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76. 비보 >
“···그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소장님과 싸울 때도 함께 했는데요?”
“솔직히 실력 자체는 형편이 없어서···.”
“크흠.”
베르너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칼을 어루만졌다.
회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뼈도 갈라버리는 예리한 칼날이 살기를 드러낸다.
거짓은 아니었다. 그가 품고 있는 막대한 가능성과는 별개로 전투 실력은 이곳의 죄수들에 비하면 명백한 하수니까.
지금도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검을 끊어낸 것일 뿐, 특별한 기교가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당신의 권능, 요리,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죄수번호 1176번, 베르너 레트만.
차원, 갈라이 출신으로 차원, 체르타인을 구원한 용사.
신들에게 토사구팽 당해 연옥으로 들어왔으나 다른 죄수들과 달리 스스로 만족하고 적응한 케이스.
그의 권능은 ‘요리’였다. 식재료를 요리해 그 재료가 품고 있는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는 권능.
재료가 좋을수록, 더 뛰어날수록 얻어내는 것이 많아진다.
오크를 요리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지만, 오우거를 요리하면 오우거의 체력과 힘이 신체에 깃든다.
드래곤을 요리하면 드래곤의 마력과 감지 능력이 깃든다.
그것이 그의 권능. 비록 하나하나는 미약하지만 용사로서 수없이 만들고 먹어온 것들이 지금의 그를 이루었다. 김우진을 제외하면, 신이 되어버린 율리아를 제외하면 품고 있는 마력은 가장 막대한 괴물로.
“뭐, 그래도 싸움은 못하지만 해체는 잘합니다.”
그것이 그의 업이니까.
그 사이 눈치를 살핀 집행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마력에 놀랐지만 그들 또한 강자였다. 하물며 수가 훨씬 많으니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멍청하긴. 스스로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주는구나.”
“마력만 많고 별 볼일 없는 놈이다. 죽여라!”
사방에서 쏟아지는 권능들에 베르너가 마력을 방출했다. 그건 방어막도 오러도 아닌 그저 마력의 덩어리였으나 그 압도적인 양은 충분히 주인이 빠져나갈 시간을 주었다.
허나, 그것 또한 예상한 듯, 집행자들의 화살이 예상 경로를 막았다.
카앙, 회칼에서 불꽃이 튀었다.
“제기랄!”
그는 싸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강한 힘을 가진다거나 신에게 복수한다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
그의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요리와 미식이었고 연옥은 전 차원의 식재료들이 모이는 천국이었다.
힘에 대한 미련은 크게 없다. 그나마 용사의 힘을 잃어버리지 않고자 하는 욕심이라면 위험한 재료를 다룰 때, 용사의 힘이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이 가끔 있기 때문이다.
딱 그 정도.
때문에 소장과 백신전의 격전은 그와는 별다른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신들만 먹는다는 과육과 음식들. 그래, 그게 문제였다. 고작 그것 때문에 목숨을 걸다니.
베르너가 다시 한 번 고민했다.
과연 그것들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을까?
고민은 1초 만에 끝났다.
“당연히 있지!”
미식이야말로 그가 살아온 인생이 아니던가.
그런 것들을 보지도, 먹지도, 요리하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보는 거다.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와라!”
그는 검술에 조예가 없었다. 용사로서 나름의 검술을 연마했지만 결코 집행자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 더 정확했다.
순식간에 수세에 몰렸고 날카로운 창이 그의 마나를 뚫고 들어왔다. 그 순간, 손으로 창을 잡아챘다. 손에 두른 마력이 짧게나마 그의 손을 보호해주었다. 집행자의 움직임이 덜컥, 멈췄다.
“어어···?”
“어는 무슨 어!”
그걸로 충분했다.
검술이 부족할 뿐, 칼을 쓰는 법을 모르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장기는 해체. 모든 생명체는 크게 보면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니 칼이 닿기만 한다면.
서걱-
그의 칼이 유려하게 춤을 췄다. 집행자가 비명을 질렀고 다른 집행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빠져나갔지만 이미 그의 오른 팔은 뼈와 살이 분리되어 새하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상태였다.
“이런 미친!”
“그 짧은 시간에 아예 포를 떠놨어?”
집행자들이 분노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베르너가 다급히 소리쳤다.
“언제까지 구경만 하실 겁니까! 좀 도와주세요!”
“아, 물론입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벌어졌던 입을 다시 닫은 디아네가 황급히 가세했다.
* * *
“딱 예상대로군요.”
