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75화 (75/150)

# < 074. 시작 >

탁탁,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데르카인이 마른 침을 삼켰다. 자신 있게 만든 설계도였지만 괜스레 검사 받는 입장이 되자 긴장이 되었다.

“그러니까 세계수를 아예 둘러싼 돔을 만드는 거군요?”

“맞네. 신들의 수작인만큼 만약이라는 가능성이 있으니 최대한 세계수는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도록 하려고 하네.”

돔을 중심으로 온갖 방어 마법들과 공격 마법, 그리고 마도공학 무기들이 빼곡하게 존재했다.

“무기들은 이미 만들고 있네. 세계수를 중심으로 연결하여 에너지를 공급하기만 하면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고.”

“알아서 하세요. 제가 뭐, 본다고 알겠습니까.”

이런 일은 전문가한테 맡기는 게 최고다.

“완성까지는 어느 정도를 예상하십니까?”

“아무리 못해도 두 달은 걸리네.”

“드워프들은 물론 엘프들, 집행자들까지 다 도와주는데 말입니까?”

“그래서 그나마 두 달이네. 신들의 공격에도 어느 정도는 버티게 만들려면 그만한 노고가 필요하지 않겠나. 마법진에 마력포에 해야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네.”

“하긴, 그것도 그렇군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리긴 한다. 김우진이 예상하기로 신들의 수작은 결코 두 달이나 시간을 끌지 않을 테니까.

멀지 않았다. 그의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일단 완성된 무기들만이라도 릴리 주변에 배치해두는 건 어떻습니까?”

“그럼 일은 두 번 해야 하네.”

“두 번 하는 게 릴리가 불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렇군. 알겠네.”

“미리 말씀드리자면, 균열이 열리고 습격이 이어지면 저는 연옥에 없을 겁니다.”

“그 중요할 때 어딜 가려는 건가?”

“맞고만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위기는 곧 기회라고, 반대로 한 방 먹여야죠.”

“혹시나 해서 묻는 거네만, 배터리가 늘어나는 건가?”

“이제는 아예 신이라고도 안 합니까?”

“자네 때문이네. 무한동력을 알아버린 뒤로 신이 아니라 전부 배터리로 보여.”

미약한 광기가 데르카인의 눈가를 스쳤다.

“뭐,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릴리의 말로는 아직 여유가 있다고 하니. 최대한 채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죠.”

“좋군. 아주 좋아.”

“네. 면담은 여기까지하죠. 시간이 되서.”

“알겠네, 최대한 자네가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보도록 하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데르카인이 나갔다.

“딱 됐네.”

김우진이 밖으로 나갔다. 정원 한쪽에 마련된 텅 빈 공터, 그곳에 여섯 명의 인영들이 있었다.

신, 율리아 카르센.

엘프, 시에나 올름.

달의 늑대, 타르칸 톨리스.

인간, 강민식.

광신도, 디아네 디트린.

소지, 베르너 레트만까지.

모두 죄수들 중 신위를 얻을 만한 능력이 되는 자들이다.

“모두 다 모였군.”

“율리아가 네가 훈련을 시켜준다고 해서 모이긴 했는데 무슨 훈련이니?”

“응? 율리아가 말 안했습니까?”

“안했는데.”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소장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싸우는 겁니까? 그럼 환영입니다.”

“정확해.”

타르칸의 물음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격을 얻으려면 그만큼 강해질 필요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실전만큼 좋은 게 없지. 용사란, 위기를 극복하는 순간 더 강해지니까.”

“그건···.”

“반박은 받지 않습니다. 경험담이니까요.”

“율리아!”

“죄송해요! 하지만 미리 말했으면 안오려고 하셨을 거잖아요!”

“이건 훈련이 아니라 고문이니까!”

“소장님하고 마음놓고 싸울 수 있다니. 저는 기쁩니다.”

“훈련이고 뭐고 다 받을 테니 알베니우스님께 꼬리 좀 잘라달라고 부탁해주시면 안됩니까? 아니면 가장 오래 버티면 부상으로 준다거나?”

“제기랄, 완전 상극인데 또 싸워야 한다고?”

