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78화 (78/150)

# < 077. 최종병기 릴리 >

벌어진 균열.

쏟아지는 마물들.

세계수를 향한 위협.

그가 오랫동안 지내온 곳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느낌이 달랐다.

공기가 무겁다.

‘도플갱어? 너, 어디까지 카피할 수 있냐?’

‘오, 내 기운을 흡수할 수 있네? 언뜻 보면 모르겠는데?’

‘재밌네.’

‘너, 나하고 일 하나 같이 하자.’

감히 소장님을 따라했다가 참교육을 당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소장님의 곁에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소장님은 그를 믿고 떠나갔다.

그러니 완벽해야 한다. 소장님은 이 연옥을 나간 적이 없는 거다.

그가 차분히 상황을 살폈다.

마물들 사이를 헤집으며 날뛰는 수인들과 그 그림자에 숨은 암살자. 뒤늦게 합류한 거인.

돌진하는 신격과 그녀를 엄호하는 엘프들.

부서진 마력포를 수리하려다 코앞까지 다가온 마물들에 결국 도끼를 들고 마물의 대가리를 쪼개버리는 드워프들.

은밀히 숨어든 집행자들을 상대하는 광신도와 소지, 그리고 집행자들까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연옥 전체가 전장이었고 모두가 병사였다.

대부분은 앞선에서 막히지만 일부 마물들이 연옥까지 도달했고 교도관들이 분투했다.

그는 그 혼돈 속에서 자신이 가장 필요한 곳을 확인했다.

가볍게 발을 굴렀다. 공간을 격하고 목적지에 도달했다.

“···소장!”

짧은 비명들이 토해졌다.

* * *

주신, 알비츠를 섬기는 집행자 혼타스가 입술을 깨물었다.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했다.

능히 차원 몇 개를 소멸시킬만한 거대한 마물의 군단이 연옥을 덮칠 것이라고 했다.

소장이 거기에 온 신경이 쏠릴 때, 은밀히 숨어 들어가 세계수를 소멸시키면 끝이라고 했다.

헌데 일이 틀어졌다.

마물들은 갑자기 날뛰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연옥의 전력은 생각보다 강했다.

‘마땅히 가두어야 할 죄수들을 전력으로 동원하다니.’

김우진은 역시 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허나, 무엇보다 문제는 배신자들이었다. 특히 베른을 섬기던 집행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디아네 디트린.

주신의 권유조차 거부하고 베른의 집행자로 남은 자. 그녀의 능력은 자타가 공인할 만큼 뛰어났고 어째서인지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때문에 진즉에 끝내고 세계수를 뽑으러 갔어야 할 계획이 틀어졌다.

그리고.

그가 왔다.

“충실한 개새끼들이 왔군.”

“···김우진!”

그저 존재함으로도 느껴지는 열기와 위압감에 그가 이를 악 물었다.

이길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신을 죽인 자다. 신을 숨긴 자다. 아무리 주신을 섬긴다고 한들, 일개 집행자인 그가 비벼볼 만한 상대가 아니다.

“알고 있느냐?”

그의 목소리에 서린 위압감에 혼타스의 피부가 쭈뼛섰다.

“나는 너희들에게까지 계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 너희는 대상자가 아니거든.”

그것쯤은 알고 있다. 때문에 이 자리의 모두는 위대한 신명을 받아 목숨을 걸고 온 거다.

“긴말 필요 없겠지.”

죽어라.

불꽃이 폭사되었다.

그 순간, 혼타스가 소리쳤다.

“흩어져!”

목적은 어디까지나 세계수. 목숨을 잃더라도 세계수를 없애야만 한다. 이곳에서 김우진과 싸우면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었다.

집행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쫓아라.”

“예!”

디아네와 소지라는 자가, 그리고 배신자들이 그들을 추격했다. 김우진의 불길이 넘실거리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크악!”

“도망쳐라!”

전투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볼 때는 도망칠 때다. 가장 쉽게 적을 도살할 수 있을 때는 도망치는 적의 등을 치는 거다.

숫자의 우위로 밀어붙이던 관계가 역전되었다.

“목숨으로 회개하십시오! 감히 신의 권역을 더럽힌 가짜의 사도들!”

광신도의 도끼가 집행자의 등을 쪼개고.