마물들이 밀려온다. 집행자들이 그 혼란을 틈타 고개를 들이민다.
허나, 그 모든 것들이 막힌다. 엘프들에 의해, 드워프들에 의해, 광신도와 집행자들에 의해.
“마력포가 폭발하는 것도?”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시죠?”
“전혀 사소해보이지 않는데. 저거 괜찮은 거냐?”
“괜찮을 겁니다.”
푼수 같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데르카인과 드워프들은 용사다. 마력포를 정면으로 맞은 것도 아니고 모조리 해소한 뒤, 그 여파로 일어난 폭발로는 죽지 않을 거다.
뭐,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릴리도 있고 부소장도 있다. 연옥은 결코 저 정도에 무너지지 않는다.
마물들이 모조리 다 연옥으로 투입되었다면 모를까, 분산되었으니까.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뭐, 네 말이 맞겠지.”
알베니우스가 공간을 열었다. 그 속으로 길이 보였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길.
우주의 힘이 없는 자들은 결코 인식할 수 없는, 하지만 둘에게는 명백히 보이는.
연옥에서 시작된 길은 수천, 수만 갈래로 뻗어나가며 시커먼 어둠이 연옥의 일부를 물들이고 있다.
허나 그 어둠은 하나가 아니니 수십 개의 덩어리들이 수많은 차원에 흩어져 차원들을 유린하고 있었다.
“저게 다 왔으면 난리 났을 것 같긴 하군요.”
아무리 율리아가 신격을 얻었다고 한들, 아무리 죄수들이 강하다고 한들 물량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
물론 패배를 염두에 둔 건 아니다. 율리아가 신격을 얻은 이상, 동급의 존재가 아니면 그녀를 죽일 수 없으니.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 신의 끄나풀들을 모조리 죽일 거라는 보장이 없었고 그렇게 되면 율리아가 신격을 얻었다는 것을 들키게 된다.
그건 정말 최악의 예상.
두리쉬마 덕분에 일어나지 않은 미래다.
“어디부터 갈 테냐.”
“어디부터가 아니라 누굴 찾아갈 거냐고 되어야지요. 목표는 차원이 아니라 신이니.”
권역을 뭉개는 것도 즐겁지만 역시 그 주체가 되는 신을 직접 잡는 게 베스트다.
“일단 저기부터 가볼까.”
가장 거대한 덩어리가 뒤덮은 차원. 그곳에서 느껴지는 우주의 기운은 누가 봐도 신의 권역이었다.
* * *
“재앙, 재앙이다!”
“종말이 도래했다!”
“신이시여, 저희들을 굽어살펴주시옵소서!”
하늘에 구멍이 뚫렸다.
단순히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다. 하늘이 갈라졌다. 수십, 수백, 수천 개의 균열들이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불길한 마기와 함께 마물들을 토해냈다.
차원 어디에서든 균열들이 존재했다. 보였다. 마물들이 떨어졌다.
“끄아아악!”
“막아라!”
“신께서 함께 하신다! 우리는 승리할 수 있다!”
“성으로 도망쳐라!”
전 대륙에 동시다발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 마물들은 땅을 밟고 선 모든 생명체들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인류는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용사가 없었다.
허나,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게는 용사 대신 신과 집행자들이 있었다.
“신께서 너희들을 보살피시니 두려워 말라!”
“맞서 싸워라! 신의 이름으로 어둠을 토벌하라!”
날개를 단 천사들이 대륙 곳곳에 나타났다.
그들은 찬란한 광휘를 뿜어내며 마물들을 베어냈다.
“신이시여!”
“신의 천사께서 오셨다!”
그들의 등장은 절망에 물들던 대륙에 비추는 한 줄기 서광이었다.
그리고.
콰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일거에 쓸려나가는 마물들은 신의 이적이었다.
“신이시여···!”
“신께서 함께 하신다! 두려울 것이 그 무엇이랴!”
그들의 찬양에도 정작 그들의 신, 드라스코의 얼굴은 펴질 줄은 몰랐다.
그의 시선은 벌어진 균열들에서, 끊임없이 토해지는 마물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김우진과 연옥을 노리던 마물들이 자신의 차원을 덮치다니.
주신께서 행하시던 일인지라 실패가 더욱 의외였다.
“···다행히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하군.”
이곳은 그의 권역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하위 차원과는 달리 그의 힘을 투사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마물들이 아무리 모여 봐야 결국 마물. 감히 신의 위엄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다.
