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72. 연옥의 알베니우스 >
- 조자
“뭐?”
평소처럼 릴리를 쓰다듬으며 힐링하고 있었다.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숲의 향기, 은은한 숲의 정기까지.
릴리는 김우진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특효약과 같았다.
- 조자.
그런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중, 릴리의 입에서 평소처럼 ‘삐삐’가 아니라 부정확하지만 인간의 언어가 나왔다.
잘못 들었나, 귀를 후볐으나 릴리는 다시 한 번 반복했다. 김우진이 다급히 양 손으로 그녀를 붙잡고 눈을 맞췄다.
“···릴리야, 방금 네가 말한 거니?”
- 삐.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나온 말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으나 그녀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다.
“뭐라고 한 거야?”
- 조자.
“조자?”
- 조자.
릴리의 날개가 김우진을 가리킨다. 무슨 뜻일까.
“내가 조자라고? 설마 고자는 아니지?”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 조자니.
한 글자가 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때였다.
“앗, 어머니 나무님! 너무하세요!”
구속구가 풀려 자유로워진 하이엘프가 방정맞은 목소리로 달려왔다.
“처음으로 내뱉은 인간의 말이 율리아가 아니라 소장님이라니!”
“···소장?”
“네. 이걸 이해 못하셨어요? 누가 들어도 소장님인데?”
“정말이야?”
- 삐!
자식이 처음으로 엄빠를 외쳤을 때 부모님의 감정이 이러할까.
밀려오는 감동에 김우진이 자신도 모르게 릴리를 끌어 앉았다.
“어머니 나무님! 저도, 저도! 제 이름도 불러주세요!”
- 기재이.
“귀쟁이라뇨! 그런 엘프차별적인 발언은 옳지 않아요! 대체 세상에 어떤 세계수가 하이엘프한테 그런 말을 해요!”
- 기재이.
“꺄아아악! 이건 꿈이야!”
정신 사납군. 율리아가 나뭇가지 위에서 귀를 막고 버둥거리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 조자, 여라.
“소장님한테 연락이 왔다고요?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이신가요? 어머니 나무께서 뭐라고 하시나요?”
- 삐삐삐, 삐삐이이이, 삐삐.
거기서부터는 김우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다. 실시간으로 굳어가는 율리아의 얼굴과 눈빛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이드람에 문제가 생겼나?
지금 알베니우스가 거기 있을 텐데?
“무슨 일이지?”
“···신이 차원을 방문했대요. 반역자를 찾는···.”
번쩍, 공간이 갈라지면서 누군가 툭 떨어졌다.
“나 좀 숨겨줘.”
알베니우스였다.
* * *
“드세요.”
“고마워.”
알베니우스가 김이 모락모락나는 차를 한 모금 삼켰다.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새로운 전직 용사들을 찾기 위해 데이드람을 떠나려는 순간, 신이 나타났어. 반역자를 찾고 있다고 했지.”
“반역자라면 당신?”
“특정지어 나라고 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누구 봐도 나였지.”
“잡혔습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 마라. 잡혔으면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알베니우스가 인상을 구겼다.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나를 자신의 품으로 숨겨주었다. 덕분에 놈의 이목을 피했고 다행히 물러갔지. 하지만 더 이상 그곳에서 장기적으로 몸을 숨길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놈들이 작정을 했어.”
세계수와 백신전은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다.
오랜세월 이어져온 존중을 깨트리고 들이닥칠 정도라면, 저들이 세계수와 알베니우스의 유착을 눈치 챘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 건덕지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아무래도 릴리를 들킨 게 문제가 된 것 같군요.”
“그렇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세계수의 씨앗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고 생각할 리는 없으니.”
“그래서 여기로 왔다는 겁니까?”
“데이드람의 세계수와 다른 세계수들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신들이 세계수가 있는 차원들을 본격적으로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는군. 몸을 숨길만한데가 마땅치 않아.”
“그리고요?”
“감찰관이 오지 않는 이상, 이곳만큼 안전한 곳도 없으니까. 하물며 감찰관이 오려면 반드시 하루 전에 통보를 해야하니까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여유도 생기고.”
“한 가지 전제가 틀렸죠. 제가 무조건 당신을 머물게 해줄거라는 착각.”
“···날 쫓아내겠다고? 널 위해 281명의 전직 용사들을 준비해놨는데?”
“그게 왜 저를 위해서입니까?”
“내 일이 네 일이니까. 어차피 너나 나나 백신전과는 한 우주 아래 살 수 없는 몸이잖냐.”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드래곤이라는 놈들은 양심이란 걸 가지고 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런데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게 더 문제였다.
