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83화 (83/150)

# < 082. 기강 잡기 >

“주신께서는 아키식 레코드를 확인하러 가셨네. 아카식 레코드는 주신께서만 접근할 수 있는 바, 당장 주신께 만남을 요청하는 것을 불가능 해.”

“그렇다면 기다리겠습니다.”

메이린이 텅 빈 백신전의 대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주신께서 원하시는 바를 찾으셨으면 좋겠군요.”

“그러길 바라야지. 아카식 레코드를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편린만 이해해도 어쩌면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행적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니.”

그녀와 같은 상위 열 명의 신 중 하나인 제라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 지나고 베리안이 백신전으로 돌아왔다.

“왔구나, 메이린. 그 나무가 맞더냐.”

“예, 주신이시여.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김우진에게 씨앗을 건네준 자가 맞았습니다.”

“확실한가?”

“처음에는 알베니우스를 모른다고 발뺌을 했습니다만,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와 함께 김우진에게 씨앗을 건네지 않았다는 확답을 요구하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저희들을 향해 먼저 살기를 드러냈습니다.”

“그렇다면 확실하군. 놈을 어떻게 했느냐.”

“완전히 불태워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그 흔적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았으니 모든 세계수와 크라프트의 피조물들에게 더 없이 확실한 경고가 될 것입니다. 역시 씨앗은 없었습니다.”

“잘했다.”

“과찬이십니다.”

메이린이 고개를 숙였다.

“그 외에 특이사항은 없나? 김우진이나 알베니우스에 대한 흔적을 찾았다거나.”

“예.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그 미꾸라지 같은 도마뱀놈이 드디어 죽을 때가 되었구나.”

프흐흐, 베리안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냐.”

“연옥입니다.”

“···재미있군.”

미소가 지워졌다.

잠시 고민하던 베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그냥 내버려 두어라.”

“그래도 되겠습니까?”

“연옥에 있다면 어차피 김우진을 치울 때 한 번에 같이 치우면 그만이다. 지금 필요한 건 괜히 더 김우진을 자극하는 것보다 한 번에 몰아치는 것이다.”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안할 이유는 없겠지. 다른 신들과 함께 연옥을 완전히 틀어 막아라. 누구도 차원을 빠져나올 수 없도록.”

“예.”

“가보도록.”

주신의 축객령에 메이린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환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 됐다고 봅니다.”

이전이었으면 뚜렷한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향을 완전히 틀어버린 이상, 그런 건 의미가 없었다.

“가보도록. 다시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러 가겠다.”

“원하는 바를 못 찾으셨습니까?”

“그래.”

아직은.

베리안이 사라졌다.

* * *

두 번째 세계수의 씨앗에도 간섭은 필요했다.

“아니요! 이번 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내 맘이야.”

세계수란 본디 자아가 강하다.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면 차원 안에서는 신에 필적하는 존재라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기는 하다.

때문에 세계수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것은 중요했다. 기껏 길러놨더니 사춘기 어린애처럼 막나가다가 어떻게 계획이 틀어질지 모르니까.

간섭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웠다.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한 씨앗이지만 김우진은 주신을 완전히 포식해버린지 오래였으니까.

“이렇게 되면 이번에도 타락한 어머니 나무께서···.”

- 아냐!

경쾌한 소리와 함께 릴리의 날개가 율리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타라, 아냐.

“거짓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폭력부터 휘두르는 게 타락하셨다는 증거에요!”

- 나브 기재이!

“또 귀쟁이! 전 하이엘프에요! 귀쟁이가 아니라고요! 어머니 나무께서 그러시는게 바로 타락의 증거에요!”

- 하이기재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만담을 뒤로한 채 릴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씨앗을 심었다.

이는 릴리와 율리아의 의견이었다.

“서로 거리를 주는 거보다 가깝게 하는 게 좋아요. 처음부터 릴리 어머니 나무의 폼 안에 들이는 거죠.”

“가까이서 기강을 잡는다는 걸로 들리는데.”

“좀 속된 표현이긴 해도 틀리진 않아요. 신들 덕분에 여러 어머니 나무가 자라나도 문제가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 도새!

깊숙이 땅을 파고 그 안에 영약 대신 신 둘을 넣고 씨앗을 심었다.

“···생매장하는 느낌인데요.”

“신이라 이 정도로 죽지 않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중간에 깨어나진 않겠지?”

“아마도요. 그 전에 씨앗이 발아할 테니까요.”

“아마도?”

