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81. 경고 >
“주신이시여. 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고 백신전으로 돌아온 베리안에게 기다렸다는 듯, 전령이 다가왔다.
“다른 이들은?”
“모두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겠다.”
주신 알비츠가 여러 신들과 함께 떠나고 연옥에 투입한 51명의 집행자들이 실패해버린 상황에서 백신전은 전략을 바꾸었다.
“더 이상 꼼수를 부린다고 통할 것 같지가 않군.”
죄수를 넣어서 탈옥하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계수는 연옥의 방벽에 간섭할 수 있으니까.
집행자들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들로는 절대 김우진을 잡을 수 없으니까.
신들이 직접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계약에 묶여 있으니까. 김우진을 죽이는 것도, 연옥에서 싸우는 것도 문제다.
마물들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작금의 사태가 일어났는데 또 다시 마물들을 이용할 수 있을 리가.
“인정하겠다. 김우진을 잡을 방법은 정공법 밖에 없음을.”
베리안의 말에 한 신이 물었다.
“정공법이라 하심은?”
“김우진을 연옥의 소장으로 묶어둔 것 자체가 나의, 우리의 실수였다.”
백신전은 김우진이라는 폭탄을 연옥에 영원히 묶어둘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오히려 김우진보다 이쪽에 가해지는 부담이 더 컸다.
가진 것의 차이다. 백신전은 이 세상을 가지고 있고, 김우진은 아무 것도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김우진은 계약의 빈틈을 노려 신들을 엿 먹이고 다녔고 어느새 그 칼이 신들의 턱 밑까지 들어왔다.
놈을 묶어두고자 했던 계약이 오히려 반대로 신들을 구속하는 구속구가 되었음이다.
“놈은 벌써 알베니우스와 접촉했고 세계수와도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차근 차근, 이후를 대비하고 있다.
50명의 죄수들을 출소 시키고 연옥의 굴레에서 벗어난 김우진이 할 일이 과연 무엇일까.
뻔하다. 복수. 그의 불꽃은 반드시 백신전을 불태우기 위해 타오를 것이다.
그에게 복수의 마음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 언제든 신을 죽일 수 있는 부외자는 백신전에게 크나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그가 죽든, 백신전이 망하든 같은 우주 아래 함께 살 수 없게 된 것은 명확했다.
“하물며 갑작스레 마물들까지 준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이 비록 알비츠의 실수라고 한들, 신을 능욕하고 납치할 수준의 강대한 마물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과연 그들이 한둘일까. 백신전은 이미 멸망해 소멸을 기다리는 변방 차원에서 눈을 땐지 오래고 그 덕분에 마물들은 아무런 견제 없이 무럭 무럭 세력을 길러왔음이 분명하다.
마물과 김우진. 백신전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둘 모두 토벌해야만 한다.
“변방 차원은 많다. 당연히 마물또한 많지. 그리고 마물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카식 레코드와 함께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어둠의 법칙이다. 빛이 존재하는 한, 어둠이 있다. 백신전과 생을 영위하는 피조물들이 있는 한, 죽음을 쫓는 마물들은 어디서든 탄생한다.
백신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수를 줄여 백신에게까지 큰 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허나 그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긴 싸움이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면 먼저 치워버려야 할 것은 명확하다.”
김우진. 결국에는 또 김우진이다.
“놈에게 씨앗을 넘긴 세계수는 찾았느냐.”
“···죄송합니다, 아직. 하지만 짐작이 가는 게 있습니다.”
“짐작?”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찾았습니다.”
집행자의 보고에 신들이 반색했다.
“어디냐.”
“크라프트입니다.”
“크라프트? 크라프트라면 세계수가 있는···.”
베리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른 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우진은 알베니우스와 접촉했다.
알베니우스는 김우진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고 김우진은 그것을 연옥에 심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크라프트에서 발견되었다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놈이구나.”
“그놈이 확실합니다!”
“크라프트의 세계수라면 1만 2천년 가까이 살아온 노목입니다. 놈의 뿌리는 아카식 레코드에 닿아 있습니다.”
“헌데 조금 이상하지 않느냐. 만년을 넘게 살았다면 우리의 존재에 대해 보다 명확히 알고 있을 텐데 김우진에게 붙었다고?”
만년이 되지 않은 세계수는 그저 신들이, 백신전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지만 만년이 넘어간 세계수는 아카식 레코드로 말미암아 백신전의 저력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는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일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이다?”
“세계수들은 언제나 저희를 동업자로 여깁니다. 저희의 자비 하에 동등한 관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든 모르든 말입니다. 헌데 진실을 알고, 그 격차를 깨달았으며, 저희가 백신전에 대항하는 자들을 어떻게 처벌했는지 알았다면 오히려 백신전을 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신은 ‘대항하는 자들을 토벌’이라고 했지만 그게 ‘신력을 가진 종족의 멸종’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그 신의 주장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신의 힘을 가진 한 종족이 토벌 당하자 덩달아 들고 일어난 종족도 있었으니까. 가루다들을 먼저 멸종시키자 참고 있던 타이탄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처럼.
