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81화 (81/150)

# < 080. 소금 >

세계수의 씨앗이란 무엇인가.

씨앗은 열매에서 비롯되지만 열매와는 또 다르다.

맺힌 열매를 건드리지 않고 백년을 놔두면 씨앗이 과실을 모두 흡수하고 하나의 형태가 된다. 그게 온전한 세계수의 씨앗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간만으로 해결이 되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쩌면 세계수는 모든 차원에 존재했을 지도 모른다.

열매 안에 자리한 씨앗이 흡수하는 건 단순한 과육만이 아니다.

과육의 영향만으로는 씨앗은 발아하지 못한다. 주변의 마나만으로도 마찬가지.

세계수는 열매가 완전한 씨앗이 되는 백여년의 세월 동안 꾸준히 정기를 주입한다. 그것인 어찌보면 세계수의 정수라고 할 수도, 세계수의 생명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 백년은 세계수에게 있어 무척이나 고된 시간이고 맺은 뒤에도 한동안은 죽은 듯이 지내야 한다고 한다. 때문에 많은 세계수들이 씨앗을 잘 맺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다.

그래서 세계수들은 평생에 적게는 한 개, 많게는 세 개 정도의 씨앗 밖에 만들지 않는다.

그게 율리아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만년을 산 어머니 나무라면 반드시 씨앗 하나 정도는 여분으로 만들어두셨을 거예요.”

세계수가 아무리 위대해도 결국 만능은 아니다. 세계수가 있음에도 종말을 맡이한 차원도 있는 만큼, 세계수들은 마약에 대비해 항상 씨앗 하나를 움켜쥐고 있는 다고 한다.

데이드람의 경우 그게 릴리였고.

“하지만 준다고 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날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께서 소장님한테 투자를 하신다고 했잖아요? 씨앗을 투자하라고 하세요.”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얻어내야죠.”

“너 하이엘프 맞냐?”

“어머니 나무를 존중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아니까요. 백신전에서 어머니 나무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고 더 깨달았어요. 백신전은 사라져야 해요.”

지극히 하이엘프다운 발상으로 이어지는 걸 보니 하이엘프가 맞았다.

“결국엔 또 나보고 기사 노릇을 하라는 거군.”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지금 백신전은 가시를 빳빳이 세우고 있는 고슴도치 같으니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요.”

“눈에 불을 켜고 나를 찾고 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돌아다녔다가는 아무리 나라고 해도 걸려!”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으면 걸리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신들을 들키게 되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두리쉬마가 기껏 자신을 일부 드러낸 의미도 사라지고.

“···제기랄. 좋아. 씨앗을 얻어온다고 치지. 그리고 그 다음은? 씨앗이 발아하는 게 하루 이틀만에 될 리가 없잖아? 백신전 놈들이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51명의 집행자들이 뒤졌는데 몇 달 동안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그건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율리아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어떻게?”

“제가 신격을 얻었잖아요? 바람과 자연에 대한 권능이 더 강화 되었어요. 제가 보살피면 발아하는 시간이 대폭 단축될 거예요. 그리고 릴리 어머니 나무께서도 함께 하신다고 했어요.”

“잠깐만, 생각해보니까 한 차원에 세계수가 둘이나 있는 게 말이 돼? 그걸 용납한다고?”

알베니우스의 또 다른 반론은 릴리에 의해 격침되었다.

- 도새. 조아. 나. 보사펴.

살찐 릴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요, 알베니우스님. 어머니 나무가 한 차원에 하나만 있는 건 서로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세계수의 뿌리는 차원 전체로 뻗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차원의 마나를 양분으로 삼고 다시 환원하여 마나를 더욱 풍부하게 한다.

하지만 그게 두 그루가 되면 서로의 마나를 삼키기만을 반복하여 악순환이 계속된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인 거다. 차원이라는 영역은 정원이 한 명으로 정해져 있는데 인원이 많아지는.

하지만 그것 또한 한 그루로는 감당 못할 수준으로 마나가 풍부하면 해결이 된다.

“저희에게는 신들이 있으니까요.”

무려 여섯의 신들과 교차 차원이라는 이점으로 인해 원래부터 풍부한 마나까지.

두 그루가 아니라 세 그루를 심어도 문제가 없게 되었다.

- 배브러.

릴리가 빨리 털어내고 싶다는 듯 알베니우스를 재촉했다.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여유가 좀 있습니다. 신을 넷이나 잡아온 지 일주일이나 됐는데도 백신전놈들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건 제가 던져놓은 수가 통했다는 뜻이니까요.”

놈들은 미끼를 물었다.

아마 지금쯤 마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상의 적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게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거다.

그 시간은 두리쉬마의 역량에 달려 있다.

“저희한테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거죠.”

“단순한 추측 아니야?”

“물론 여전히 제게 시선을 때지 않고 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

알베니우스를 찾기 위한 행보가 계속되는 것도 마찬가지. 하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갈 수밖에 없다.

자신들의 경쟁자를 병적으로 파멸시키는 백신전의 행적을 비추어보았을 때, 율리아의 존재는 그들에게 차원이 다르게 다가간다.

