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84. 연옥의 작은 아이들 >
“미친놈 아니야? 갑자기 왜 각성해?”
갑작스레 방대한 신의 힘이 느껴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두리쉬마가 그래도 분투 끝에 신 하나를 죽였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렇다고 지하 감옥에 따로 가두어두었던 죄수가 갑자기 신이 되어버리는 일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집행자들 사이에서 페트로 코페르크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지?”
“최상위권이었습니다.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주신을 모셔온 자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입니다. 저 또한 버틸 수 있을지언정 승리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럼 최측근이라는 건데 그런 놈을 왜 여기다 집어넣은 거야?”
“최측근이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겠습니까?”
“음.”
김우진은 어쩌면 디아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들은 그를 엿 먹이기 위해 여러 계획을 세웠으나 연달아 실패했다. 신의 자존심은 구겨졌고 반드시 성공할 한 방이 필요했을 거다.
주신의 최측근 집행자는, 다음 신에 가장 근접한 자는 어떻게 보면 가장 믿음직스러운 적임자였다.
디아네가 김우진의 광신도가 되지 않았다면 들키지 않았을 지도 모르고.
“백신전이 또 다시 뒤집어졌겠군.”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결국 저쪽의 신 하나를 더 이쪽에서 납치해온 거나 다름없으니까.
“패트로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굴러들어온 신을 처리할 방법은 하나뿐이지.”
세계수들의 거름으로 삼는 것.
“하지만 페트로는 율리아의 경우와는 조금 다르지 않겠습니까?”
“다르긴 해.”
신들의 입장에서 율리아는 정말 갑자기 솟아난 불청객이다. 때문에 그녀가 신이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할 수도, 그녀라고 특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페트로 코페르크는 다르다.
오래전부터 주신의 집행자로서 생활을 영위해온 바, 주신이 직접 키운 다음 대 신 후보 중 하나다.
만약 백신전의 집행자들 사이에 신이 된 자가 없다면 자연스레 페트로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율리아 같은 자가 둘이나 존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테니 더욱 더.
그렇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빼내려고 하겠지.
“소장님.”
똑똑, 그때 부소장이 문을 두들겼다.
“놈이 깨어났습니다만, 자진 출소를 하겠다고 합니다.”
* * *
출소.
연옥을 나가는 방법은 오직 세 가지다.
탈옥하거나.
자연사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들이 내려준 용사의 힘, 즉 신의 힘을 포기하고 자진 출소하거나.
연옥에 갇힌 수많은 죄수들이 힘을 포기하기 싫어 그대로 갇혀 있는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쁜 걸로 따지면 오히려 부려먹기만 잔뜩 부려먹고 쓸모가 다해 토사구팽하는 신들이 개새끼지.
어쨌든, 김우진은 연옥의 소장으로 죄수가 자진 출소를 택하면 백신전에 보고하고 무사히 호송대에 인계할 책임이 있다.
“나가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신이 됨으로서 안색이 훨씬 나아진 페트로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방 먹어서 그런지 신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공손했다.
“연옥의 죄수들은 용사의 힘을 포기하면 출소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의 세계로 가고 싶습니다.”
“원래의 세계가 아니라 백신전이겠지.”
“그건···.”
“바리하 칸이라고 불러줄까, 아니면 페트로 코페르크라고 불러줄까.”
“···후자로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아예 숨길 생각도 안하는군.”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김우진이 티스푼으로 커피 잔을 휘저었다.
“근데 왜 지금일까. 네가 자진 출소를 택할 기회는 꽤나 많았는데.”
“그건···.”
“내가 맞춰볼까?”
후룩, 커피를 한 모금 음미했다. 적당한 초콜릿이 뒤섞인 모카는 언제나 그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신이 되기 전에는 네 주인의 명령을 완수하기 위해서였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않으니까 이곳에 붙어 있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네 주인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 고문과 고초를 겪고도 자진 출소를 끝내 입에 담지 않았었다.
“물론 내가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고.”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페트로가 자진 출소라는 카드를 내민 것은 별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 모든 것보다 네가 신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더 중요하니까. 집행자와 신은 다르지. 집행자가 내 손에 있는 것과 신이 내 손에 있는 건 다르니까. 그렇지?”
“···아닙니다.”
“아니긴.”
김우진이 픽 웃었다.
“나는 연옥의 소장으로서 죄수가 자진 출소를 원하면 내보내줄 책임이 있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건 의무가 아니잖아.”
그래, 책임이다.
“···그게 다르다는 겁니까?”