“그렇다면 더욱 빨리 본때를 보여줘야하는 것 아닙니까?”
만년이 넘은 세계수가 크라프트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니 어떻게 보면 그저 해프닝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다수를 이끄는 것은 소수다. 다수를 감염시키는 것도 소수다.
그리고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씨앗을 넘김으로서 백신전은 분명한 타격을 받았다.
“메이린.”
“예, 주신이시여.”
검은 머리의 여신이 앞으로 나섰다.
“신 아홉을 뽑아 함께 크라프트로 가라.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에 대해 묻고 만약 끝까지 입을 다문다면.”
와장창, 베리안이 들고 있던 술잔을 깨트렸다.
“뿌리를 뽑아라. 다시는 이런 종자가 나오지 않도록 확실하게. 감히 백신전에 반기를 든 자가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모두에게 알려주어라.”
“예. 명을 따릅니다.”
열 명의 신들이 백신전을 떠났다.
* * *
- 뭐냐, 대체 뭐냔 말이다.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
불청객들의 방문에 세계수의 정령, 순록은 나른한 몸을 일으켰다.
- 신···?
김우진과 그 개 같은 하이엘프를 보낸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시 신들이 오는 걸까.
하물며 한둘도 아니었다. 무려 열. 이전의 다섯보다도 두 배가 더 많다.
- ···이거.
불안하다. 순록이 마른 침을 삼키며 그들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열 명의 신들이 수십의 집행자들과 함께 세계수의 영역을 침범했다. 나무들이 저항하지 않고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곧 순록의 앞에 섰다.
“반갑다, 크라프트의 세계수여.”
이전에 왔던 신들이 아니었다. 그들보다 더 강하고 격이 높다.
주신이 직접 이곳까지 올리는 없으니 주신을 제외한 상위 10명의 신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백신전의 신, 메이린이다.”
- 크라프트의 세계수다. 헌데, 또 무슨 일이지?
“이곳에서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 알베니우스?
들어본 적 있다. 신들이 멸종시킨 차원용의 마지막 후예라고 했던가. 수십년 전에 죽은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까지 살아 있었나.
- 나는 그런 자를 모른다.
- 얼마 전에 다섯 명의 신들이 와서 차원 전체를 뒤집어 놓고 가지 않았느냐.
“물론 그렇긴 했지.”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신들이라고 한들, 세계수의 권역에서 세계수가 작정하고 속이려고 한다면 속을 수밖에 없다.”
- ···지금 그게 무슨 뜻이지?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은 순록이 주춤, 그녀를 경계했다.
“다섯 신들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럴 경우는 두 가지지.”
그대가 처음부터 알베니우스를 감추어주고 있었거나, 신들이 떠난 후에 이제는 안전하다고 불러들였거나.
“어느 쪽이든 그대는 백신전을 배신했다.”
- 아니, 잠깐만. 나는 억울하다! 난 알베니우스라는 드래곤의 얼굴을 본 적도 없단 말이다!
사실이었다. 괜히 세계수의 신경을 더 건드리지 않기 위해 알베니우스는 차원에는 함께 들어왔으나 세계수를 함께 만나지는 않았으니까.
김우진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기운으로 덮어 알베니우스를 감추기까지 했다. 덕분에 김우진에게,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율리아라는 신격에 당황한 그녀는 알베니우스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다.
“본 적은 없지만 숨겨주기는 했군.”
- 억울하단 말이다! 내가 왜 백신전을 놔두고 멸망 직전의 종족의 편을 드냔 말이다!
그녀의 진심이 와 닿았는지 메이린의 기세가 조금 옅어졌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묻겠다.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 얼마 전에 알았다.
“그 연옥에서 세계수가 발아했다. 뿌리는 연옥을 덮었고 차원 전체에 간섭을 시작해 우리를 꽤나 곤란하게 했지.”
- ···뭐라고?
“그 씨앗을 준 게 그대가 아닌가? 아니, 다시 묻지. 김우진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준 적이 있나?”
- ···그건.
차라리 전자라면 당당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씨앗을 주기는 했으나 씨앗이 1초 만에 자랄 수는 없으니 그게 자신이 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후자는 맞았다. 협박일지언정 그녀는 김우진에게 씨앗을 주었고 김우진과 율리아에 대해 무엇도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무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에 걸고.
“왜 대답을 못하지?”
- ···하하. 이런 빌어먹을.
순록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외통수다. 무려 열 명의 신들이다. 그녀를 범인으로 확정 짓고 온 게 아니라면 저렇게 많이 몰려올 수가 없다.
잠시 고민했다. 그냥 죽는 게 나을까, 아니면 심연으로 끌려들어가는 게 나을까.
그리고 그 고민이 신들에게는 대답이 되었다.
“역시 네놈이었구나.”
말투가 변했다. 그대라며 그나마 해주던 존중이 사라졌다. 열 명의 신들이 일제히 살기를 폭발시켰다. 나무들이 시커멓게 시들어 죽어갔다.
