네게 알려준 게 나다. 그런 짓을 할 리가.”
“연옥 안에서 마기를 모을 방법이 있다는 겁니까?”
“그래.”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식이라는 인간 말이다. 공방 한쪽에서 독을 짜내고 있더군.”
“그놈은 독에 관련된 권능을···아. 설마?”
강민식은 두 번의 마물 침공에 연이어 막대한 마기를 흡수했다. 마기는 마물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를 중독시키고 파괴하는 독기이기 때문이다.
신 후보자들의 성장을 위해 김우진은 습격 이후, 마물들의 시체를 모아 강민식이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막대한 마기와 독기가 그의 몸속으로 들어가 정수를 만들었다.
“그래. 놈이 뽑아낸 독들은 전부 막대한 마기를 품고 있다. 그것들을 내가 좀 마셨으면 한다.”
“···아, 그 이야기였습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거냐.”
“강민식 몸에 만들어진 정수를 뽑아 먹으려시는 줄 알았죠.”
“···나를 뭘로 보는 거냐. 이런 상황이 되긴 했지만 아군의 심장을 뜯어먹을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다.”
두리쉬마가 인상을 구겼다.
- 아이다!
- 끼이끼!
릴리와 나르가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 말투를 따라했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나저나 독이라···.”
마기와 마나는 상극이다. 자연스레 강민식에 의해 응축된 마기의 독은 신과 집행자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마력포에 담아 쏘아내려고 했던 건데···.
김우진은 잠시 저울질을 해보았다.
독기의 마력포와 힘을 되찾고 다시금 마물의 군단장이 되어 백신전을 습격하는 두리쉬마.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가 훨씬 낫다.
“좋습니다. 헌데 겨우 그걸로 충분하겠습니까?”
아무리 강민식이 먹어 치운 마물의 독기가 방대하다고 한들, 두리쉬마 앞에서는 조족지혈이다.
“당연히 부족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당장은 그 정도로 만족하는 수밖에.”
“앞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군요.”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지. 놈들의 감시가 심하니.”
“그게 이상합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터졌음에도 신들은 방관하고 있다. 그저 연옥을 포위하고 지켜보고 있다.
어째서? 왜?
처음에는 단순히 김우진이 딴 짓을 못하도록 그냥 원천봉쇄를 하려는 줄 알았다.
헌데 슬그머니 차원 밖으로 나갔을 때, 더욱 많아진 신과 집행자들을 볼 수 있었다.
늘어나고 있다는, 포위망이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겨우 포위망을 구축하기에는 지나치게 과하다. 김우진이 은신에 특화된 자도 아니기에 저 정도까지는 절대 필요 없었다.
무언가 노리는 게 있다.
드네르바한테 통신을 하고 싶어도 이런 상황에서는 적발되는 순간 함께 나락이다.
“그게 무엇일까요?”
“글쎄, 여러 가지를 생가해 볼 수는 있을 거다. 신들이 너를 이곳에 더 오래 붙잡아두기 위해 꽤 많은 짓을 했다고 했었지?”
“예.”
강민식이나 강민식처럼 작업을 해놓은 죄수들을 넣거나, 마물들을 보내거나, 집행자를 넣거나.
“다 실패했고.”
“네.”
“그때마다 신들은 꽤 큰 피해를 입었고.”
“그렇죠. 일단 드네르바가 신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도망쳤고 베른은 실종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알베니우스를 쫓아왔던 칼카르가 죽었고 델라푸스마저 실종됐지. 저들은 알베니우스와 네가 이미 만났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을 거다.”
“그렇겠죠.”
그러니까 주신도, 델라푸스도 김우진과 연관이 있게 된다.
“거기에 세계수까지. 저들은 크라프트의 세계수를 불태우면서까지 분노를 표출했다. 헌데 정작 너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지.”
“그랬죠.”
“저 오만하고 고고한 놈들의 자존심이 얼마나 구겨졌을지 상상해 보았느냐.”
해봤다. 그래서 놈들이 반드시 두 번째, 세 번째 수작을 벌여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헌데 그 두 번째, 세 번째도 실패했지. 내가 아는 놈들이라면 방법을 바꿀 거다.”
“방법을 바꾼다면?”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정공법으로.”
“그건 불가능합니다.”
김우진과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으로 묶여 있다. 계약이 완수되지 않는 이상, 그를 죽일 수 없다. 연옥 내에서는 아예 공격할 수도.
“신들이 너를 연옥에 묶어둔 이유는 그게 더 이득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너의 행보가 저들에게 크나 큰 경각심을 주기 충분했다.”
필요성보다 경각심이 더 커졌다.
“신들의 전력은 차츰 깎여나가는데 넌 더 강해지고 있다. 내가 신이라면 그 관계가 역전되기 전에 널 칠 거다. 무조건.”
“역전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나 할까요?”
