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79. 투자 >
마물을 통제하지 못해 일어난 재앙은 종식되었다.
신들이 직접 나서 통로에서 추가 유입을 끊어내고 권역인 곳에는 신들이, 그렇지 않은 곳에는 집행자들이 다수 투입되었다.
그 결과, 범람한 12개의 차원들 모두 무사했다.
재앙은 신앙을 더욱 굳건하게 한다고, 눈앞에서 재앙과 신의 이적을 함께 목격한 12개 차원의 피조물들은 더욱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하지만 좋은 건 딱 여기까지였다.
모든 신들의 이목이 집중된 무거운 분위기 아래 집행자가 보고를 시작했다.
“···연옥의 균열이 모두 닫혔습니다. 연옥으로 들어간 51명의 집행자들의 소식이 전부 끊어졌습니다.”
“성공했을 가능성은?”
“뿌리를 내린 세계수가 죽는다면 방벽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연옥의 방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래, 세계수가 발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연옥의 방벽이 흔들려 김우진에게 경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세계수의 존재를 눈치 챘어야 했다. 하지만 설마 세계수를 심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김우진이 이상한 짓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통한의 실수였다.
“역시 마물이 분산된 게 크다. 김우진을 뚫어내려면 모든 마물들이 연옥으로 향했어야 하는데 13갈래로 분산되어 버렸으니···.”
물론 그것만으로도 능히 차원을 멸망시킬 수 있는 전력이었으나 신조차 죽이는 김우진에게 한 방 먹이기에는 턱 없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거다.
“신, 드라스코는 물론이고 드라스코의 실종에 그를 찾으러 차원, 드라스코로 향했던 발레리안느를 비롯한 나이아린, 콜키트의 흔적도 사라졌습니다.”
“···신 넷이 한꺼번에?”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신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나?”
“강대한 마기가 느껴지는 마물의 시체가 다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꽤나 격전을 벌인 듯 한 흔적 또한···.”
“마물의 수준은?”
“시체에서 느껴지는 마기와 전투의 흔적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집행자들을 뛰어넘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
“그럴 리가!”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집행자들을 뛰어넘는다는 건 한 가지를 의미한다.
신. 마물들 중 신에 필적하는 강자가 나타났다는 뜻이다.
물론 마물들은 결국 빛으로 대표되는 아카식 레코드의 대척점에 선 어둠의 사도들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신급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놀랍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알비츠. 이걸 네가 몰랐을 리는 없다고 본다만.”
“알고 있었다. 평소보다 강한 마물들이 포함되긴 했지만 김우진을 끝장낼 작정으로 오히려 더 끌어들였으니까.”
그게 설마 신의 권역으로 흘러 들어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네 유도가 어그러진 것은 그놈들 때문일 가능성이 높군.”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무슨 뜻이지?”
“회의가 소집되기 직전, 아카식 레코드를 살폈다. 그 어디에도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새로운 신이 탄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존의 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살아 있다는 겁니까?”
“아마도.”
“하지만 마물들과 싸우고 실종되었는데 어떻게···?”
마물은 무조건적으로 빛을 파괴하는 대적이다. 거기에 협상과 여지 같은 게 끼어들 공간은 없다.
“누군가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네 실수를 조금이라도 덮기 위해서 헛소리를 하는 건 아니냐? 마물 사태에 누가 개입되어 있다고?”
“아니, 마물이 아니라 신들의 실종을 이야기하는 거다.”
“또 김우진이 문제라고 이야기 하고 싶은 거냐? 이번에는 경우가 다르다. 51명의 집행자들 중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세계수마저 멀쩡한 게 그 증거다.”
김우진이 없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김우진은 연옥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발레리안느를 비롯한 세 명의 신을 흔적도 없이 납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곳에는 김우진의 흔적 대신 마물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김우진이 마기에 먹혔다는 건 더욱 우스운 말이고.”
물론 김우진이 강한 것은 이 자리의 누구나 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김우진이 신을 죽일 만큼, 신에 필적하는 강자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신의 권역에서 신 셋을 한꺼번에, 그것도 그들이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찍어 누를 정도의 괴물까지는 아니니까.
백신전에서도 그건 주신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발레리안느는 주신들을 제외하면 백신전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가 아니던가.
“······.”
그 사실을 알기에 알비츠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지? 그들은 사망이 아니라 실종되었다. 마물들이 신을 납치해서 마계로 데리고 갈 거라고 생각하나?”
“확실히 그건 좀 의외이긴 하다.”
적어도 백신전이 생긴 이래로 마물들이 신을 잡아간 역사는 없었다. 애초에 신이 마물에게 당한 경우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둠은 생명체들을 타락시킵니다. 어쩌면 잡아간 신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그런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히 신을?”
