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83. 떡 >
두리쉬마가 나타난 것은 무척이나 갑작스러웠다.
“···미안하다, 김우진.”
마기는 현저히 줄어들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대신 온 몸에 신의 힘으로 인한 상처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일단 차 한 잔 드시죠.”
“고맙다.”
두리쉬마가 따스한 세계수의 잎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놈들이 결국 찾아온 겁니까?”
“주신. 주신이 나섰다.”
“어떤 주신입니까?”
“물과 얼음의 권능을 사용하는 놈이었다.”
알비츠다. 백신전의 세 명의 주신 중 하나.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주신과 신들이 델라푸스의 흔적을 추격해왔다. 지운다고 지웠는데 주신의 감각을 완전히 숨기는 건 미흡했던 모양이야.”
타이탄은 애초에 공간 계열의 권능이 없다. 거의 다루어 보지 않은 힘을 다루는 것은 어렵고 빈틈이 많다.
스스로를 숨기는 거라면 몰라도 공간의 흔적 자체를 지우는 건 쉽지 않다.
“내가 은신하고 있는 차원으로 놈들이 왔다. 처음에는 기꺼웠으나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둘이라면 모를까 신들이 무려 35명이었다.”
그것도 주신을 제외하고.
미친 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리 마물과 마기가 넘쳐나는 변방 차원이라고 한들 35명의 신들은 수준이 다르다.
수십만의 마물이 달려들어도 결국 쓸려버릴 수밖에 없다.
이미 멸망을 맞이한 종말 차원은 마기로 인해 신력의 흐름이 원활하지는 않지만 하위 차원처럼 힘 자체가 제약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리쉬마는 패배했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분하지만 도망칠 수밖에.”
피를 삼키며 도망쳤다. 하지만 신들의 추격은 끈질겼다.
“김우진, 델라푸스 말고 추가로 신들을 납치했나?”
“그랬습니다.”
“그 범인을 나로 생각하고 있더군. 납치한 신들을 내놓으라고 하기에 어둠의 사도가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큰 소리 쳐줬지.”
두리쉬마도 보통이 아니다. 그가 크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변방 차원 백 여 개를 넘나들며 추격전을 벌였다. 차원마다 존재하는 모든 마물들을 이용해 그들을 저지하고자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허무하게 이대로 끝이구나 싶을 때, 네가 생각났다.”
두리쉬마는 어둠에게 받은 권능을 이용했다. 어둠의 분신. 자신의 모든 힘을 투영시킨 분신으로 하여금 신들에게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하고 본체는 현장을 벗어났다.
아주 미약해진 힘과 마기는 작정하고 숨기면 신조차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작아진 겁니까?”
“그래.”
두리쉬마는 10cm 정도의 작은 크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거인이라기보다는 인형이라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형태.
“타이탄으로서 가장 부끄러운 형태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죽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게 낫습니다. 복수를 하셔야죠.”
“그래, 옳은 소리다.”
뿌득, 두리쉬마가 이를 갈았다.
“헌데 무사히 탈출하고 나서도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이곳 연옥을 중심으로 꽤 탄탄한 포위망이 구성되어 있던데.”
“포위망이요?”
“그래. 신과 집행자들이 연옥 안으로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더군. 몰랐나?”
“몰랐습니다.”
크라프트에 다녀온 이후로 연옥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까.
일주일이 넘도록 아무런 반응이 없어서 이상했는데 설마 포위망을 만들고 있었나?
왜?
‘당장 나를 건드리지 못하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게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 정말 그뿐일까? 베리안 그놈이 고작 그 정도에서 만족할까?
아니다. 김우진은 확신했다. 놈들이 노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더불어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헌데 어떻게 들어오신 겁니까? 혹시 들키신 건 아니겠죠?”
마왕인 두리쉬마를 숨겨줬다가는 계약이고 나발이고 다 의미가 없어진다.
“들키지 않았다. 이 상태의 나는 작정하면 주신도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렇군. 더 없이 미약한 존재감에 나름 납득이 갔다. 잘 숨겼다기 보다는 숨길 게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원의 문은 알아서 열어줬다만.”
“릴리, 네가 문을 열어준 거야?”
- 으!
아무래도 지난번에 두리쉬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두리쉬마가 건네준 물건을 보여준 것 덕분에 알아본 모양이다.
“잘했어.”
- 리리, 자해어?
