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71. 반역자 >
“오늘 아침은 가벼운 빵식입니다! 빵이랑 따끈따끈한 스프!”
드르륵, 베르너는 카트리지를 밀며 죄수들에게 음식을 보급했다.
“고맙군.”
“고마워요.”
“별말씀을.”
죄수들의 인사를 받으며 돌아다니니 새삼 연옥이 많이 바뀌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가장 간단한 분위기부터, 그들의 비어버린 목까지.
확실하게 소장의 편이 되어버린 죄수들은 더 이상 구속구를 착용하지 않는다. 죄수로서 죄수의 대우를 받지도 않는다.
‘그럼 여긴 감옥이 아니라 여관 같은 건가.’
이유는 안다. 다른 죄수들과 크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를 모를 만큼 둔하거나 멍청이는 아니었다.
‘신과의 전쟁이라.’
스케일이 너무 커지니 무어라 반응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에게도 신에 대한 증오는 있었다.
기껏 차원을 구했더니 힘을 포기하라고 토사구팽하려 했으니까.
하지만 분노는 금세 무뎌졌다. 온 차원의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이 감옥이 얼마나 천국 같은 곳인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른 죄수들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그에게는 그랬다. 전투, 용사의 힘 이런 것에는 크게 관심 없었다.
그저 보다 맛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 먹고 싶다. 보다 많은 식재료와 여러 조리 방법을 연구하여 궁극의 맛을 추구하고 싶다.
그게 전부다.
굳이 신들의 싸움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도, 그들을 이겨 무언가를 이루어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소장님과의 면담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말로 백신전에는 그런 게 있다는 겁니까?”
“그래. 내가 아는 것만 몇 가지가 되는데 반도 복숭아라고 반도원이라는 특별한 곳에서 자라는 복숭아, 신들만 먹고 마신다는 암브로시아와 넥타르, 영생을 주는 청춘의 황금 사과 같은 것들.”
“황금 사과···.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당연하지. 신들이 자신들만 먹는 건데 일개 피조물인 네가 알 턱이 있나.”
“과연···!”
“그 맛은 천상의 진미라는군. 한 번 맛 보면 다른 음식은 못 먹게 될 정도로.”
“그 정도입니까···?”
꿀꺽, 베르너가 마른 침을 삼켰다.
“소장님은 드셔보신 적 있으십니까?”
“놈들이 어찌나 까다롭게 굴던지 직접 먹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보고 향을 맡아본 적은 있지.”
“어, 어땠습니까?”
“반도 복숭아는 탐스러운 분홍빛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과일이라기보다 보석에 가까웠지. 그만큼 아름다우면서도 달큰한 향을 풍겼다.”
“보석과도 같은 복숭아···.”
“넥타르는 놈들이 먹는 음료다. 신비한 벌의 꿀과 여러 가지를 섞는데···.”
“단순히 희귀한 재료로 만든 음료가 아니라 아예 신들의 요리 제조법이라는 겁니까? 하겠습니다!”
베르너가 덥썩, 김우진의 손을 잡았다.
“백신전을 무너트리면 그것들을 전부 취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신이라는 이름으로 놈들이 독점하고 있으나 난 그럴 마음이 없다. 네가 충분한 도움을 준다면 네게 주지 못할 것도 없지.”
“합니다. 무조건 하겠습니다. 아니, 하게 해주십시오! 제발 저를 그 거사에 끼어주십시오!”
베르너가 무릎을 꿇었다.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에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널 끌어들인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백신전과의 전쟁은 죽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식을 위해서 목숨을 거는 것은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입니다. 고래를 먹기 위해 폭풍우를 헤치고, 새로운 맛을 위해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는 건 평범합니다.”
“상대는 신이다만.”
“상대만 다를 뿐, 과정과 결과는 같습니다. 신의 미식을 위해 상대의 수준이 올랐을 뿐.”
흡사 디아네를 보는 것 같아 김우진은 데자뷰를 느꼈다.
‘이놈도 따지고 보면 광신도긴 하지.’
그 대상이 신이 아니라 음식이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미식이라는 건 소수가 독점해서는 안 됩니다.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지고 모두가 그 맛을 알아 그 위대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굳이?”
