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78. 양아치 >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발레리안느는 주신을 제외한 백신전 상위 열 명에 꼽히는 대신이다. 오랜 세월 신으로서 살아왔고 군림해왔다.
그런 그녀의 신생에서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주신, 알비츠께서 행하신 마물의 유도가 실패하여 주변으로 번지고, 신이 자신의 권역에서 실종되다니.
발레리안느는 주신의 명령을 받고 다른 신들과 함께 차원, 갈라스로 집행자들을 내려 보내고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차원에서는 업으로 인해 제약되지만 차원과 차원 사이의 통로에서는 그렇지 않으니까.
차원으로 들어가는 마물들을 최대한 줄여주고자 했다. 주신께서 작정하셨는지 마물의 수가 정말 어마어마했지만 어떻게든 되긴 됐다.
그런데 갑자기 신이 실종되다니.
‘네가 가주었으면 한다.’
‘예.’
알비츠의 명령에 차원, 드라스코로 향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백신전 소속인 신, 드라스코가 자신의 권역으로 삼은 곳.
어째서 그가 실종되었는지, 마물의 수준과 양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지, 그가 죽었는지 아니면 살았고 단순히 상황이 급박해 연락만 못하는 것인지 확인해야만 한다.
“난장판이긴 하군.”
두 명의 신들과 함께 차원의 지척에 도달한 그녀가 목격한 것은 방벽에 수백 개의 균열이 생긴 드라스코였다.
꾸역 꾸역 밀려들어가는 마물들은 신의 힘이 아니라면 결코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들어가겠다.”
“그래.”
“별 문제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세 명의 신이 권역에 발을 들였다. 권역의 주인인 드라스코만큼은 아니지만 일단은 신의 기운이 충만한 만큼, 그들 또한 일반적인 하위 차원에 비해 제약이 훨씬 적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거리낌이 없었다.
세 명의 신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것이 그들의 패착이었다.
─────!
방벽을 넘어가는 순간, 밀려드는 새하얀 불꽃이 그들을 덮쳤다. 급하게 끌어올린 신의 힘이 저항했으나 불꽃은 그것마저 잡아먹었다.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신들을 휩쓸고, 마물들을 집어 삼켰다.
“이게 무슨!”
한참을 밀려난 발레리안느가 입술을 깨물었다. 신의 힘마저 불태우는 불꽃에 저항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허나,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새하얀 불꽃의 벽이었다. 신임에도 그것을 꿰뚫어볼 수 없었다.
당연했다. 새하얀 백염에는 농밀한 신의 힘이 가득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익숙한, 하지만 어떻게 보면 낯선 불꽃이었다.
“···칼카르님?”
“아쉽지만 틀렸어.”
대답을 바라고 한 물음이 아니었으나 대답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제법 낯이 익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녀의 애병을 꺼냈다. 두터운 방패가 머리 위를 틀어막았다.
──!
방패가 찌르르 울렸다. 방패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전신이 흔들렸다. 이를 악물고 창을 내질렀다.
카앙, 불꽃의 검이 창과 부딪혔다. 신력과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김우진!”
발레리안느가 소리쳤다. 그녀의 분노에 상대가 웃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계약을 어길 셈이냐!”
“그럴 리가.”
“백신전이 두렵지도 않느냐!”
“너희 신년놈들을 하는 말이 하나 같이 똑같아. 계약을 어길 셈이냐? 혹은 신이 두렵지 않느냐. 분명히 말해주지.”
콰아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에 방패가 움푹 들어갔다. 발레리안느는 애병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대장장이의 신이 단조한 방패를 이리도 쉽게 망가트리다니. 김우진은 그녀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괴물이었다.
“나는 계약을 어길 생각이 없다.”
콰앙, 방패가 결국 반으로 쪼개졌다.
“그리고 백신전이 두렵지도 않아.”
쩌엉, 창이 날아갔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녀의 신력은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너 같으면 너보다 약한 놈들이 두렵겠나?”
“네놈···! 칼카르님을 어떻게 한 거냐!”
“네가 생각하는 그대로.”
짐작하고 있잖아?
“내 권능이 무엇인지를. 어째서 네가 내 불꽃에서 칼카르를 떠올렸는지를.”