신이 된 이래 간만에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니 마물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균열은 여전히 마물을 토해내고 있지만 그 수도 처음과 비교하면 현저히 적다. 이제 이 정도라면 별 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제부터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할 건데 벌써 안심하면 재미없지.”
“···누구?”
낯익은 목소리가 불쑥 그의 귓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열기가 그를 덮쳤다.
“크윽···!”
다급히 힘을 끌어올렸다. 찬란한 광휘가 불길을 밀어냈다.
아니, 밀어내는 줄 알았다.
“백염···?”
붉은 염화가 더욱 세차게 타올랐다. 그의 신의 힘마저 녹여버리며 새하얗게 변했다.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마, 말도 안 돼!”
불길 사이로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김우진. 김우진이었다.
“연옥에 있어야 할 네가 어떻게?”
아니, 어떻게 이런 불꽃을? 분명히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일 것 같아?”
“계약을 어기려 하다니! 백신전이 두렵지 않느냐!”
드라스코가 모든 힘을 일거에 방출하며 반동을 이용해 뒤로 도망쳤다. 꺼지지 않은 불길들이 달라붙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우주의 힘으로도 쉽게 꺼지지 않는 불이라니.’
대체 어떻게 김우진이 이런 힘을!
하지만 그의 도주는 몇 걸음 이어지지 못했다.
콰앙, 복부를 후려치는 열기와 충격에 드라스코의 몸이 새우처럼 구부러졌다.
그 위로 불길이 떨어졌다. 뜨거운 열기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걱정 마. 넌 죽지 않을 테니. 넌 배터리 넘버3다.”
악마의 속삭임.
그게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
대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 마물들은 연옥 뿐 아니라 주변의 차원들을 침공했고 교차 차원인 연옥의 주변에는 신들의 권역 또한 다수 존재했다.
“정확히 몇 곳이냐.”
“열 두 곳의 차원들이 습격당했습니다. 그 중 권역은 다섯이며 해당 차원의 신들이 우선 방어를 위해 나섰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일단 안심이다.
권역은 신의 앞마당과 같은 곳, 신력이 넘쳐나고 신과 집행자들이 다른 차원보다 무난하게 힘을 투사할 수 있으니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
문제는 다른 차원이었다. 권역이 아닌 곳들. 그곳들 또한 모두 백신전의 영역이었고 피조물들이 살아간다. 갑작스러운 마물들의 침공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하위 차원이기에 신들은 마음대로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 정석적인 루트인 용사 소환도 지금 써먹을 수도, 소환해도 너무 많은 마물들을 감당할 수도 없으니 결국 집행자들을 보내야 한다.
“집행자들을 차출해라. 각 차원에 못해도 서른씩 보내도록.”
“예.”
허나, 집행자들이 신은 아니라고 해도 결국 신의 권속이다. 신만큼은 아니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데 업이 필요하니 집행자의 주인들이 감당해야할 몫이다.
그리고 어떤 신도 업을 감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건 스스로의 약화를 뜻하니까.
반대로 기회이기도 했다. 아직 권역이 아니기에 자신의 이름을 퍼트리고 권역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고로 신앙은 위기에서 더 피어나는 법이다.
그걸로 회의가 끝났다. 모든 신들이 나갔다. 두 명의 주신이 남았다.
“어떻게 된 거지?”
“···부끄럽지만 실수했다. 마물들의 수가 생각 이상으로 불어났고 유도하는 것만으로 통제하는 것에 버거움이 있었다.”
“실수? 네가 말인가?”
“과욕을 부렸다. 칼카르가 죽은 것부터, 백신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신이 탄생한 것까지. 여러 문제가 동시에 터졌고 그 모든 시작은 알베니우스와 김우진이었다.”
헌데 이번엔 세계수였다.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고 확실하게 끝장내고자 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마물들을 유혹했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마물들이 모여들었고 아카식 레코드에게 힘을 부여 받은 ‘빛’으로는 ‘어둠’인 마물들을 통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덕분에 세계수도 뽑을 수 있을지 미지수군.”
마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진 덕분에 연옥으로 간 마물들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물론 모든 차원들 중 가장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니까. 그곳에는 김우진과 배교한 집행자들이 있다.
“아니, 세계수는 반드시 뽑는다. 내 실수는 내가 만회하지. 내 집행자들을 추가로 보내겠다.”
“네가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나도 조금 더 손을···.”
그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신 하나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주신들이시여!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지?”
“드라스코의 종적이 사라졌습니다!”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아예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마물들에 의해 문제가 생긴 건 아닌지···.”
“······!”
또 하나의 비보가 백신전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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