“잘했어. 동생도 괴롭히지 말고 잘 지내야 돼.”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신, 알비츠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백신전의 대전, 불가피하게 올 수 없는 소수를 제외하고 모든 신들이 자리했다.
베리안은 상석에 앉아 알비츠와 그를 따르는 34명의 신들을 반겼다.
“그들을 찾기 전에는 오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들을 찾아낸 것이겠지?”
허나, 실종되었던 네 명의 신들은 보이지 않는다. 베리안 또한 그걸 모르지 않았다.
“변방 차원 수 백 개를 뒤졌으나 그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신들은 왜 34명뿐이고?”
“위대한 아카식 레코드의 품으로 돌아갔다.”
“죽었다고?”
신들이 경악했다. 무려 35명의 신들이, 주신을 포함하면 36명의 신들이 함께 했음에도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건가?”
“믿을 수밖에. 사실이니까. 우리는 너무 평화에 찌들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신 넷을 납치한 마물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칼카르나 델라푸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칼카르가 마물들의 영역에서 죽었고, 델라푸스는 몇 주 째 연락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럴듯하군.”
“델라푸스의 마지막 연락 장소에서 그의 흔적을 발견했다. 누군가 강제로 지운 기색이 역력했지. 그것을 추적해 나갔다.”
수십 개의 차원을 넘었다. 어쩌면 백 개가 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나는, 우리는 타이탄과 마주했다.”
“타이탄?”
“타이탄은 멸족한 것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 마지막 타이탄은 그때 죽었는데···!”
타이탄은 신들에 의해 멸종한 종족이었다. 태생적으로 신의 힘을 타고나 신들에게 배척받고 탄압 받다가 종국에는 반기를 들었던 자들.
허나, 신들의 위세는 우주를 찔렀고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그들을 멸족시켰다.
어린 아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박멸했다. 때문에 알비츠의 말은 믿기 힘들었으나, 반대로 알비츠이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생존자가 있었다고?”
베르안도 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허리를 폈다.
“어둠의 사도가 되어 있었다. 변방의 차원에서 수십 만 마물들을 이끌고 있더군. 그 차원에서만 그러했으니 다른 차원에서는 얼마나 더 많은 마물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놈이구나.”
신들이 직감했다. 마물들을 어그러트리고 신들을 납치핸 간 범인이 틀림 없다고.
“놈은 죽였겠지?”
“죽이지 못했다.”
“그런 말을 참으로 당당하게도 하는구나. 타이탄이라면 덩치가 산만한 놈들일 테고 어둠의 사도라면 마기를 풀풀 풍길 텐데 그걸 놓쳤다는 거냐?”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거대한 거인과, 마기가 진득한 어둠의 사도와 싸웠다. 그리고 놈을 죽였다. 허나 시체를 확인했을 때, 정작 알맹이가 없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탈출을 감행했다는 뜻이다.
“이후, 주변의 변방 차원 수십 개를 뒤졌으나 놈을 찾지 못했다. 당연히 다른 네 신의 흔적도 마찬가지였다.”
“죽었다는 건가?”
“그건 이제부터 아카식 레코드를 확인해봐야겠지. 그게 최우선이다.”
“···같이 가도록 하지.”
회의가 잠시 멈췄다. 두 주신이 아카식 레코드로 향했다.
우주를 밝히는 거대한 빛의 기둥 앞에선 둘은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차분히 기록을 살폈다.
그러길 한참.
“···네 신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변방 차원에 숨겨 두고 있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그곳에서 그들을 어둠의 사도로 만들려고 하고 있을 수도 있다.”
“최대한 빨리 찾아야겠군.”
허나 쉽지 않을 것이다. 변방 차원은 정말 무수히 많으니까.
알비츠가 또 다른 기록을 찾았다.
“새로운 신이 선택되었다. 타이탄에게 죽은 벨가의 후계다. 이틀전이군. 어떤 집행자가 신이 되었지?”
“···뭐라고?”
“왜 그러지?”
“잠깐, 잠깐만.”
베리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틀 전에 이미 신이 선택되었다고?”
“그래.”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무슨 헛소리냐. 그럼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냐.”
“그런 뜻이 아니다. 나는 신이 죽었다는 소리를 너에게 처음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반응이었지. 잠깐만 설마?”
“그래.”
베리안의 이를 악 물었다.