“···맙소사.”
정말로 김우진 따위에게 칼카르님께서 죽었단 말인가.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허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김우진의 불꽃에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의 힘이 느껴지기에. 칼카르님과 비슷한 느낌이 나기에.
그의 무력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했기에.
그리고 하필 칼카르가 알베니우스를 찾으러 갔다가 죽었기에.
“대체 어떻게···?”
“놈이 나보다 약했다. 그게 전부야.”
“헛소리 하지 마라! 칼카르님이 네놈 따위에게 패배하실 리가 없다!”
애초에 김우진이 칼카르를 죽였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김우진과 백신전은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계약에 묶여 있···
“조력자! 네놈 조력자가 있구나!”
그 조력자는 결코 알베니우스가 아니다. 알베니우스 따위가 김우진과 힘을 합친다고 한들 칼카르님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김우진에게는 알베니우스와 세계수를 제외하고도 함께 칼카르님을 죽일 만한 조력자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마, 맙소사.”
“깨달은 모양인데.”
패닉에 빠진 발레리안느는 차마 대응하지 못했다.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새하얀 주먹에.
“이미 늦었어.”
콰아아아앙!
* * *
“좋네요.”
드라스코를 제외하고도 신을 셋이나 더 잡았다.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좋다.
생각 이상의,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힘을 확신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정도면 주신 둘이 와도 해볼만 할 것 같은데.’
그 정도의 자신감과 충만감이 있었다.
물론 그건 만용일 거다. 칼카르가 그랬듯이 주신은 다른 신들과는 격이 다른 수준이니까. 하지만 한 명을 두리쉬마에게 맡기고 시간만 끌어준다면 다른 한 명은 반드시 끝장낼 수 있다.
백신전의 기둥을 상대할 수 있는 힘. 백신전을 무너트리는 가장 중요한 열쇠를 손에 넣은 느낌이다.
“더 문제가 생기기전에 가시죠.”
“아무리 그래도 넷은 너무 많은 것 아니야?”
“이 넷을 합치면 딱 여섯입니다. 시에나, 데르카인, 타르칸, 강민식, 소지 그리고 디아네까지. 적당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것들을 숨길 수 있느냐다.”
“걱정 마세요. 릴리가 다 알아서 해줄 겁니다.”
릴리는 만능이니까.
김우진이 능숙하게 기절한 신들의 목과 사지에 구속구를 채웠다. 신이 만들었기에 신마저 구속할 능력이 있는 기물.
물론 신이 깨어나 작정하고 풀어내면 막을 수 없지만 기절한 상태에서 힘을 감추기에는 더 없이 적합하다.
“들키기 전에 빠져 나가죠. 저희는 애초부터 연옥에 있었던 겁니다.”
“무려 넷. 상황이 이런데 저것들이 연옥에 감찰관을 보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보낼까요?”
“무조건 보내지!”
“하긴, 저라도 저를 먼저 의심했을 것 같긴 하군요.”
하지만 그건 결국 나중의 문제다.
“일단은 빨리 가시죠. 저들이 눈치 채고 또 다른 신들을, 더 많은 신들을 보내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야 합니다.”
김우진이 흔적을 마저 지웠다. 그리고 마물들의 시체와 함께 뭉쳐진 마기 덩어리를 사방에 던졌다. 은은하게 남아 있던 신의 힘이 마기에 잡아먹히도록.
“두리쉬마한테 받은 건가?”
“예.”
그들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돌아온 연옥은 난장판, 그 자체였다.
“제가 목을 베었어요!”
“내 손톱이 놈의 심장을 찌르는 게 더 빨랐다!”
“타르칸님은 계속 당하기만 했잖아요! 이 상처들, 전부 제가 입힌 거거든요?”
“웃기는 소리! 내 손톱과 발톱은 그 어떤 것이라도 찢고 가른다!”
“무모하게 달려가셔서 그것까지 막아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네가 아니었어도 나는 버티고 승리했을 거다!”
“아, 정말!”
거대한 마물의 시체 위에서 사이좋게 다투는 하이엘프와 달의 늑대.
누가 저들을 엘프들의 귀족과 수인들의 귀족이라고 한지 의문이다. 그냥 팔푼이들인데.
