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73. 순리 >
신의 힘이란, 무엇일까.
용사의 힘? 우주의 힘?
용사의 힘도 결국 우주의 일부일 뿐이다. 그것을 신들이 신의 힘이라 부르고 있을 뿐.
“어때? 그렇게 이해하니 조금 더 쉽지?”
“네. 알베니우스님의 말대로예요.”
용사에게 있어 신의 힘은 미지가 아니라는 것. 율리아는 알베니우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보다 능숙하게 힘을 다루게 되었다.
율리아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단순한 용사일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샘솟는 힘에 전능감이 느껴진다.
“저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뭐를?”
율리아가 대답 대신 감옥을 향해 소리쳤다.
“소장 나와!”
알베니우스가 먹던 어포를 떨어트렸다. 베르너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가져다 바친 크라켄 어포였다.
“율리아, 신의 힘을 얻었다고 자살하는 건 옳지 않다고 보는데.”
“제가 소장님한테 얼마나 기나긴 억압과 핍박의 시간을 견뎌왔는지 알베니우스님은···.”
“너 연옥에 온지 2년도 안 됐어.”
“···농담이고요. 조금 능숙해졌지만 역시 가장 좋은 건 실전 아니겠어요?”
“실전? 그걸 굳이 김우진을 상대로 할 필요는 없잖아. 나도 있고.”
“알베니우스님이요?”
하이엘프의 시선이 차원용의 전신을 훑었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쉬울 것 같아서···.”
“뭐, 임마? 야! 내가 이래 뵈도 차원용이야! 너희 세계수랑 밥도 먹고 작당모의도 하고! 다했어!”
“근데 신격을 얻으니까 알겠어요. 생각보다 더 약하시네요.”
“전직 용사들을 다시 용사로 만들었으니까!”
“어쨌든 지금은 쉬울 것 같은 건 맞잖아요.”
“···예전부터 알았지만 너도 정상은 아니야. 그렇다고 김우진한테 시비를 걸어?”
알베니우스가 억울한 표정으로 침몰했다. 율리아는 검을 뽑고 다부진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어느새 밖으로 나온 김우진이 흥미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
“네, 소장님.”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지?”
“맞아요. 신격을 훈련하는데 실전만큼 좋은 훈련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럴 듯한 추론이야.”
무엇이든 실전이 가장 좋다. 그만큼 힘들지만, 힘든 만큼 빠르다. 물론 살아남는다면.
“상대를 잘못 고른 것만 빼면.”
불꽃이 튀어올랐다. 율리아가 급하게 검을 들어올렸다.
─!
상상 이상의 충격에 신음을 삼키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김우진이 따라붙었다.
“자신의 수준을 객관화해서 상대를 봐가며 시비를 거는 것도 능력이야.”
쾅쾅쾅!
몇 번의 충돌, 율리아는 속절없이 밀리기만 했다. 신의 힘을 끌어올려도 뜨거운 열기에 모조리 녹아내렸다.
대련은 금방 끝이 났다.
상처투성이가 된 율리아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어?”
알베니우스의 조롱이 율리아를 괴롭혔다.
“거, 대련해서 아픈 사람을 놀리고 싶습니까? 하여간.”
“어이가 없네. 김우진, 네놈이 때린 거다!”
“뭐, 율리아. 그래도 태도는 나쁘지 않았어. 그런 자세, 좋아.”
“···아무리 그래도 같은 신인데 너무 차이나는 거 아니에요?”
“난 신이 아닌데.”
“그게 더 억울해요!”
“그래도 넌 떡잎이 보여.”
김우진이 자신의 옷소매를 들어올렸다. 미약하지만 잘려나간 조각이 있었다.
“나쁘지 않아.”
“전력을 다했는데 옷소매 조금···. 아니죠. 좋게 생각할게요. 원래는 머리카락도 못 건드릴 수준인데 건드렸잖아요.”
“긍정적인 마인드야.”
김우진이 불꽃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그렇지 않아도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 중이었는데 일단 실전부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앞으로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세 번씩 대련을 하는 거로 하지.”
“···어, 세 번이나요?”
“상황이 상황이니까. 여유가 그리 많지 않아.”
“저 지금 완전 탈진인데? 도저히 세 번은 무리인데요?”
“마른 오징어도 쥐어짜면 즙이 나와.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
“그런 이상한 근성론은 세상을 좀 먹어요! 저를 조금 더 살살 대해주세요!”
“그럼 애초에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지.”
“예?”
율리아가 눈을 껌뻑였다.
“네가 선택한 훈련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잠깐만요, 하루에 세 번을 선택한 적은 없어요···!”
“다음부터는 다른 놈들도 네가 알아서 모아 와. 누구를 이야기하는 지는 알지?”
“제 말을 아예 안듣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김우진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러지 말랬잖아.”