“아아, 어찌 종이 된 입장에서 소장께 검을 들이댈 수 있겠습니까!”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기겁하고, 누군가는 절망하며, 누군가는 투지를 끌어올리고, 누군가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았으며, 누군가는 신앙을 시험받았다.

“그런데 데르카인은 안 오는 거니?”

“제작을 총괄하는 바쁜 양반이라 지금은 안 됩니다.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으니까요.”

“그건 나중에는 더 험하게 굴린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건 그때가 봐야죠.”

그리고 김우진은.

“참고로 훈련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매일 3번이니까.”

그러니.

“다들 알아서 잘 살아남길.”

그들 사이로 공평하게 불꽃을 밀어 넣었다.

* * *

최근 들어 김우진의 일과는 지극히 단순해졌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신격을 얻을 가능성이 있는 자들의 훈련을 봐주고 릴리와 놀아준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언제 균열이 열리고 마물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연옥을 나갈 수도, 신들을 상대로 당장 무언가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약 이주가 지났다.

“이제 좀 익숙해졌나?”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자신감을 가져. 이번 일을 위해서 꽤 많은 준비를 해왔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김우진의 모습을 한 부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어지간한 자들은 상관없습니다만, 신들이 작정하고 보낸 집행자들을 상대로 안 들키고 잘할 수 있을 지는···.”

“적당히 여유 있는 척하면서 적당히 상대해주면 된다.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

오랜 시간 그들을 감시해왔기에 김우진은 누구보다 죄수들의 포텐을 알았다. 율리아는 물론이거니와 아직 신격을 얻지 못한 연옥 상위 여섯 명은 어지간한 집행자들을 씹어 먹는 강자들이다.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어난다해도 충분히 수습할 능력들도 있고.

신이 직접 오지 않는 이상, 무조건 막는다.

설사 신이 직접 오더라도 한둘이라면 충분히.

“그렇지, 릴리?”

연옥에는 신격을 얻은 율리아뿐 아니라 두 신을 삼키고 급성장 중인 세계수, 릴리가 존재하니까.

- 삐익.

릴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만 믿으라는 듯, 날개로 가슴을 탕탕쳤다.

번개를 방출하고 있는 그 모습이 썩 믿음직스러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베르너도 잘 써먹어. 그놈은 싸움에 별 관심이 없어서 그렇지, 스팩만큼은 신이 된 율리아 빼고 이길 놈이 없을 걸.”

“그 정도입니까?”

“기본 능력 자체가 사기거든.”

권능이 그쪽이라 그렇다. 타르칸이 알았다면 매일 같이 싸우자고 달라들었을 텐데 여태까지는 잘 숨겨왔다.

‘그것도 이제 끝인 것 같지만.’

김우진과 함께하는 훈련에서 능력이 얼핏얼핏 드러나면서 그를 바라보는 타르칸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때였다.

- 삐삐!

릴리의 눈이 커졌다. 날개를 퍼덕이는 온 몸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말 뜻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의미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왔구나, 그렇지?”

- 삐이!

“좋아. 릴리, 내가 한 말 잘 기억하고 있지?”

- 삐이.

- 하노도 사리지마.

“그래, 정확해. 감히 널 노린 놈들이야. 절대 자비를 베풀지마.”

- 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소장, 네가 뭐라고?”

“소장입니다.”

“내 말투는 그러지 않아.”

“소장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만. 어차피 다 죽여 버릴거면 제가 굳이 소장님인 척을 안 해도 되지 않습니까?”

“맞아. 그러니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해.”

“예행연습 말입니까?”

“언젠가 진짜 나 대신 신들 앞에서 연기를 해야 할수도 있으니까.”

“······.”

“알베니우스는?”

“식당에 계십니다.”

“계십니다?”

“···계신다.”

“갑자기 식당? 왜?”

“오마카세를 한다고 하더군.”

“베르너 놈,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나 보지?”

“당연하지. 그놈이 쉽게 미련을 버릴 놈은 아니니까.”

어떻게든 환심을 사보겠다는 작정인가.