“다르지.”
의무와 책임은 둘 다 해야만 하는 일임에는 같지만 연옥에서의 의무와 책임은 아주 간단하게 구분이 된다.
“죄수가 출소를 원할 때 반드시 내보내야만 한다는 조항은 계약서에 없어.”
“······!”
페트로를 내보내면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직에서 벗어나기 위한 할당량이 일부 채워지지만 고작 한 명을 늘리자고 백신전에게 신을 다시 가져다 바치는 미련한 짓을 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돼. 여기서는 내가 왕이고 법이거든. 죄수들 중에 너 같은 양반이 하나 있지. 탈옥을 하려고 했다가 수틀리니까 자진 출소를 하겠다고 했거든.”
탁, 김우진이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지하 감옥에 있습니까?”
“아니, 신들에게 복수하겠다고 하루 종일 공방에서 무기를 만들고 있어. 여기서 요지가 뭔 것 같아?”
“···출소는 불가능하다?”
“아니지. 너도 항복하면 행복한 연옥 라이프가 기다리고 있다는 거지.”
평소라면 회유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주신의 최측근이라는 점이, 세계수들의 포용 한계가 이미 차버렸다는 점이, 그리고 백신전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빼내갈 것이라는 점이 김우진의 마음을 돌렸다.
최측근이라는 페트로를 회유한다면 백신전에게 얼마나 큰 한 방을 먹일 수 있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네가 할 건 간단해.”
김우진이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꺼냈다.
“여기에 사인하는 거야.”
“어떻게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그런 건 궁금해 할 필요 없고.”
“···나는 주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배신하는 게 아니야. 그냥 두 주인을 섬기는 거지.”
“궤변입니다.”
“그렇다면 너도 베른과 똑같은 신세가 되는 거야. 연옥에 세계수가 심어진 건 알지?”
모를 리가 없다. 연옥 전체에 이렇게 진하게 세계수의 기운이 남아 있는데.
“평생 세계수 뿌리에 봉인 되어 마나와 신력을 쭉쭉 빨리고 싶어?”
“당신은 결국 패배할 것이고 주신께서는 저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예.”
집행자의 상태라면 모를까, 그는 지금 신이었다. 분명히 주신께서는 그를 구해주실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사실 그게 맞긴 해.”
그리고 김우진도 그렇게 생각했다.
백신전에서 착오가 있었다며 죄수를 다시 데려가려고 한다면, 김우진으로서는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 회유하고 싶었는데 역시 주신의 최측근의 심지는 굳었다.
하긴, 쉽게 넘어오면 주신이 최측근으로 삼았겠나.
그래서 김우진은 페트로와 베리안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페트로와 베리안을 이어주는 권속의 결속.
“끄아아아아악!”
영혼이 찢어 발겨지는 듯한 충격에 페트로가 비명을 질렀다.
“어, 어떻게···?”
한참 후, 엄청난 공허함이 페트로를 강타했다.
권속의 결속은 결코 쉽게 깨트릴 수 없다. 특히 주신이 직접 맺은 결속은 같은 주신이라고 해도 쉽지 않다.
권속 쪽에서 결속을 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결 쉬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다. 괜히 주신이고, 괜히 권속이겠는가. 한 번 묶여 버린 영혼을 쉽게 해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헌데 김우진은 해냈다.
아무리 구속구로 인해 그의 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고 해도 그 또한 신이거늘. 주신의 결속이거늘.
“내가 능력이 조금 돼.”
온 몸이 땀으로 젖은 김우진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웃었다.
결속이 얼마나 단단한지 마나가 완전 바닥이 났다. 결코 두 번 할만한 짓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전이면 불가능했겠지. 하지만 칼카르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고 그의 불꽃과 융합하면서 그의 능력을 일반적인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자, 이제 마음이 좀 바뀌어?”
“결속을 푼 건 놀랍지만 결속이 풀렸다고 해서 그분을 향해 내 충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넌 그렇겠지만 베리안도 그럴까?”
“···뭐라고?”
“상식적으로 주신이 맺은 권속의 결속을 푼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특히, 베리안은 김우진이 칼카르를 먹어치운 것을 모르기에 더욱 더.
불가능한데 풀렸다.
그렇다면 베리안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쪽을 생각할 거다.
“페트로가 신이 되더니 딴 마음을 먹고 김우진에게 붙은 게 아닐까,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이 안 되지. 근데 또 말이 아예 안 되지는 않거든. 내가 베리안을 좀 알거든? 그놈은 의심이 많아.”