“근데 그자들은 들키지 않는 겁니까?”
“아마도.”
“아마도?”
“모두 종말 차원에 있어. 종말 차원에서 마물이나 잡으면서 격을 쌓으라고 했지. 신들이 거기까지 수색한다면 또 모를까 아니라면 괜찮을 걸?”
“두리쉬마님에게 말씀을 드려놔야겠군요.”
“말은 이미 했으니 걱정 마.”
“일단은 알겠습니다만, 잘 숨어다니셔야 합니다. 죄수들 중에서는 관리자놈들의 첩자들도 있어서.”
“첩자가 있는데 저렇게 자유롭게 풀어놓는다고?”
알베니우스의 시선이 닿은 창문 너머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죄수들이 보였다.
“저들은 알베니우스님처럼 관리자들과 같은 우주 아래 있을 수 없는 이들입니다.”
“율리아에 비견될만한 자들이 몇 보이는데.”
“그래서 저들이 신격을 얻을 수 있도록 도울 생각입니다. 두리쉬마님과 함께.”
“신을 잡아두었다고 원하는 시기에 죽이겠다는 걸로 들리는데 그게 쉬울까?”
“이미 두 놈 잡아놨습니다.”
“···두 놈? 한 놈이 아니라?”
베른을 잡은 것까지는 알베니우스도 알았다. 그런데 어느 틈에 한 놈이 늘었지?
“운이 좋았습니다.”
“신이란 게 단순히 운이 좋다고 잡을 수 있는 건 아닌데.”
“설명하자면 깁니다.”
“그럼 나중에 듣지. 잠깐 연옥 좀 구경하고 있어도 되겠지?”
“괜히 사고치지 마십쇼. 신들이 언제 수작을 부려올지 모르니까 더욱 더.”
“넌 누굴 사고뭉치로 아는 거냐. 누가 보면 내 보모인 줄 알겠어. 내가 너보다 수백배는 더 오래 살았다.”
알베니우스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사고뭉치지.”
김우진이 커피를 음미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차원용을 등 뒤에 두고 신들과 대적하던 그때.
당시 차원용은 신들의 눈을 피해 여러 차원을 도망치고 있었다. 우연히 김우진과 만났고 신들의 이면과 이 세계의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용사로서 소환되었던 최악의 차원, 글라크를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숨기고 있던 힘이 드러나 신들에게 포착되었고.
그러니 그때의 일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은혜는 열 배로, 원한은 백 배로 갚는 게 그의 철칙이니까.
“의도한 건 아닌데 점점 연옥이 본거지처럼 되어가는군.”
언제 또 다시 감찰이 올지 모르니 미리미리 대비를 해놔야겠지.
“알베니우스가 있으니 은밀하게 신들의 권역을 공격해 신들을 납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차원용인 그의 권능은 공간과 차원에 한정하면 주신 이상이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차원과 차원을 은밀히 오가는데 알베니우스보다 능숙한 자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잠깐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그러고 보니 신들이 알베니우스를 잡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했잖아?
“기회인데?”
* * *
“알베니우스? 그 자가 네가 그렇게 말한 알베니우스라는 차원용이라고?”
“네, 맞아요.”
“신에 필적하는 자였다.”
“알베니우스님은 신의 힘을 다룰 수 있으니까요.”
“차원용이라. 싸워보고 싶군.”
“짐승처럼 굴지 마세요.”
“나는 짐승인데?”
“혹시 독룡입니까?”
“차원용은 독을 다루지 못해요.”
알베니우스의 등장은 연옥의 죄수들에게도 화제였다.
율리아를 이곳으로 집어넣고 세계수를 심게 한 장본인. 신들에게 대적하는 대적자.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신을 증오하는 만큼, 그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알베니우스는 어떤 분인가?”
“음, 그냥 알베니우스님인데요.”
“드래곤다운 위엄이 있다거나, 탐욕이 많다거나 하는 건?”
“딱히 위엄 같은 건 없어요.”
“드래곤이?”
“드래곤보다는 친구 같다고 할까요···?”
“그래, 옳은 소리다.”
공간이 갈라졌다. 집무실에 있어야 할 알베니우스가 걸어나왔다.
“차원용이라고 해서 딱히 권위를 세울 생각은 없다. 어차피 신과 같은 우주 아래 살 수 없는 건 다 마찬가지인 처지니까.”
그의 등장에 시끄럽던 죄수들이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럽게 풍겨오는 위압감과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당신이 알베니우스입니까?”