“어둠 또한 아카식 레코드에 준하는 세계의 법칙이 아닙니까.”
한 신의 말에 베리안이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이 마물 따위에게 당한 적이 처음이라 혼란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순히 피조물에서 신으로 격상되었을 뿐이다. 신이 된 입장에서 결코 믿을 수 없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 신들인 그들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넘쳐난다.
“일단은 그 가능성이 가장 높군. 상대가 신이기에 더욱 공을 들여야 하고 그래서 납치했다고 하면 그럴 듯해.”
피조물들의 타락에는 그런 시간과 노력이 필요 없지만 그들은 빛의 가호를 받은 신이니까.
“하지만 타락하게 되면 신격을 박탈당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받은 저희가 어둠의 힘을 받을 수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가능성은 세 가지겠지.”
단순히 그들의 죽음이 생각보다 늦어 아직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하는데 텀이 있었거나, 어둠이 그들을 타락시키는데 시간이 좀 필요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제 3의 세력이 있거나.
“제 3의 세력이 아니라 김우진이다. 만약 마물의 짓이 아니라면 김우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김우진도 할 수 없다고 보는데.”
“넌 대체 누구의 편인거냐, 베리안.”
“상식적으로 이야기하자는 거다. 이번 사태는 너의 실수로 이루어졌다는 것과고 함께.”
“알고 있다. 아무리 주신이라 한들,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다는 것도.”
본래 주신은 모든 책임에서 자유롭다. 허나, 아무리 백신전의 법도가 그렇다고 한들 진짜 무책임하게 내버려둔다면 그를 따르는 신들의 믿음이 약해진다.
주신이 그, 한 명뿐이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마물들은 우리가 평소에 상대하던 자들과는 다르다. 감히 신들을 상대로 승리하고, 신들을 납치했지. 상대가 상대인만큼 이쪽에서도 주신이 나서야 한다.”
알비츠가 무표정하게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가 직접 나서겠다. 사라진 네 명의 신을 반드시 찾아오지. 죽었다면 시체라도 들고 돌아오마.”
“···직접 나서겠다고?”
“문제 있나?”
“아니, 없다. 백신전은 내가 잘 지키고 있도록 하지.”
“대신 다른 것은 맡기겠다. 특히, 김우진.”
“얼마든지.”
알비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35명의 신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자.”
베리안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세계수를 뽑아버리고 김우진에게 죽은 51명의 집행자들의 복수를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지.”
두 번의 실패는 용납하지 않으니.
“기탄없이 말해보아라.”
* * *
- 끄어.
- 꺼꺼.
큰일 났다.
김우진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릴리의 덩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났을 때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세계수에서 틈틈이 새어나오는 신의 힘은 릴리가 명백한 소화불량에 걸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넷은 너무 많다고 했지?”
“그런 말보다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시죠.”
“그런 게 있을 턱이 있나.”
“그렇다고 먹은 걸 다시 토해내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애초에 릴리가 아니면 신들을 보관할 다른 대안이 없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자니 반드시 신에게 들킨다. 무언가 대안이 필요했다.
결국 김우진은 죄수들을 대표하는 여섯 죄수들을 소집했다.
“힘을 모두 소진시켜 버리는 건 어떤가? 그렇지 않아도 첫 마력포가 실패하면서 개조를 잔뜩 했네. 이번 포신이 얼마나 에너지를 버틸 수 있을지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는데 말이네.”
“그것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죠.”
“그렇다면 구속구 전부 채워서 봉인시키면 어떤가?”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겠군요.”
“구속구를 내가 개조해보는 건? 요지는 신들의 힘을 줄이면 되는 것 아닌가.”
데르카인의 제안은 제법 그럴 듯 했다. 문제는 신이 만든 구속구를 그가 개조할 수 있을까였지만 그의 실력은 꽤나 정평이 나 있는 만큼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일단 그건 그대로 해보죠. 하지만 역시 확실한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김우진이 다른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려 의견을 구했으나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다.
“신을 포기하는 건 어떻니?”
“이제 와서 몇 개를 포기하면 그게 더 문제입니다. 저들의 기억을 지워버릴 수도 없으니.”
“죄송합니다, 소장님. 저 또한 뚜렷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 불민한 종을 용서해주십시오.”
“용서할 테니까 책상에 머리 박지 마. 율리아, 넌 뭐 없어?”
“저요?”
“난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왜 저죠?”
“네가 하이엘프니까.”
“하이엘프라고 어머니 나무에 대해서 잘 알거라고 생각하시는 건 편견이에요.”
“징계방에 들어갈래?”