가장 최측근에서 놈을 모셔온 네가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자, 다시 물을게.”
페트로의 동공이 흔들렸다.
“항복할래, 이대로 다시 갔다가 의심받으면서 처리 당할래?”
* * *
- 새 도새?
“웃기지 마라, 세계수여. 나는 네 동생 따위가 아니다.”
10cm의 두리쉬마가 릴리를 밀어냈다. 하지만 릴리는 새로운 식구가 반가운지 끊임없이 주변을 서성였다.
- 끼잉?
나르도 마찬가지였다. 나르는 누나가 하는 걸 무엇이든 다 따라하려는 듯, 릴리를 졸졸 따라다녔다.
“···신세가 처량하군.”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두리쉬마의 정체를 모른다. 그만큼 그가 완벽하게 기운을 감추었다는 뜻이기도 하며, 신들과의 전투에서 모든 마기를 소모해 전력이 급감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두리쉬마는 세상을 벌벌 떨게 하는 어둠의 사도이자 타이탄이 아니라 귀여운 소인족이 되었다.
타이탄 생 최대의 굴욕이었다.
“감히 나를 애 취급하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내 망치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쪼그만 게 성질이 사납네요.”
“뭐, 김우진하고 아는 사이면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자네, 변종 드워프인가? 드워프들 중에서 특별히 작게 태어난 이들이 있긴 한데.”
“당신의 세상에는 작은 식재료들만 있습니까?”
“소장님이 데리고 오셨다면 당연히 동지입니다. 저와 함께 소장님의 교리를 배우러 가시겠습니까?”
“다 꺼져라! 죽여버리기 전에!”
이후, 김우진에게 부탁해서인지 더 이상 죄수들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세계수들은 예외였다.
이 천진난만한 악동들은 그를 자신들의 동지라 여기고 있었다. 세계수가 아닌 걸 알고 있음에도 단순히 크기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 노자.
“놀지 않는다. 난 잃어버린 마기를 모아야 한다.”
- 마기?
- 끼잉?
“그래. 여기로 온 게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군.”
물론 신들에게서 그나마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이곳밖에 없었다. 하지만 빛과 신의 힘이 충만한 이곳에서 마기를 모은다는 것은 지독하게 어려운 고난이었다.
- 나 아라. 마기. 마나.
“마기가 많은 곳을 안다고?”
- 으!
“연옥을 벗어나면 안 된다.”
- 여노 아네.
“연옥 안에 마기가 넘쳐나는 공간이 있다니? 그랬다면 김우진이 내게 말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 아려주며 치구?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파란 핏덩어리가 감히 누구에게 친구라고 하는 거냐. 나는 수 만 년을 살아온 위대한 타이탄이다.”
- 나 리리.
- 낑 끼잉.
“너희들의 이름은 궁금하지 않다. 하지만 마기가 있다는 곳은 궁금하군.”
- 아려져?
- 끼잉?
“알려줘라. 난 너의 적이 아니다. 세계수.”
- 아라. 조자 치구.
“그녀석과도 친구는 아니다만, 뭐 그렇다고 해두지.”
두리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우진이라면 능히 그의 친구라고 할 만한 자격이 있었다.
- 다라아.
- 끼깅!
릴리가 앞장섰다. 나르가 꼬리를 흔들며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어. 세계수님? 두리쉬마님? 무슨 일이십니까?”
마물에게 흡수한 독을 짜내는 강민식이 있었다.
쓰으읍, 숨을 크게 들이키자 익숙한 향취가 느껴졌다.
막대하게 담긴 검은 독기와 강민식이 품은 마기에 두리쉬마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기와 독기가 그대로 두리쉬마에게 빨려 들어왔다. 어둠의 사도에게 반응한 마기들이 스스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
사방에서 튀어오르는 병들에 강민식이 당황했다.
“너희들의 말이 맞았다. 이 연옥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 으!
- 낑!
“강민식.”
“제, 제 꺼!”
“비켜라.”
“이건 제겁니다! 제가 노력해서 만든 제 독입니다!”
강민식이 본능적으로 두리쉬마와 독기 병들을 가로 막았다.
그의 결연한 눈빛에 두리쉬마가 곧 힘을 거두었다.
“하긴, 주인에게 허락도 없이 막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맞습니다! 그리고 주인인 저는 절대 허락을···응?”
하지만 두리쉬마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 어디?
“연옥의 주인이 누구냐.”
- 조자!
“그래, 김우진을 만나러 간다. 저것들을 취해야겠다.”
두리쉬마가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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