“감히 백신전의 존중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반역자의 편을 들다니.”
- 나는 억울하다!
“그렇다면 말하라! 김우진에게 혹은 알베니우스에게 세계수의 씨앗을 주지 않았다고!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에 명확히 쓸 수 있다면!”
쓸 수 있을 리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넌 반역자다. 우주의 질서와 평화를 어지럽히는 쓰레기.”
메이린이 공간을 가르고 창을 뽑았다.
“백신전의 자비 아래 삶을 영위하면서도 감히 백신전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버러지.”
거대한 성창이 순록을 겨눴다.
“넌 오늘 이 자리에서 소각된다. 그리고 너의 죽음은 우리 백신전이 모든 세계수들에게 보내는 경고가 될 것이다.”
- 누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알고!
- 세계수들이 언제까지 네놈들의 종노릇을 할 줄 아느냐!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엔트들이 일어났다. 나무의 파도가 신들을 덮쳤다.
허나, 신력이 폭발해 그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아무리 만년을 살아와 차원을 완전히 자신의 권역으로 삼은 세계수라고 한들, 그녀는 혼자였다.
그리고 신은 무려 열 명이었고.
- 김우진!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 종자 같으니!
- 지옥에서도 네놈을 저주하리라!
그날, 세계수 한 그루가 불타 소멸했다.
“역시 이놈이 확실합니다. 씨앗이 없습니다.”
신들은 만년 이상을 살아온 세계수들은 만약에 대비해 하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씨앗이 없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확신을 더욱 심어주었다.
드디어 김우진의 끄나풀 하나를 끝장냈다. 백신전이 간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하지만 결국 알베니우스는 놓쳤군.”
“흔적을 찾았습니다.”
“찾았다고?”
“항상 꼼꼼한 도마뱀이 이번에는 조금 조급했나 봅니다. 미약하지만 미처 지우지 못한 흔적이 있습니다.”
“그럴 만도 하긴 하지.”
현재 신들이 전 차원을 뒤지며 눈에 불을 키고 알베니우스를 찾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쉽게 시선을 피하기 어려우리라.
실제로 크라프트에서 찾아냈고 또 다시 이어지는 흔적도 찾아냈으니.
“어디로 이어지지?”
“그게···.”
“빨리 말해라.”
“연옥입니다.”
“···하.”
메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나 혼자 판단할 수 없겠구나. 백신전으로 복귀한다.”
“예!”
“엘프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 둬라. 세계수의 잔해도 마찬가지다. 이 차원의 피조물들에게 신을 거역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주는 좋은 상징이 되겠지.”
거대한 신목의 잔해를 남긴 채, 신들이 떠나갔다.
* * *
신들의 흔적은 길게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이 사라진 드라스코에서 얼마 가지 못하고 뚝 끊어졌다.
마기도, 신의 기운도.
신들은 당황했으나 알비츠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다. 그렇다면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지성체의 개입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김우진?’
역시 가장 큰 의문은 그쪽이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마물들을, 마기를 다루지는 못한다. 알비츠는 어둠의 사도들이 새롭게 탄생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강해졌다.
‘어둠의 사도가 지성까지 가지고 있다면?’
그건 정말 큰 위기다. 그래봤자 백신전이 무너진다는 생각은 없지만 꽤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리고 그건 김우진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할 수도 있겠지.
“델라푸스는 어디 있지?”
변방 차원에서 먼저 죽어버린 칼카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정말로 김우진이 아닌, 단순히 알베니우스를 쫓다가 어둠의 사도를 만난 걸지도.
“얼마 전에 칼카르님이 남기신 마지막 흔적을 찾았다는 연락을 끝으로 더 이상의 연락은 없습니다.”
“마지막 통신이 언제냐.”
불길함이 치솟았다.
“21일 전입니다.”
삼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신 하나가 연락이 없어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짧다.
“···델라푸스는 죽지 않았다.”
신들을 이끌고 나오기 전, 아카식 레코드를 확인했다. 그때까지 새로운 신의 탄생은 없었다.
“같은 놈이구나.”
납치해서 끌고 갔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 행동 패턴이 똑같다.
알비츠는 깨달았다. 칼카르를 죽인 놈도, 델라푸스나 다른 신들을 납치한 놈도 모두 같은 놈이라는 것을.
경각심이 더욱 커졌다.
“델라푸스가 마지막으로 연락한 곳부터 가자.”
“예.”
그곳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다. 델라푸스가 남긴 흔적들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으나 주신의 감각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수십 개의 종말 차원을 넘었다. 수천, 수만의 마물들을 죽였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혈로를 그린 끝에 마침내 마주할 수 있었다.
수십만의 마물 군단과.
그리고.
“···흔적을 지운다고 지웠는데. 주신의 감각을 완벽하게 속일 수는 없었던 건가.”
“타이탄?”
백신전에 의해 멸종한 종족의 유일한 생존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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