알베니우스가 클클 거리며 웃었다.
“···죽을 거예요. 전 죽고 말거라고요.”
율리아가 좌절했다.
“그래도 지금 맞는 게 나중에 목숨을 살려주긴 할 걸.”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 * *
“···이거 괜찮은 거겠지?”
드네르바가 잘근 잘근 손톱을 씹었다.
알베니우스를 찾고자 하는 대대적인 수색은 결국 세계수의 차원들로 번졌다.
김우진과 알베니우스의 관계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알베니우스가 잡히고 나아가 김우진이 잡힌다면?’
그리고 김우진과 그녀의 관계가 들통난다면?
‘그럼 끝이야!’
신으로서도 생명으로서도. 단순히 신격을 잃는 게 아니라 소멸하거나 심연으로 끌려들어갈 게 분명했다.
‘아니야, 괜찮아. 괜히 그러지 말자.’
계약은 분명히 불공정 계약이지만 적어도 비밀 보장만큼은 확실했다. 김우진이 그런 어리석은 우를 범할 리는 없다.
‘잡히면 잡히는 대로 좋은 거잖아?’
계약서대로라면 굳이 김우진의 편에서 백신전을 무너트리지 않아도 된다. 김우진이 백신전에 의해 죽어도 계약은 아무런 문제없이 종료되니.
‘그래, 그냥 얌전히, 조용히 있으면 돼.’
그럼 아무도 모른다. 들킬 일도 없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직 아무런 명령이 내려오지 않고 있기에, 김우진과의 작은 접점조차 없으니 새로운 접점이 만들어지기 전에 김우진이 죽는 건.
“드네르바님. 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잠깐만 기다려.”
주신들은 백신전의 모든 신들을 출격시켰고 드네르바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비교적 세계수가 뿌리를 내린지 얼마 되지 않은 차원 ‘제이드’에 가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
우우웅-
그때, 그녀의 아공간에 들어있던 마력구가 신호를 보냈다.
“···김우진?”
하필 이 타이밍에?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고 통신구를 받았다.
- 연락은 처음이군.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함부로 통신하면 들키는 거 몰라?”
- 백신전의 신들은 대부분 밖으로 나갔다고 들었는데?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설마 나 말고 또 누구 심어놓은 거 아니야?”
그의 말대로였다.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백신전이 아니라 제이드로 가기 위한 중간지였다. 주변에 신이라고는 그녀뿐이었다.
- 네가 알 필요 없다. 그것보다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 * *
“차원을 수색하는 신들을 습격하자고?”
알베니우스가 턱을 긁었다.
“그건 너무 무리수가 아닐까? 지금의 백신전을 표현하자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고슴도치나 다를 바가 없는데.”
“그러니 더욱 더 이런 상황에서 자신들을 습격할 거란 생각은 못할 겁니다.”
“그것도 그렇긴 한데···.”
그만큼 예민해서 자칫 잘못하면 들키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신들이 지금까지 알베니우스를 잡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공간과 차원 이동에 한정하면 그의 능력이 주신 이상이기 때문이다.
알베니우스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히 은밀하게 행할 수 있다.
“저놈들은 마물들을 이용해 세계수를 습격할 거고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짐작하고 있다는 것을 저놈들도 알고 있겠죠.”
하지만 결코 이쪽에서 선제공격을 나설 것이라고는 생각 못할 거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랬을 경우 반드시 연옥에 다시 한 번 감찰관이 들이닥친다는 뜻이잖아? 그럼 나는?”
“릴리의 품속으로 들어가 있으시겠습니까?”
“세계수는 만능이 아니야! 특히 저 어린 세계수에게는 한계가 명확하다고!”
“농담입니다. 나름의 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대비? 무슨 대비?”
“다른 신을 어떻게 잡아왔느냐고 물으셨었죠?”
“그랬지.”
“두리쉬마님을 만나고 왔었습니다.”
두리쉬마를 만나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백신전이 연옥을 습격하기 위해 마물들을 이쪽으로 이끌 때, 그들을 폭주시켜버릴 수 없냐고.
그들을 단순히 연옥으로만이 아닌, 신들의 권역으로 보내버릴 수는 없냐고.
저들의 수를 역이용해 저들의 살을 깎아먹는 방법이었다.
“그럴 듯 하군. 두리쉬마의 대답은?”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단순히 폭주시키는 것이라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애초에 백신전은 마물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게 아니다. 빛인 아카식 레코드의 사도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어둠을 지배할 권능 같은 건 없다.
그저 그들의 본성을 조금 이용하여 유도할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마물들이 조금의 변수를 일으켜봐야 두리쉬마가 개입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저들이 알 도리가 없다.
“그 과정에서 마물들은 수많은 차원들을 덮치게 될 겁니다.”