“어쩔 수 없잖아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지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걸요.”

율리아가 씨앗을 덮은 땅을 토닥였다.

“릴리 어머니 나무님.”

- 삐이.

릴리가 그녀의 손등에 앉았다.

김우진이 조심스레 거리를 벌렸고 율리아가 힘을 개방했다. 막대한 신의 힘이 땅을 타고 씨앗으로 흘러들어갔다.

율리의 기운 또한 마찬가지. 세계수의 정수가 씨앗에 스며들어 생명활동을 촉진시켰다.

그러길 한참.

쿠그그그그그-

씨앗이 발아했다.

* * *

세계수는 릴리와 마찬가지로 급속도로 자라났다. 아니, 신력 덕분인지 오히려 더 빨랐다.

콰르르르,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대지가 흔들렸다. 가지와 줄기, 뿌리가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허나, 릴리와는 다르게 연옥의 건물까지 침범하지는 못했다. 김우진이 불꽃의 벽을 세워 막았기 때문이다.

불꽃을 본능적으로 회피한 세계수는 마침내 생장을 멈췄다.

신을 마음껏 착취하고 한껏 성장한 릴리의 절반정도 되는 크기. 릴리가 워낙 거대해졌을 뿐, 결코 작지 않았다. 처음 발아했을 때의 릴리와 비교하면 확실히 크고.

무엇보다 이번 세계수는 모든지 빨랐다.

발아도, 생장 속도도 그리고 정령체의 탄생도.

- 끼잉.

반투명하고 작은 하얀빛의 아기 호랑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김우진에게 달려와 다리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그 모습이 썩 귀여웠다.

“순록의 밑에서 백호가 나오다니. 생물학적으로 말이 되는 건가?”

“참새 밑에서 파랑새가 나오는 건 말이 되고요?”

“···그러네?”

그렇게 이야기하니 묘하게 납득이 된다. 애초에 본체가 나무인 시점에서 정령체가 무슨 소용이겠다만은.

“네 이름은 나르야. 알겠지?”

- 낑.

나르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호랑이한테 나르라는 이름을 붙여줘요?”

“호랑이가 아니고 세계수인데.”

“···이름을 붙여주는 것 자체에 태클을 걸었어야 했는데!”

김우진이 나르를 끌어 앉았다. 기분 좋은지 나르가 울음을 토해냈다.

“릴리, 잘 가르쳐줄 수 있지?”

- 으!

릴리가 김우진의 어깨 위에 앉아 그런 나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나르가 고개를 들었다.

두 세계수의 정령체의 눈이 마주쳤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빠악-

그 순간, 릴리의 날개가 나르의 이마를 후려쳤다.

- 꾸러! 이마!

“······.”

“······.”

- 끼이이이이이잉!

나르가 정말 서럽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 * *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김우진은 스스로 나름 괜찮은 육아를 해왔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저렇게 거친 사춘기를 맞이할 정도로 막하지는 않았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율리아가 샐쭉한 눈빛으로 김우진을 노려보았다.

“난 딱히 못된 걸 가르친 적은 없는데.”

“직접 하라고는 안했지만 많이 보여주셨죠. 그리고 어머니 나무께서 물드실 때 가만히 방관하셨고요.”

“귀쟁이를 귀쟁이라고 부르는 게 못된 짓은 아니잖아?”

“그 안이함이 어머니 나무를 저렇게 만들었다고요!”

김우진이 릴리를 확인했다. 그녀는 김우진에게 한 번 혼이 나고 나서 울고 있는 나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괜히 마음이 포근해져 웃고 말았다.

“릴리, 다음부터는 안 그럴 거지?”

- 으.

“이유 없이 때리면 안 돼.”

- 으. 이우 이으며?

“그럼 뭐···.”

“잠깐만요! 이유가 있으면 괜찮다니!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기강을 잡아야 한다며?”

“···그렇긴 한데.”

“나르. 너도 릴리 말 잘 들어.”

- 끼잉.

나르가 서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김우진은 애써 무시했다.

“착하네.”

다짜고짜 뚝배기를 후려치는 바람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자기 잘못을 사과하고 얌전해진 걸 보면 본성이 나쁘지는 않다.

“그야 물론 어머니 나무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요···.”

“뭐, 그럼 된 거지.”

김우진은 그냥 잠깐 사춘기가 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고로 어린 애들 일은 어른이 끼어들면 망하는 법이다. 세계수도 마찬가지. 세계수들 간의 일에 괜히 인간인 그가 간섭할 필요는 없겠지.