“적어도 제게 미식이란 건 혼자서만 즐기기 위한 게 아닙니다. 요리사는 결국 타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자기들만 독점하는 신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아니, 모두가 먹게 해야지요!”
“···뭐, 알아서 해라.”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런 의미에서 네가 할 것이 있다.”
“뭡니까?”
김우진이 영약들을 내밀었다.
“이것들을 영단으로 만들어라. 사람에 따라서 더욱 흡수가 잘되도록 맞춤으로.”
“영단을 제작하는 것 또한 요리의 일종. 그건 제 전문 분야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권능을 써.”
“그래도 됩니까?”
“이제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알겠습니다.”
베르너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 * *
“뿌리를 뽑아야합니다.”
백신전의 신 하나가 소리쳤다.
“저희가 세계수와 협력을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이 세상을 위하는 마음이 기껍기 때문이 아닙니까? 헌데 연옥에 씨앗을 뿌리다니요!”
세계수의 씨앗은 결코 가볍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체가 된 세계수가 작정하고 만들어내는 것. 우연히 연옥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백신전은 분노했다. 세계수 중 누군가가 김우진과 협력하고 있다는 게 아니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세계수들을 추궁하고 연옥 세계수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맞습니다!”
신들이 하나둘 동조했다. 알비츠가 탁자를 두들겨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김우진이나 연옥의 죄수 중에 신위를 얻은 자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나 세계수는 확실히 큰 문제다. 허나, 김우진 또한 세계수가 들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며 공식적으로 우리에게는 세계수를 뽑을 권한이 없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을 상기한 신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수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김우진이 세계수를 가지고 무슨 짓을 할지, 생각만 해도 무궁무진 했다.
“해서 마물들을 이용해 연옥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다. 그 과정에서 세계수가 불타는 것쯤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그러면 되겠군요!”
“하지만 세계수는 부차적인 문제다.”
자라난 세계수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세계수라는 게 어디 하루이틀만에 자라나는 식물이던가.
성체가 되기 위해서는 못해도 천년이 걸리는 나무다. 아무리 김우진이 무슨 짓을 해서 단축시킨다고 해도 100년은 걸릴 거다.
그러니 뽑는 건 뽑는 거고 당장의 우선순위는 아니다.
“연옥에는 신위를 가진 자가 없었다. 그리고 현재 집행자들과 피조물들을 이용해 모든 차원들을 뒤지고 있지만 신위를 가진 자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애초에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신위를 가진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까.
“연옥이 아니라면 가능성은 하나다.”
신들의 손아귀에서 잘도 빠져나가는 미꾸라지 같은 놈.
“알베니우스.”
“하지만 놈은 이미 신격을 얻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거부하리라고 장담하나?”
“그건···.”
아카식 레코드가 다시 한 번 권유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다.
“무엇보다 신격이 아니더라도 놈은 칼카르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
알베니우스를 찾아 떠난 칼카르가 죽어버렸으니까.
“그뿐일까.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을 어디서 얻었으리라 생각하는 거냐.”
세계수의 씨앗이라는 게 그리 흔한 물건일까? 절대 아니다. 세계수가 작정하고 만들어낸 정수가 씨앗이다. 연옥에 가만히 있어서는 절대 그걸 구할 수 없다. 누가 가져다 주지 않고서는.
“알베니우스가···!”
“김우진과 그 도마뱀이 이미 접촉했군요.”
“더 있다.”
그때, 베리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알베니우스를 찾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다. 허나, 알베니우스의 흔적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신을 따르는 피조물들과 집행자들을 동원해 가능한 모든 차원을 수색중임에도 만족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당연하다. 정작 놈이 있는 곳을 제외하고 수색을 시작했으니.”
“그 말씀은?”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다. 연옥에 세계수의 씨앗이 있다면 그것을 넘겨 준 세계수가 있겠지. 알베니우스는 중간 연락책일 뿐, 놈들의 편에 가담한 세계수가 있을 거다. 아니, 반드시 있다.”
세계수 중에 백신전을 배신한 자가 있다.
“······!”