“아까는 잘도 합공했겠다!”

“이번엔 네놈들이 죽을 차례다!”

배신자들의 합공에 집행자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김우진의 불꽃에 집행자의 몸이 녹아내린다.

일방적인 학살극. 그럼에도 그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반드시 세계수를 뽑는다!’

혼타스가 눈물을 머금고 세계수를 찾았다. 세계수란 신목이라 불리는 나무. 그건 그들이 신의 힘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우진과 집행자들을 제외하고 가장 농밀한 신의 기운을 찾으면 된···다···?

“···뭐냐, 저게.”

허나 그의 감각에 걸린 것은 결코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와 비슷한 형태도 아니었다.

엘프였다. 아니, 하이엘프였다. 아니.

신이었다.

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의 기감이 틀리지 않았다면.

백신전에서 주신을 모셔온 그의 경험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건 분명 신이었다. 신일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어째서 신이 이 자리에?

어째서 신이 마물들과?

어째서, 어째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에 그의 사고가 일순간 멈췄다.

“···율리아 카르센?”

기억에 있다. 불과 얼마 전에 세계를 구하고 집행자가 되기를 거부해 연옥에 가두어버린 죄수다.

그런데 어째서 그녀가 신이 되어 김우진을 위해 싸우는 걸까.

“···새로운 신.”

혼타스는 깨달았다.

주신께서 말씀하신,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탄생한 신이 바로 그녀라는 것을.

하지만 어떻게?

직접 감찰하신 주신께서는 이곳에 새로운 신은 없다고 했는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새로운 신격의 탄생을, 그 신격이 김우진의 죄수임을 위대한 주신께 알려야만 한다.

판단한 순간, 진로를 틀었다. 세계수가 아닌 하늘을 향해, 균열을 향해.

더 이상 세계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행히 다른 집행자들이 미끼가 되어준 덕분에 그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전력을 다해 날았다. 무조건 여기서 벗어나야 된다는 일념이 그의 머리를 지배했다.

그렇게 간신히 균열에 도착해 넘으려는 순간.

───!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장벽이 그를 튕겨냈다.

“······!”

마물들에게 갉아 먹힌 장벽이 이렇게 빨리 수복되었다고?

- 삐삐!

“정령?”

파랑새 한 마리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신?”

이렇게 농후한 신의 힘이라니.

“네놈, 네놈이구나. 네놈이 바로 세계수의 정령체야!”

- 삐삐삐!

세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이 정도면 어지간한 성체 이상인···.”

- 너 모나가.

“뭐라고?”

- 드러오 대 마으대로, 나가 대 아냐.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함께 파랑새가 부리를 벌렸다. 번개가 토해졌다.

“···이런 미친!”

혼타스가 다급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쩌엉, 가공할 충격에 그의 몸이 밀려났다.

“어떻게 세계수가 번개의 힘을!”

하물며 단순한 번개가 아니라 신의 힘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괴사에 그의 동공이 맹렬히 흔들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파지직, 번개로 휩싸인 파랑새가 긴 궤적을 그리며 돌진했다.

──!

혼타스의 마력이 단숨에 소멸했다. 자그마한 파랑새의 몸통 박치기가 그의 내장을 진탕시켰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세계수의 힘이 이 정도라니!

순간 혼란이 왔다. 이게 정말 세계수일까? 이게 태어난지 얼마 안 됀 세계수가 맞다면, 이걸 뽑아버리는 게 중요할까, 새로운 신격의 정체를 알리는 게 중요할까.

아니.

‘뽑을 수는 있을까?’

우습게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주신을 섬기는 집행자인 그가, 기껏해야 싹을 틔운 지 2년도 채 안된 세계수의 정령체를 상대로.

‘2년도 안 됐는데 정령체도 만들어졌어?’

“하하···.”

허탈한 웃음이 나오는 순간, 아찔한 충격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조자, 브타. 다 모가.

- 마 아 드러. 나바.

- 대지. 대지.

그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이렇게 많은 마물들과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또 죽여도 밀려드는 마물들은 질릴 정도였다.

하지만 율리아는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싸우면 싸울수록 힘이 넘쳐났고 전능감과 고양감이 그녀의 감정을 지배했다.

압도적인 힘으로 마물들을 쓸어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것을 더 없이 실감했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

검은 마기가 그녀를 덮쳤다. 바람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그녀의 본체를 두들겼다.