한편 지진과 함께 생겨난 또 다른 세계수에 죄수들이 몰려 있었다.

“데르카인님, 저건···.”

“또 다른 세계수라니.”

“그렇다는 건?”

동족들의 기대 어린 눈빛에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다. 이제부터 배터리가 두 개다!”

“배터리가 두 배!”

“출력도 두 배!”

엘프들이 경멸의 시선을 보냈지만 이미 광기에 휩싸인 드워프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어머니 나무를 배터리로 여기다니. 저 꼴을 대체 언제까지 봐야합니까?”

“품위와 자연 사랑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난쟁이들.”

혐오가 잠깐 스치긴 했으나 굳이 나서서 드워프들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감옥에서 동고동락하고 마물들과 함께 싸우면서 정이 든 탓이다.

신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느낌도 있고.

“세계수를 단숨에 자라나게 하시다니.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어, 저건 제가 했는데요?”

“당신도 결국 소장님을 따르는 하위 신이니 모든 건 소장님이 일구어내신 이적입니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소장님이 하시면 무엇이든 말이 됩니다!”

한 광신도는 소장의 이적에 감격하며 그를 찬양했다.

“두 그루나 되니까 열매가 하나 정도는 열리지 않을까요?”

“어머니 나무의 열매는 그리 쉽게 열리는 게 아니에요.”

“하지만 쉽게 자라나게 했잖아요?”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요.”

“그럼 수액을 조금만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제가 아니라 어머니 나무께 여쭈어 봐야 될 것 같네요.”

“그러죠!”

한 소지는 릴리에게 수액을 달라고 했다가 날개로 뺨을 맞았으며.

“세계수에는 독이 없습니까?”

“신성한 어머니 나무에는 어떤 독기도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거 아쉽네요.”

한 독인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안 가보십니까?”

“나무 하나 더 자라난 게 뭐 대수라고. 계속 들어와라.”

짐승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근데 세계수가 두 그루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어차피 한 그루나 두 그루나 거기서 거깁니다. 세계수가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렇게 평화로운 하루가 지났다.

지났다고 생각했다.

- 새무하저그 어마!

릴리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김우진 앞으로 날아왔다.

“통신이 왔다고?”

- 으!

- 그보!

“급보요?”

죄수들이 둘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 그라브드.

“크라프트.”

- 에게스.

“어머니 나무.”

- 소며.

율리아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멸이요?”

- 시드리 아르베. 차자. 아니. 커!

“···신들이 알베니우스님을 찾아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왔는데 어머니 나무께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시다가 전투가 일어났대요.”

“그리고 죽었다?”

“···네. 컷, 아니 그대로 불태웠다고 하네요.”

- 시아! 시아 주거.

“씨앗. 세계수의 씨앗을 소장님한테 줬는지 주지 않았는지를 물었데요.”

“···외통수군.”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에 서명한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그 사실을 말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다.

결국 세계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

죽거나, 심연에 가거나.

세계수가 택한 건 전자였다.

“작정했군.”

그래, 이래야 백신전이지.

사실 지금까지 너무 바보 같이 당하고만 있어서 예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기는 했다.

“알베니우스님, 혹시 일부러 흔적을 남겼습니까?”

“그런 짓은 절대 안 해. 단지, 차원의 통로에 신과 집행자들이 쫙 깔려 있어서 급하게 나오긴 했는데 설마···.”

“그거군요.”

“내 실수군.”

“그렇다면 그 흔적이 연옥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눈치 챘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지도.”

행적이 명확하게 들켰다는 사실을 인지하자 알베니우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잘 됐다고?”

“이걸로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의심을 받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들 입장에서는 나름 제대로 날린 한방이었지만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너무 공교로워서 김우진이라고 해도 같은 실수를 했을 것 같긴 하지만.

“적어도 저들이 다시 감찰을 보내기 전까지는 문제없을 겁니다. 그리고 감찰이 와도 숨기려면 최대한 숨길 수는 있죠.”

김우진은 데르카인에게 하늘구름을 옮겨 설치할 것은 부탁했다. 릴리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나르의 존재감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나르에 비해 릴리의 존재감이 압도적인 바, 나르가 더 성장하지 않는다면 속일 수 있을 거다. 좀 나중에 온다면 모르겠지만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했다면 참지 못하고 바로 올 거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신들은 잠잠했다.

“···김우진.”

“두리쉬마님?”

대신 다른 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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