“···그런!”
“하지만 세계수들이 구태여 저희를 배신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애초에 우리와 단순한 협력 관계라고 여기는 자들이다.”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대우를 해주는 것임에도 주제를 모르지.”
허나, 그 대우와 자비도 이제는 끝이다. 알베니우스를 숨겨주는 세계수가 있다면, 김우진에게 씨앗을 넘긴 세계수가 있다면.
“반드시 뿌리를 뽑아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지.”
감히 백신전에게 반기를 든 값은 비싸다.
“가라.”
지금부터 알베니우스를 찾아라.
“목표는 세계수들의 차원이다.”
* * *
“생각보다 잘 풀린 거겠지?”
- 그런 거겠죠.
차원 데이드람. 세계수의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알베니우스가 턱을 괴었다.
“김우진, 내 생각보다 더 강해졌어. 이제는 나 같은 놈은 열 명이 있어도 안 될 것 같던데.”
- 열 명이 뭐야. 백 명도 안 될 것 같던데.
“아무리 그래도 나도 차원용이다.”
- 그래서 아예 김우진에게 다 맡겨 놓을 생각?
“두리쉬마도 나보다는 김우진과 관계가 돈독해진 것 같고, 죄수들도, 율리아도 김우진을 중심으로 돌아가니 어쩔 수 없지.”
- 다 당신이 준비해온 거잖아?
“시작은 내가 했지만 내게는 끝마칠 능력이 없어.”
알베니우스는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용이었다.
그는 분명히 강하다. 드래곤 중에서도 특별한 차원용이고 오랜 세월 살면서 높은 격을 쌓았다. 아카식 레코드에게 신위를 제안 받은 것이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백신전의 신들과 김우진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백신전의 신들이다.
“나는 내 주제를 잘 알아. 김우진의 뒤를 받쳐주는 게 내 역할이야.”
그러기 위해서 김우진을 찾았다. 그는 아직도 잊지 않았다. 두 신을 죽이고 자신을 도망치게 해주었던 그 절대자의 위엄을.
“애초에 내가 왜 이 짓을 하는데? 좀 편하게 살고 싶어 서지.”
신에게 더 이상 쫓기기 싫어서. 누구 한 쪽이 무너지지 않는 이상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불꽃을 태우는 거다.
그에게 그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신위고 나발이고 그런 거창한 꿈같은 건 없는 소박한 드래곤이었으니까.
- 차원용이 지나치게 소박한 거 아니야?
- 벌인 일에 비례해서도 그렇고.
“수천년을 쫓겨 봐. 자연스럽게 이렇게 돼.”
복수고 나발이고 그냥 평안한 삶을 꿈꾸게 된다.
- 그렇게 되면 김우진을 이용하는 거잖아?
“어차피 김우진도 나랑 같아. 백신전과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처지가 됐다는 거지.”
그러니 둘은 손을 잡을 수밖에 없고, 손을 잡았다.
“다시 가봐야겠어.”
끄응, 알베니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아직 신에게 원한을 가진 전직 용사들은 넘쳐나니까.”
비록 신에게는 큰 타격을 주지 못할지 몰라도 적어도 신들과 싸울 때, 집행자들이 끼어들지 못하게는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때였다.
- 멈춰.
참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차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가 있어.
- 이건 신···!
- 당장 숨어!
가지와 뿌리가 알베니우스를 삼켰다.
세계수가 차원의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여. 정식으로 인사하지, 백신전의 도인크라고 한다.”
- 데이드람의 세계수. 이름은 딱히 없단다.
- 백신전의 높으신 분이 왜 이런 변방까지?
“흔적을 쫓아왔다.”
- 흔적?
“백신전이 오랫동안 쫒던 반역자가 있다. 헌데 너희 세계수들이 그 반역자를 감싸주고 있는 정황을 발견했다.”
- 반역자?
- 우리가 반역자를 숨겨주고 있다고?
“그래.”
도인크의 눈이 가라앉았다.
“허니, 세계수. 그대가 놈을 숨기지 않았다면 순순히 협조하도록. 그렇지 않다면 백신전에서 너희들에게 내려주던 자비는 끝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