하긴 음식에 대한 열정이 단순한 열정을 넘어선 광신의 영역이니 그럴만 하다.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베르너의 주장을 듣고 나니 차원용의 꼬리가 무슨 맛일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드래곤이 진미긴 했는데 말이지.”

베르너가 요리한 드래곤은 그가 먹었던 어떤 고기보다 진미였다.

김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베르너를 응원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데리러 가야겠군.”

* * *

달그락 달그락-

알베니우스가 우아하게 고기를 썰었다. 칼이 부드럽게 파고들고 핑크빛으로 잘 구워진 고기가 입 안으로 들어갔다.

“음, 나쁘지 않군.”

씹는 순간, 육즙이 터지고 향신료의 향이 함께 폭발한다. 적당히 부드러우면서 적당히 쫄깃하고 녹진한 소스는 더 없이 잘 어우러진다.

“이게 무슨 고기라고?”

“코크리라는 몬스터입니다.”

“코크리는 나도 아는데 전혀 맛있어 보이는 놈이 아니었는데.”

코크리는 5m가 넘어가는 거구에 근육질로 뒤덮인 황소를 닮은 몬스터였다.

“몬스터답게 질기고 독이 있지만 잘만 요리하면 그게 오히려 장점이 됩니다. 아무리 푹 익혀도 적당히 씹는 맛이 남아있고 중화된 독이 오묘한 향을 남겨 음식의 풍미를 더해주죠.”

“확실히···. 인정하지. 네 실력은 내가 만나보았던 그 어떤 요리사보다 뛰어난 것 같군.”

당연히 지금 먹고 있는 요리도 마찬가지. 혀를 사정없이 유린하는 극상의 진미를 알베니우스가 정신없이 흡입했다.

“그러면 주시는 겁니까?”

“안 돼.”

“왜 안 됩니까? 맛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네 놈 같으면 네 엉덩이를 때서 먹으라고 남에게 줄 거냐?”

“저는 재생이 안 되는 인간입니다.”

“만약 재생이 되면 주고?”

“미식을 진보시킬 수만 있다면···!”

“미친 놈! 이건 인간이고, 드래곤이고 같은 종족의 문제가 아니야. 어떤 미친 놈이 자신의 살을 남에게 먹으라고 손수 주냔 말이야!”

“저는···.”

“닥쳐라! 넌 애초에 비교할 수 없는 놈이고!”

“하지만 맛있으셨죠?”

“그거야···.”

알베니우스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고고한 드래곤의 자아로 인해 거짓말에는 상당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제게 꼬리를 조금만 때어주신다면 이곳에 머무시는 매일 제가 삼시세끼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극상의 진미로만!”

“···으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0kg만 주시면 됩니다. 본체로 변하시면 그 정도는 발톱에 낀 때 수준 아닙니까?”

“네놈 발톱의 때는 10kg이냐?”

물론 그리 대단치 않은 건 맞다. 그의 본체는 50m가 넘어가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며 거기서 꼬리 끝부분을 10kg 땐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 자라나기도 하고.

하지만 역시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다. 차라리 무기로 만든다고 하면 뼈나 비늘을 조금 줄지언정 먹기 위해 살을 달라니.

“비늘이라면 몇 조각 때어줄 수 있는데.”

“비늘도 주시겠습니까? 비늘을 잘 구워 고기 위에 뿌리면 괜찮은 크러스트가 되겠군요.”

“···꺼, 꺼져라!”

와장창, 알베니우스가 테이블을 뒤집어엎고 창문을 깨고 도망쳤다.

“잠시만요!”

베르너가 급하게 뒤따라 뛰어내렸지만 알베니우스는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장님?”

그리고 그의 앞에는 소장이 있었다.

“이거···.”

“예, 알베니우스님, 때가 되었습니다.”

“때요?”

그의 시선을 따라 베르너의 고개 또한 올라갔다.

“무슨 때가 됐다는 겁니까?”

“베르너.”

“예. 소장님.”

“지금 당장 네 위치로 돌아가서 싸울 준비를 하도록.”

“···설마?”

그제서야 베르너는 보았다.

끼기기기긱-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시커먼 균열과 쏟아지는 마물들을.

“···정말로 왔다.”

습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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