어쨌든 자신들의 역할은 충분히 수행했다. 저들이 잡은 게 대장인지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고 그마저도 대부분은 토벌 당한 상태였으니까.
- 조자!
“역시 날 가장 먼저 반겨주는 건 릴리뿐이야!”
저 멀리서부터 날아온 파랑새가 김우진의 품에 안겼다.
- 저부 자바.
“전부 잡았어?”
- 으.
“잘했어, 정말 잘했어.”
릴리가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해달라는 뉘앙스에 열심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했다니. 릴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 그거?
릴리의 시선이 김우진의 뒤를 따라 둥둥 떠다니는 네 구의 신들에게 향했다.
“선물이야. 배터리 3, 4, 5, 6. 어때? 마음에 들어?”
- 이거 저부?
“응. 전부 품어서 숨겨줄 수 있지?”
- 아니.
릴리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 마나.
- 너므.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든 다 우겨 넣으면 되지 않을까?”
- 아대.
- 마나.
“아니야, 릴리. 넌 할 수 있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더 가져.”
- 모해.
- 아대!
“거봐, 아무리 릴리가 만년 정도 산 세계수도 아니고 신 여섯을 한 번에 품는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했잖아.”
알베니우스가 한 마디 보탰지만 김우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네 부탁을 무조건 적으로 하나 들어준다고 하면?”
잠시 고민하던 릴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 그러 대.
“······.”
이런 양아치 같은.
누구 자식인지, 참 잘 컸다.
* * *
네 명의 신을 릴리에게 넘겼다.
가지와 뿌리들이 신들을 감싸며 세계수 안으로 끌어들였다.
막대한 신력이 세계수를 감쌌다.
- 끄억, 배.
릴리의 거북한 트름을 했다. 어째서인지 조금 통통해진 것 같았다.
- 더, 아대. 저대.
누가 봐도 그렇게 보인다.
“그래, 나도 더 잡아올 생각은 없어.”
잡아올 수도 없다. 백신전도 바보가 아닌 이상, 더 이상 잡아오게 만들지도 않을 거다.
- 마나.
- 지주해야 해.
릴리가 술 취한 것 마냥 비틀거리며 떠나갔다.
“···괜찮으려나.”
“내 눈에는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저는 릴리를 믿습니다.”
저래 보여도 릴리는 은근히 칼 같다. 정말 안 되는 거였으면 끝까지 거부했을 거다.
“오셨습니까.”
신들을 넣어두고 집무실로 오니 부소장이 그들을 반겼다.
“씨발, 깜짝이야! 정말 너랑 똑같이 생겼어!”
“꼭 그렇게 욕을 해야 합니까?”
“너 같은 놈이 둘이나 있는데 욕이 안 나오고 배겨?”
“그대로 돌려드리죠. 부소장, 이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도 돼.”
“예.”
김우진이 부소장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에게 주었던 신의 힘을 다시 회수했다. 부소장이 모습이 다시 변했다.
“상황은?”
“세계수가 균열들을 모두 닫았고 마물들을 이끌던 대장은 율리아와 타르칸의 손에 죽었습니다.”
“집행자들은?”
“총 51명의 집행자들이 마물들이 벌려 놓은 균열을 통해 연옥으로 들어왔고 베르너와 디아네를 비롯한 집행자들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많군.”
집행자를 51명이나 보내다니. 확실히 놈들이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그들만으로는 역부족이었을 텐데?”
“저와 교도관 일부가 소장님을 연기하며 합류했습니다. 그들이 지레 겁먹은 덕분에 한결 편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들키지는 않았고?”
“마지막까지 제가 소장님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신들을 상대로는?”
“솔직히 자신 없습니다. 소장님께 받은 힘을 사용할 때마다 변신이 풀릴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무엇보다 제 몸이 소장님의 힘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결국 네놈도 좀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군.”
서늘한 눈빛에 부소장이 움찔했다.
“다른 이들은?”
“흩어진 마물과 집행자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세계수가 자신했으니 그들이 빠져 나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잘 됐군.”
적어도 여기까지는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다.
백신전의 의도를 어그러트리고 거하게 한 방을 먹였다.
과연 지금 백신전 놈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직접 보지 못하는 게 한이다.
김우진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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