“그야 모르지. 난 신이 아니니까. 허나, 신이 될 만한 싹들을 모조리 잘라버린 걸 보면 신들의 조심성은 알지 않느냐.”
가루다도 포이닉스도 타이탄도 고작 그런 이유로 멸망했다.
“···확실히.”
“50명의 용사들을 출소시킬 때까지 계약이 유지된다고 했었나? 나라면 50명의 용사들을 죄수로 보내 모두 자진 출소하게 만들 거다.”
그리고 계약이 끝나는 순간.
“연옥을 덮치는 거지. 미리 준비를 해놓다가 대비하지 못할 타이밍에.”
두리쉬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고 저 오만한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니, 아닙니다. 무조건 그겁니다.”
감이 왔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김우진의 눈에 핏발이 섰다.
“바로 그거예요.”
지금은 준비 기간이다. 새로운 죄수들을 모을 시간. 새로운 용사들을 발탁하든, 집행자들을 죄수로 만들든 시간이 필요한 거다.
“만약 그렇다면 그 경각심은 너뿐만이 아니라 나의 영향도 있을 거다. 나라는 존재가 들켜버려서 너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어졌다는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확신이 생기네요.”
빌어먹을, 왜 이 생각을 못했지?
평화에 너무 안일해졌나 보다.
김우진이 계약의 허점을 이용해 신들을 농락한 만큼 신들 또한 계약에 능숙해졌거늘.
“···잠깐만.”
계약?
계약이 끝나는 조건이 50명의 죄수들을 자진 출소시키는 거라면.
“애초에 죄수를 안 받으면 출소시킬 수도 없는 거잖아?”
김우진이 눈을 빛냈다.
* * *
“저 때문일까요?”
크라프트 세계수의 비보를 접한 이후, 율리아는 침울해했다.
비록 세계수를 협박하기 했지만 실제로 그건 세계수를 위해서였다. 김우진에게 본체가 반쯤 불타는 것보다는 그녀에게 한 소리 듣는 게 나으니까.
실제로 김우진은 그러려고 했으나 율리아로 인해 그러지 않았다.
하지만 씨앗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세계수는 소멸했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율리아.”
시에나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를 불태운 건 네가 아니라 신들이야.”
“만약 씨앗을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돌아가시지 않았겠죠?”
“그러면 네가 따르는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께서 불타고 계셨을 지도 모르지.”
신들은 반드시 씨앗을 건넨 세계수를 찾고자 했으니까. 그 의지는 크라프트의 세계수를 불태움으로서 드러났다.
“하지만 차라리 그분이 죽어서 다행이다라고 할 수는 없어요.”
“애초에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야. 모든 원인은 백신전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하니?”
복수심을 불태워야지.
엘프들을, 세계수들을 우습게 보는.
세상을 자신들의 체스판으로 여기는 백신전에게.
“맞아요.”
율리아가 처음 용사가 되었을 때를 떠올랐다. 데이드람에서 세계수를 만났고 알베니우스를 만났다.
용사로서 점점 성장하다가 진실을 들었다. 그리고 세이드 델름의 유품을 받았다.
“세이드 델름이라는 엘프는 정확히 누구니? 네 가족? 연인?”
“가족이죠. 어렸을 때부터 함께한 호위 기사니까요. 아버지 같은 존재였어요.”
“그렇구나.”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되서 애타게 찾았었어요. 끝내 못 찾았지만 설마 글라크로 소환되어 용사가 되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우리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소환된 거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갑자기 실종된 거지.”
그만큼 신들의 소환에는 배려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하긴, 모두 자신들의 체스말로 여기는 족속들인데 피조물 따위를 배려할 리가 없다.
“그런데 잠깐만 글라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차원인데.”
“알베니우스님이 소장님이 있던 차원이라고 했어요.”
“소장은 지구 출신이잖아?”
“소환된 차원이요.”
“···아.”
그제야 시에나는 글라크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는지 깨달았다. 소장은 자신이 용사였다는 것을 죄수들에게 밝히지 않았었다.
어쩌다 한편이 되었으니 알게 된 거지.
허나, 종종 글라크라는 이름을 입에 담기는 했다.
“소장이란 같은 차원이라···. 잠깐만? 한 차원에 용사가 두 명이었다고?”
“아뇨.”
“그럼 어떻게 같은 차원이야?”
“두 명이 아니라 수백 명이었다고 했어요.”
“···뭐?”
“그곳의 멸망은 너무도 강력해서 용사 한둘 가지고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데요. 그래서 신들은 무차별적으로 용사들을 소환했다고 해요.”
“그런 끔찍한 곳이 있었다고?”
“세이드는 소장님과 함께 마지막 결전까지 갔다고 했어요.”
율리아가 침울해졌다.
“···미친.”
시에나는 그제야 같은 용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부터 줄곧 가지고 있던 의문을 납득할 수 있었다.
같은 용사인데 왜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는가.
그냥 노는 판이 달라서 그랬다.
엄청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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