그녀가 신이라는 게 드러나는 순간, 백신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죽이려고 할 거다. 김우진 그와는 다르게 계약으로 묶여 있지도 않으니 더욱 거리낄 것도 없다.

“···어쩔 수 없군. 가야지.”

그 산증인인 알베니우스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어머니 나무의 씨앗을 구하러 가는 것과 저는 다른 이야기 아닌가요?”

“결국 같은 이야기야. 결국 신들을 잡아두고 있는 목적이 새로운 신격들을 이쪽에서 탄생시키려고 하는 거니까.”

율리아의 신격을 감추기 위해서는 구속구만 있어서는 안 된다. 집행자들의 신의 힘을 주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 위에 세계수의 정기를 덮어씌워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주신을 속일 수 있다. 삼박자 중 하나라도 어그러진다면 무의미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수가 뽑히면 안 되고 신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으려면 신들의 존재를 들켜서는 안 된다. 다 이어지는 이야기다.

“문제는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순순히 씨앗을 주느냐, 마느냐인데.”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뭐라고?”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올 테니까요. 뿌리를 뽑아서라도.”

“세계수의 정령과 하이엘프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 않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라는 말은 제가 아니라 그 하이엘프가 먼저 했습니다만.”

“···제가! 제가 노력해볼게요. 뿌리를 뽑기 전에 순순히 주시도록.”

김우진의 눈빛에서 설득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율리아가 다부진 각오를 세웠다.

물론 그 어머니 나무는 조금 꺼림칙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어머니 나무가 죽는 걸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 * *

-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씨앗을 넘기라고?

“제대로 들었다.”

- 아하, 그러니까 진짜로 너에게 씨앗을 넘기라고?

순록이 헛웃음을 지었다.

- 미쳤구나?

그래 미친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야 감히 세계수에게 씨앗을 강탈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 아까 전에는 백신전놈들이 나의 영역을 이 잡듯이 뒤지더니 이제는 집행자놈이 씨앗을 탐내?

쿠그그그, 세계수의 분노에 나무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엔트. 세계수의 정기를 오랫동안 받아온 식물들에서 비롯되는 정령들.

“거절인가?”

- 그럼 그 헛소리를 받아 들일거라고 생각했니?

“투자를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 투자와 강탈은 엄연히 다른 법이란다. 넌 조금 더 예의를 배울 필요가 있겠구나.

“잠깐, 잠깐만요!”

그때, 율리아가 김우진과 세계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이번 일은 저에게 맡기신다고 했잖아요?”

“···뭐, 그러도록 하지. 아, 그리고 거칠었던 언사는 사과하지. 조금 상황이 급해서 나도 모르게 툭 뱉고 말았군.”

김우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 ···어이가 없지만 사과는 받아들이도록 하지.

- 너는 그때 보았던 다른 차원의 아이구나.

“안녕하세요, 어머니 나무님. 오랜만이에요. 정식으로 요청 드릴게요. 부탁드려요. 저희는 어머니 나무의 씨앗이 필요해요.”

- 어째서?

- 나는 너희들이 정확히 누군지도, 왜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는데.

- 그런데도 그냥 씨앗을 주는 건 이상하지 않니?

옳은 소리다. 하지만 율리아는 거기에 맹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세요?”

-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지.

“그럼 알고 계시네요. 어머니 나무 같은 분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짐작한다고 하시진 않으실 거 아니에요?”

- 흐음.

정곡이었다.

- 제법 당돌하구나.

- 그렇다면 이건 어떻겠니. 너희가 오기 얼마 전에 백신전의 신들이 다섯이나 왔단다. 반역자를 찾는다는구나. 단순히 나뿐 아니라 전 차원의 세계수들을 들쑤시고 있지.

- 그런데 공교롭게도 지금 너희가 왔고.

“투자의 대가로 원하시는 게 정보인가요?”

- 투자를 해달라고 했지? 이건 투자를 하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하는 사전정보에 불과하단다. 대가가 될 수는 없지.

“하지만 정보만 듣고 투자를 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오히려 저희가 곤란하잖아요?”

- 그건 투자자의 마음 아니겠니?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율리아와 김우진은 일반적인 상황에 놓여 있지 않았다.

“아니에요.”

- 아니라고?

“어머니 나무께서 원하시는 건 여러 신들이 얽힌 복잡한 우주의 비밀이에요. 그런 걸 공짜로 듣는 게 더 양아치 같지 않아요?”

- 내가 양아치라고?

“아, 죄송해요. 말이 헛 나왔어요.”

- 너···!

순록이 눈을 치켜떴다.

“아무튼, 씨앗만 주신다면 원하는 것들을 다 알려드릴 수 있어요. 물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맹세도 하셔야 하지만요.”

- 세상이 많이 변했구나. 감히 하이엘프가 나를 겁박하다니.

“겁박이 아니라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정체를 짐작하신다면서요? 정보를 먹튀하시면 저분이 어떻게 나올지 아시잖아요?”

- 나는 세계수다. 내 뿌리는 차원 전체를 뒤덮었고 그 끝은 아카식 레코드에 맞닿아 있어.