“집행자들 중 그 누구도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
벌써 두 번 째였다.
* * *
주신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연옥으로 들어가라. 김우진의 신뢰를 얻고 놈의 속셈을 모두 알아내라.’
‘괜히 무언가 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그것을 최우선으로 해라.’
‘네가 들키지 않도록 다른 놈들을 뒤섞을 테니 조심하기만 하면 된다.’
주신을 모시는 상위 집행자 페트로 코페르크는 기꺼이 과업을 위해 스스로의 신분을 버렸다.
그는 바리하 칸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 차원의 용사가 되었고 연옥으로 들어왔다.
집행자 당시의 말투와 습관 때문인지 김우진의 경계심을 사기도 했지만 다른 죄수들 덕분에 잘 넘겨왔다.
헌데 하필 그와 만나고 싸워보기도 했던 집행자가 김우진의 개가 되어 연옥으로 들어왔다.
얼굴을 감추어도 본질적인 기운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다. 그의 정체는 순식간에 들통났고 김우진은 자비를 배풀지 않았다.
‘내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건 네 주인들뿐이야. 그게 계약이거든.’
맞다. 백신전과 김우진 사이에 맺어진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은 집행자들의 안위까지 신경써주지 않는다.
‘걱정 마. 죽이지는 않을게.’
하지만 죄수가 죽어서는 안 된다는 조항 덕분에 그는 목숨을 건졌다. 목숨‘만’ 건졌다.
육지가 부러졌고 강도 높은 고문이 이루어졌다. 치료는 딱 죽지 않을 정도.
아는 모든 것을 불라는 김우진의 협박에 굴복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참았다.
언젠가 신께서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기에.
“···주신이시여.”
메마른 입술에서는 갈라진 목소리가 나온다. 부러진 육지에서는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은 여전히 뇌리를 찌른다.
아무 것도 없는 어둠. 고통과 지루함.
페트로 코페르크는 하루하루 초췌해져갔다. 정신은 마모되고 육체는 피폐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그래, 그게 오히려 신을 위하는 길이다. 그가 죄수의 신분인 한, 김우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죽게 내버려 두면 안 되니까.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겨우 혀를 깨물었다고 죽을 만큼 집행자의 신체는 나약하지 않다. 구속된 구속구들을 끊어낼만큼의 여력이 남아 있지도 않으며, 설상가상으로 철창 밖에는 교도관 하나가 눈에 불을 켜고 그를 감시하고 있다.
‘신이시여, 대체 언제쯤 저를···.’
그 순간이었다.
번쩍-
빛이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감옥의 구조물들은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페트로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환한 빛줄기에 어둠이 사라졌다.
그리고 페트로는 충만감을 느꼈다. 힘과 전능감을 인지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단숨에 깨달았다.
주신을 모시면서 수도 없이 봐왔기에, 자신도 그러기를 바랐기에.
신.
“···내가 진짜로!”
신이 되었다.
각성의 빛의 영향인지 구속구는 전부 먹통이 되었다. 부러진 육지가 저절로 맞춰졌고 상처들은 모두 회복되었다.
완전히 말라 바닥을 드러내던 마나 또한 폭포수처럼 샘솟았으며 신의 힘이 충만했다.
철컥-
신들이 만든 기능이 삭제된 구속구는 그저 하찮은 금속에 불과했다. 페트로 코프르크가 가볍게 그것들을 끊어냈다.
“마, 맙소사···!”
당황하여 도망치는 교도관의 뒷모습이 보였다.
페트로는 그가 도망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분노를 담아 신력을 이용해 창을 생성했다. 그대로 던졌다.
───!
집행자일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섬광이 모든 것을 꿰뚫었다. 그대로 교도관의 몸까지 뚫어버리는 순간이었다.
붉은 장벽이 교도관과 창 사이를 가로 막았다.
쩌어어엉, 격렬한 파공음이 지하 감옥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페트로가 바라는 방향이 아니었다.
소멸한 창과 그대로 남아서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김우진!”
검은 머리의 남자가 걸어왔다.
“두리쉬마님에게 신 하나를 죽였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건 또 예상 밖인데.”
죽일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살려두고 있던 놈이 신이 되다니.
“이게 웬 떡이야.”
김우진이 웃었다.
그리고 신이 된 페트로 코페르크는 깨달았다.
신이 되었음에도 김우진을 상대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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