“그러니까 제 말은 그 편견이 사실이라는 거죠. 편견이 나쁜 건가요? 때론 옳은 편견도 있는 법이라고 생각해요.”
“말로만?”
“지금의 상황은 결국 어머니 나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신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렇다면 답은 두 개 중 하나네요. 신을 빼거나, 어머니 나무를 더욱 성장시키거나.”
맞다. 하지만 전자는 어려우니 후자를 택해야 하는데 후자라고 쉬운 게 아니었다.
오랜 세월 천천히 자라는 세계수를 급성장 시키는 게 어디 쉽겠나. 발아하면서 급성장한 것 자체가 연옥이라는 특수성과 수많은 영약들, 그리고 씨앗 상태일 때 이루어진 김우진의 간섭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이적이었다.
“음.”
김우진의 기대어린 표정에 율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제게 기대하시는 게 어떤 건지는 알지만 어머니 나무를 급성장 시키는 물건이나 영약, 마법 같은 건 없어요.”
애초에 엘프들에게 세계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성한 나무다. 그러한 나무를 가지고 이런 저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럼 정말 방법이 없다는 건가?”
“아뇨, 방법이 없다고는 안 했는데요.”
“방법이 없다며?”
“어머니 나무를 급성장 시키는 방법이 없다고 했죠, 해결책이 없다고는 안 했어요.”
“······?”
모두의 의아한 시선에 율리아가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 더 심어버리죠.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야? 세계수의 씨앗을 어디서 구하고?”
“저기서요.”
율리아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지목 당한 강민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
“어머니 나무시여.”
- 무언가 일어나고 있구나.
거대한 노루가 사라지는 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수십의 집행자들과 함께 동행한 그들은 제 멋대로 차원을 이 잡듯이 뒤졌다.
저항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었다. 하나라면 모를까, 신이 무려 다섯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뿌리를 내린 차원이라고 한들, 신들의 힘이 제약된다고 한들 한계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다.
무엇보다 저들이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만 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세계수이며 아카식 레코드를 통해 여러 차원의 세계수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백신전의 무분별한 작태가 전 차원의 세계수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어째서일까.
- 저들은 우리들에게는 늘 호의적인 자세를 취해왔는데.
무언가 문제가 발생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그것도 백신전의 신들이 이렇게 다급하게 움직일 정도의 문제가.
- 신이 다섯이나 뭉쳐서 다니는 것 부터가 정상은 아니긴 하다만.
그 오만하고 독선적인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다섯이서 뭉쳐 다니다니.
아무리 세계수를 윽박지르기 위해서라지만 너무 과하다.
- 너는 무엇을 찾고 있는 것 같으냐.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 죄송할 필요 없다. 나 또한 모르니.
허나, 대충 짐작이 가는 건 있다. 백신전이 저렇게 발작을 일으킨 경우는 처음이 아니었으니.
- 타이탄들이 그러했고.
물론 타이탄들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그녀가 직접 겪은 건 아니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에서 읽었다.
- 가루다들이 그러했으며.
- 포이닉스들이 그러했고.
- 차원용이 그러했지.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다. 태생적으로 우주의 힘을, 신의 힘을 품고 있다는 것.
백신전은 자신들 외의 도전자를 용납하지 않으니.
- 더 없이 오만한 놈들이지.
허나, 그 오만을 징죄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그건 오만이 아니라 절대자의 마땅한 지배다.
- 헌데 우리를 제외하고는 전부 씨를 말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 있던 건가.
순록이 웃었다. 아카식 레코드더 깊숙한 곳에 뿌리를 뻗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대한 지식은 그녀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파편만으로도 큰 진리로 다가오니까.
차원의 방벽이 열리고 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계수의 가지가 이곳저곳으로 뻗어나갔다. 신들의 흔적을 지워냈다.
- 다이안.
“예, 어머니 나무시여.”
- 소금을 뿌리렴. 저들이 있던 자리에 모두. 꼴도 보기 싫구나.
“예, 그리하겠습···.”
그때였다. 차원이 다시 열렸다. 다이안이 경계했으나 순록은 달랐다.
다가오는 기운은 제법 낯이 익었다. 동시에 낯설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기에.
그렇기에 그녀는 깨달았다. 상대가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었다는 것을.
- 참으로 공교롭구나. 하필 이 시점에 네가 나타나다니.
- 아직도 스스로를 집행자라고 소개할 참이냐?
“글쎄, 딱히 중요한 건 아니라서. 역시 릴리가 더 귀여워.”
불청객, 김우진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크라프트의 세계수. 나에게 투자를 하고 싶다고 했지?”
그렇다면.
“씨앗을 넘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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