- 헌데 감히 네가 나의 영역에서 나를 협박하는 거냐?

순록의 눈에서 광채가 일렁였다. 가지의 파도가 일어났다.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제발 이번 한 번만 부탁을 들어주세요. 다 어머니 나무님을 위해서예요.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해요. 저는 하이엘프에요. 절대 어머니 나무께 해로운 일은 하지 않아요.”

- 헛소리는 그쯤하려무나.

- 너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순록이 율리아를 밀어냈다.

- 넌 아마도 연옥의 소장, 김우진이 맞을 거다. 그렇지?

“아니라면?”

-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 나도 다 보고 들은 것이 있단다. 이건 물음이 아니라 확신이야.

“내가 김우진인 걸 알면서도 그렇게 나오는 건가?”

- 그러는 너야 말로 세계수를 너무 얕보는구나.

-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너,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군.”

- 네가 백신전의 신이나 집행자라면 모를까, 그들의 적인 이상 내가 너의 손을 잡아서 득 될게 있을까?

“그래.”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불태워버리고 아직 남은 마물의 흔적을 던져버려야지.

사실 크라프트에 오면서 대충 이렇게 될 거라는 예상은 했다. 세계수는 자신의 씨앗을 절대 아무에게나 넘기지 않으니까. 자신의 정체를 알았다면 더욱 더.

그래서 초반부터 세게 나간 것이기도 했다.

“앞으로의 결과는 네가 자초한 거다. 그러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봐.”

김우진이 불꽃을 피워냈다.

- 신에게 패배해 묶인 개 주제에 입이 살았구나!

“···그러니까.”

세계수가 요동쳤다. 불꽃과 나무가 충돌하려는 순간, 율리아가 그 사이를 다시 가로 막았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예요!”

율리아가 감추고 있던 기운을 일거에 폭사시켰다. 그 광활한 마나와 신의 힘에 엔트들이 뭉개졌다. 순록이 튕겨져 나갔다.

- ···너. 어떻게?

나무들이 세계수의 통제를 벗어나 율리아를 따랐다. 나무가 나무의 대장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순록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 잘나신 권역에서 제가 어떤 존재인지 눈치도 못 챘으면서 어떻게 소장님을 상대할 생각을 하세요?”

율리아가 한 걸음, 다가갔다. 순록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권역에서도!”

“저보다도 약한데!”

“어머니 나무께서는 겨우 이 정도인데!”

나무들이 일제히 물러나 길을 만들어주었다.

“소장님은 저 같은 거 열 명이 덤벼도 못 이기니까 제발 그냥 씨앗 좀 주시라고요.”

율리아가 으르렁거렸다.

“제가 직접 씨앗을 뺏어서 어머니 나무의 자리를 계승시키는 게 싫으시다면요.”

- ······.

순록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행이에요. 말이 통해서.”

율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세계수의 씨앗을 폼 속에 넣었다.

“···말이 통한 건가?”

이럴 거면 그냥 내가 협박해도 똑같지 않았나. 김우진이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요.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의심이 깊어지시니까요. 무엇보다 소장님의 정체를 알고 협상할 의지 자체가 없다는데 어떡해요? 협박이라도 해야죠.”

“누가 너를 하이엘프라고 생각할까.”

“다 어머니 나무를 위해서였어요. 소장님은 일단 가지 몇 개는 불태우고 시작하셨을 거잖아요?”

“······.”

그럴 생각이었다.

직접 힘의 차이를 보여주면서 찍어 누르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으니까.

“하지만 제가 했으니까 물리적인 충돌은 없었죠.”

“뭐, 그렇다고 해두지.”

“계약서도 썼으니 비밀은 지키시겠죠?”

“지킬 수밖에. 아키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아 있는 만큼, 계약서의 법칙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을 테니.”

씨앗을 받고 떠나기 전, 김우진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꺼내 비밀유지계약서를 작성했다.

크라프트의 세계수가 앙심을 품고 김우진에 대한 정보를 백신전에 발설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맞아요.”

“그리고 틀린 게 있어.”

“뭐가요?”

“너 같은 건 열 명이 아니라 백 명이 와도 이길 자신이 있거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잖아요. 말이.”

율리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뭐든 확실한 게 좋은 법이야. 저 세계수도 애매모호하게 선을 타니까 이 사단이 났잖아?”

“그건 그렇네요. ···근데 정말 100명도 안 돼요? 저 그래도 명색이 신인데?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는데?”

“아직 백 년은 일러.”

“소장님은 아직 백 년도 못사시지 않았어요?”

“알베니우스가 어디서 기다리고 있는 다고 했더라.”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소장님 몇 살이에요?”

“신들이 눈치 채기 전에 빨리 떠나자. 급해.”

“소장님!”

율리아가 발걸음을 재촉하는 김우진을 다급히 따라갔다.

- 다이안! 저 녀석들이 밟은 모든 땅에 소금을 뿌리렴!

“예, 어머니 나무시여.”

- 다신 오지 마라!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도 마!

창피를 당한 세계수가 학을 땠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