데르카인이 대표로 앞으로 나섰다.
“맞다. 너는 드워프로군.”
“예. 그렇습니다.”
“연옥에 갇힌 최장수 죄수가 드워프라더니. 너인가 보군.”
“맞습니다. 300년을 갇혀 있었지요.”
“드워프에게 300년은···.”
“차원용이 나타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복도로 뛰쳐나왔다. 소지, 베르너였다.
“너는?”
“당신이군요! 안녕하십니까, 저는 이 연옥의 소지, 베르너 레트만이라고 합니다. 소장님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신들과 대적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렇다면 아군이군.”
“맞습니다! 저는 아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소한, 아주 사소한 부탁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같은 아군으로서.”
“부탁?”
“도마뱀은 꼬리가 잘려도 재생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뭐라고? 감히 위대한 차원용인 나를 도마뱀 따위와 비교하는 거냐!”
“물론 그건 아닙니다. 감히 비교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냥 제 말은···.”
추릅, 베르너가 입맛을 다셨다. 자신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섬뜩한 시선에 알베니우스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꼬리를 조금만 잘라주셨으면 하고···.”
“미, 미친 건가?”
“드래곤은 한 번 요리해 봤습니다만, 극상의 진미였습니다. 헌데 일반적인 드래곤보다 상위 존재라는 차원용은 어떨지 너무 궁금해서···. 어차피 닳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내 꼬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닳는 거다!”
“다시 재생하지 않습니까. 도마뱀처럼.”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너에게 꼬리를 때어줄 이유는 없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꺼져라! 뭐, 이런 개 같은 인간이!”
알베니우스가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벌렸다. 베르만이 그 뒤를 따랐다. 둘의 인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죠? 방금 무슨 일이···?”
“드래곤을 잡아서 조리해 먹었다더니 진짜였나.”
“미식에 미친 줄은 알았지만 저 정도일 줄이야.”
“궁금하긴 하군.”
크흠, 타르칸이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 고기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건 확실히.”
“독까지 있으면 더 좋긴 할 텐데 말입니다.”
“지금 다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저분은 고귀한 차원용이라고요!”
“그러는 자네는 신격을 얻은 신 아닌가. 차원용보다는 신이 더 고귀하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데르카인의 말에 율리아는 반박할 단어를 찾지 못했다.
“하물며 소장은 신도 때려잡는 괴물이지. 신들과 대적한 계획을 짜고 소장과 친한 존재라고 하지만 그뿐, 차원용이라는 이름이 주는 대단함은 딱히 없네.”
연옥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위대한 차원룡조차 일개 도마뱀에 불과했다.
“그나저나 베르너가 미친 줄은 알았지만 저건 좀 심하긴 하군. 꼬리를 잘라달라니.”
데르카인이 혀를 찼다.
누구드 그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침 한 방울을 지적하지 않았다.
* * *
“저게 차원룡.”
디아네가 집행자로 있을 때, 자주 들었던 이름이다.
새로운 신격의 탄생에 대비해 제거해야 할 종족 중 하나. 아니, 유일하게 살아남은 제거 종족 중 하나.
“주신과, 아니 소장님과 친분이 있다니.”
그렇다니 다 이해가 갔다. 소장께서 보살펴 주시니 가짜들이 기를 쓰고 발악을 해도 찾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디아네의 신앙이 더 깊어졌다.
“신이라.”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영약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차원용과 추격전을 벌이는 소지라는 자가 준 것이었다.
영초를 정제해 극한의 효율을 뽑아낸 영단.
소장께서 말씀하셨다.
그녀가 신격을 얻도록 할 테니 함께 노력하자고.
“나를 신으로···!”
베른은 오히려 그녀를 경계했었다. 아낄지언정, 신격을 얻어 자신의 경쟁자가 될까, 적당한 선을 지켰었다.
그런데 주신께서는 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신이시여.”
당신께서 바라신다면 기꺼이 신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나이다.
당신의 방패가 되어 당신을 지키고.
당신의 창이 되어 저 오만한 가짜들을 찢어발기겠나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당신의 곁에서 새로운 백신전을 만들겠나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자 하는 욕심이 없다면 거짓이었다. 허나, 그것 또한 신께서 바라시는 일이니.
그녀는 확신했다.
김우진은 반드시 저 우주의 정상에 설 것이라고.
그녀는 바랐다.
그때,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이 자신이 되기를.
가장 가까이서 신을 모실 수 있기를.
꿀꺽, 영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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