“저건···.”

검이 유료하게 움직였다. 갈라지는 바람의 틈새를 다시 닫고 풍랑을 일으켜 마기를 조각냈다.

거대한 마물이었다. 크기는 대략 20m. 다른 마물들과 비교해 엄청나게 크다의 느낌은 아니었으나 느껴지는 기운은 비교를 불가했다.

“당신이 이 마물의 대장이군요.”

마물이란 이지가 없으나 본능적으로 집단을 이룬다. 그리고 가장 강한 자가 자연스레 무리를 이끈다.

두리쉬마에 의해 여러 갈래로 쪼개진만큼, 여러 갈래의 새로운 우두머리들이 나왔다.

허나, 율리아 앞에 선 마물은 그 갈래의 하나가 아니었다. 무리가 갈라지기 이전부터 우두머리를 자처하며 무리를 이끌던 괴물이었다.

일반적인 차원 세 네 개 정도는 순식간에 멸망시켜버렸을.

어지간한 신들도 쉽게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당신을 죽이면 끝나겠군요.”

그렇기에 마땅히 그녀의 상대다.

김우진이 없는 지금, 연옥에서 가장 강한 것은 누가 뭐라 해도 율리아니까.

상대는 수많은 마물의 군단을 이끄는 만큼 강하다. 저 마물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며 연옥의 죄수들도 함부로 덤빌 수준이 아니다.

그녀가 상대를 죽여야지만 연옥의 피해가 커지지 않는···

“네놈이 여기서 제일 강하구나! 내가 상대해주겠다!”

은빛의 늑대가 마물의 무리를 뚫어내며 질주했다.

“앗, 기다려요! 저 자는 제 상대에요!”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마물에 니꺼 내꺼가 어디 있어!”

“그러니까 저건 제가 맡아야 한다니까요!”

“웃기는 소리! 강자와 싸우는 것이 내 숙명이다! 수인은 오는 싸움을 피하지 않아!”

“오는 게 아니라 타르칸님이 가고 있잖아요!”

짐승과 하이엘프가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 * *

콰직, 가지 하나가 릴리에게 달려드는 마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 조아.

순조롭다. 소장의 뜻대로 감히 자신의 차원을 침범한 벌레들은 결코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 마무, 커.

연옥으로 향하던 모든 마물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의 마기침식은 없다. 릴리가 방벽을 수복하기 시작했다.

- 지해자. 커.

집행자들의 대장을 그녀가 손수 막았다. 다른 이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사냥을 당하고 있다. 균열을 닫는 것과 함께 방벽의 방비를 더욱 단단히 굳히고 있으니 저들이 자력으로 나갈 수단은 없다.

남은 건 들어온 마물과 집행자들을 박멸하는 것.

마물들 중 꽤나 그녀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강자가 있긴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 기재이.

소장 다음으로 아끼는 하이엘프가 상대하고 있으니까. 신격을 얻었다고 갑자기 콧대가 우뚝 솟아난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녀는 확실히 강자였다. 거기에 타르칸이라는 짐승도 합류했으니 결코 지지 않으리.

- 그러 끄.

그녀의 눈에는 마물들 간의 연결 고리가 보였다. 가장 강한 마물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 지휘 체계는 놈이 죽으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리아와 타르칸이 마물을 죽이면, 나머지는 지휘관을 잃고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봐야 연옥의 안이며, 도망치는 적들을 사냥하는 건 쉽다.

- 조자.

소장이 오면 칭찬해줄 거다. 부탁을 완벽하게 수행했으니 대가를 요구해도 될 테고.

무엇을 달라고 할까.

음흉한 미소가 피어났다.

“빨리 빨리 고쳐!”

“지금 말고 나중에! 마물들이 달려드는데 마력포를 고칠 여유가 어디 있느냐! 도끼로 머리부터 쪼개!”

거친 고함소리에 입가의 미소가 지워졌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 에흐. 바부가트 나재이.

기껏 힘을 나누어주었음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자폭을 해버리다니.

이래서 세계수들이 드워프가 아닌 엘프들을 선택한 게 아닐까.

쯧쯧, 그녀가 혀를 차며 번개를 일으켰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세계수의 본체에 접근하는 마물들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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