작정하고 김우진의 가드를 뚫어내고 세계수를 뽑으려고 할 거다. 그렇게 모인 마물들이 적을까? 그 수준이 낮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러니 기회다.
그들이 분산되어 신의 권역을, 사방으로 흩어진 신들을 습격하는 동안 우연한 사고로 신 한두 명 쯤은 사라질 수도 있지 않겠는가.
“특히 보다 강한 마물들을 포함시켜 당위성을 만들어주겠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두리쉬마가 있음을 드러내게 될 텐데?”
마물 사태로 신이 실종되었으나 죽지는 않는다. 김우진은 당장 신을 죽일 생각이 없으니.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의심을 산다. 신이 자의적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할리는 없으니 백신전은 누군가 개입했다고 여길 거다.
“높은 확률로 너를 찝을 거고, 그럼에도 아무 것도 드러나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어둠의 사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둠의 사도가 지성을 가진 존재인 것은, 두리쉬마인 것은 모르겠지만 특별히 강한 마물이 등장했다고는 여길 수 있다. 최대한 빨리 토벌해야 한다고도.
“어차피 두리쉬마님은 들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신들이 칼카르의 죽음을 쫓고 있다. 신 하나가 더 실종되었으니 두리쉬마는 들킬 수밖에 없다.
“어차피 들킬 거, 감수하고 이쪽에 적극 협조해주기로 했습니다. 저쪽의 신을 빼앗아 이쪽의 신으로 만드는 것에 꽤나 흥미를 느끼셨다고 할까요?”
“···그렇군. 그래도 아직 하나가 남았어.”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알리바이입니다.”
김우진이 아니라면 단 한 명도 살아가지 못했을 거란 생각은 못할 테니까.
“그것도 일리가 있긴 한데.”
“좋은 기회입니다. 때마침 실험해 볼게 있으니 겸사 겸사 일을 벌려보죠.”
“실험?”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별 필요가 없지만 훗날 신들을 속이기 위해 대비해 놓은 게 있거든요.”
부소장이다.
“부소장?”
“도플갱어입니다.”
“···도플갱어였다고?”
“말했잖습니까. 저도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이론상으로는 신들도 가능한데 일단은 어디까지 속일 수 있나 확인해 볼 기회입니다.”
어쨌든.
“연옥의 대비는 그쯤하고, 균열이 벌어지는 순간이 저희가 움직여야하는 순간입니다.”
세계수를 끝장내기 위해 준비한 신들의 한 수가, 자신들의 발목을 자를 것이다.
* * *
“백신전이 이렇게 고요한 게 얼마만인지.”
우주를 보며, 베리안은 술잔을 기울였다.
빈 잔을 내밀자 다시금 채워졌다.
“향이 좋군. 세계수의 수액으로 만든 건가?”
“예, 그렇습니다.”
“세계수, 세계수라. 참 계륵이야.”
세계수는 분명히 잘 이용만하면 쓸만한 놈들이다.
자신이 뿌리 내린 차원을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발악하는 나무들은 결코 어둠이 될 수 없으며 좋든 싫든 백신전에 협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이 자신의 차원 내에서 신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되고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뿌리가 닿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순수한 협력자가 노련한 정치꾼이 되고 감히 백신전을 상대로 거래를 제안한다. 우호적으로 대하니 머리를 밟고 기어오르려 한다.
“주제를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필요한 자들이 아닙니까?”
“그래, 그렇기에 놈들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순히 종말을 막는데 협조하는 차원이 아니다. 세계수는 차원의 마나의 농도가 짙고 순수하게 만들며 이는 태생적으로 강한 피조물들이 나올 수 있게 한다.
그래서다. 용사들 중 태반의 출신이 세계수가 있는 차원인 것은.
세계수는 아주 훌륭한 용사 공급원이다. 그들을 자르는 것은 자충수를 두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를 넘었습니다. 감히 김우진에게 씨앗을 넘기다니.”
“본보기를 보여야겠지.”
아무리 세계수가 강하다고 한들 결국 한 차원에 하나뿐이며 움직일 수도 없다. 백신전이 작정하면 세계수를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이 아니었다.
애초에 세계수들은 백신전을 이길 수 없다.
베리안이 술을 한 모금 음미했다. 잠시 우주를 감상하다 입을 열었다.
“알비츠는 어디 있지?”
“마물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수는?”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다고 합니다.”
“저 녀석도 작정했군.”
“김우진이 그만큼 문제를 일으켰다는 뜻이겠지요.”
“옳은 소리다. 놈은 지나치게 설쳤어.”
허나, 아무리 그래도 신으로서의 체통조차 지키지 않다니.
“알비츠. 꽤나 조급한 것 같군.”
칼카르가 죽었으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것이다.
백신전은 이 우주에서 우뚝 설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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