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67. 새로운 신 >
그것은.
신의 힘이었다.
우주의 힘이었다.
율리아는 부유감을 느꼈다.
그녀의 영혼이 차원을 넘어 우주 곳곳을 누볐고 엄청난 고양감이 전신에 가득했다.
‘아.’
수많은 별들이, 수많은 우주들이 보였다. 그것들이 빠르게 지나쳐졌다.
그녀의 의지로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이끌림이 그녀를 인도했다.
왜 인지 모르지만 반드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당도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우주의 중앙에, 우주를 관통하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빛의 기둥을.
온 몸에 전율이 일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샘솟았다. 그녀는 그것을 처음 보았으나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아카식 레코드. 이 세상을 이끄는 거대한 의지.
그녀를 이곳으로 인도한 주체였으며.
‘아.’
그녀에게 막대한 힘을 부여하고 있는 주체이기도 했다.
그 의지가 전해졌다.
‘힘을 받아들이겠냐고요?’
아카식 레코드에게 힘을 받는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이전이면 아무 것도 몰랐겠지만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와, 알베니우스와, 김우진과 엮이면서 보다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아니, 굳이 그들과의 경험이 없어도 되었다.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가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해주고 있었으니까.
‘신.’
율리아는 그 달콤한 과실에 혹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아.”
어느새 우주는 사라져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차원용과 어머니 나무의 정령, 그리고 감옥의 소장만이 있을 뿐.
하지만 온 몸에 넘쳐나는 고양감과 전능감, 우주의 힘, 그리고 보다 정순해진, 단단해진 육신은 방금의 경험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했다.
“···어.”
그럼에도 쉽게 믿을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제가 신이 된 건가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 * *
아흔 여덟의 신들이 모였다.
아흔 여덟. 그 숫자가 주는 의미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특히나 그 공석 중 하나가 백신전의 가장 상석에 위치한 세 자리 중 하나라면.
“······.”
“······.”
“······.”
살을 애는 듯한 무거운 침묵에, 자리한 신들 중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칼카르가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쫓아 사라진 지도 벌써 3주가 다 되어 간다.
상식적으로 주신인 그가 도망치는 것 외에 별 다른 능력이 없는 도마뱀을 3주 동안 잡아오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모든 신이 살아 있는데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을 리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군.”
알비츠가 무겁게 중얼거렸다.
“칼카르가 죽었다.”
“···주신께서.”
“···말도 안 됩니다! 베른, 베른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같은 신이라고 한들 주신과 말단의 신은 그 의미가 다르다. 그들은 차라리 베른이 죽은 것이기를 바랐다.
“김우진이 이제와서 그런 짓을 한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하지만 어떻게?”
“대체 누가 주신을 죽인다는 겁니까?”
단순히 짐작하는 것과 주신이 확답을 내려주는 것은 다르다. 신들이 경악했다.
신이 죽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지만 주신은 그중에서도 의미가 남달랐다. 최초의 3신. 백신전의 시초. 그들의 격은 일반적인 신들과는 차원이 다른 신 중의 신이었다.
그런 주신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죽었다는 것은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칼카르는 18일 전,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쫓아 차원의 변방으로 향했다.”
차원의 변방. 종말을 막는데 실패하여 모든 생명체가 죽고 소멸을 맞이하는 차원들.
아카식 레코드의 가호가 사라진 차원들은 점차 중앙에서 멀어지고 소멸해간다.
신들의 관심과 관리에서 멀어지고 마기가 가득하게 되니 자연스레 마물의 군단들이 똬리를 튼 험지.
“아무리 변방이라고 할지라도 주신께서 문제가 생기실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알베니우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차원이동을 어지간한 신보다 더 잘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출 난 능력이 없는 그놈이 주신을 죽일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신들의 말에 알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소리다.”
그 또한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는 것을 안 시점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101번째 신을 선택한 게 아닐까? 하는 가정을 세웠다. 하지만 고작 알베니우스를 잡으러 간 칼카르가 죽지 않고서는 18일이 지나도 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연락이 안 될 리도.
결국 그가 죽었다는 것을 간신히 납득하고 난 뒤, 어떻게 죽었는지 최대한 말이 되는 가정들을 덧붙였다.
“그렇게 나온 가능성은 세 가지다.”
알비츠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변방의 차원들은 시간이 지나 차차 소멸된다. 칼카르에게 위치를 발각당한 알베니우스가 여러 변방의 차원들을 돌아다니며 도주극을 찍다가 우연찮게 소멸 직전의 차원으로 들어가 함께 소멸했을 가능성.”
그게 하나다. 차원의 소멸은 신인 그들조차 어쩔 수 없는 우주의 법칙 중 하나니까.
“알베니우스가 갑자기 미치지 않고서야 위험한 변방 차원으로 갈 이유가 없다. 갔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며 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대응하기 위해 마물들의 손을 잡는 것이라 생각한다.”
어둠과 마는 백신전에 대적하는 절대적인 세력이다. 그들은 어둠의 의지에 이끌린 파편으로 백신전처럼 이렇다 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는 않지만 알베니우스가 복수심에 미쳐 자의적으로 어둠에 귀의했다면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그것이 두 번째다.
하지만 이건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았다. 왜냐하면 김우진과 맺은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이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알베니우스는 김우진과 연관이 있다. 따라서 김우진을 불러 함정을 판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세 번째.
“하지만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주신을 이길 수 있을 리는 만무합니다.”
“도마뱀놈이 어둠의 사도가 되었다고 주신을 이기는 그림 또한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신들의 반박에 알비츠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울려퍼지는 소리에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다 가정이라고. 애초에 칼카르가 죽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가정들 또한 믿기 쉬울 것 같으냐.”
애초에 가정을 생각해낸 당사자인 알비츠조차 스스로 뱉으면서도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주신의 언성이 높아지자 신들이 고개를 숙였다.
“베리안, 네 생각은?”
“네 가정들이 그나마 현실성이 있다. 어디까지나 그나마지만. 어이가 없군.”
베리안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가정들이 현실성이 있다니.
“원인을 명확하게 찾아내야 한다. 만약 칼카르가 살해당한 거라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어야 한다.”
“당연한 소리를. 그리고 칼카르가 죽은 원인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신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는데 집행자가 신이 되지 않았다.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하는데는 여러 요소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힘이다.”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데 적합한가.
신의 힘을 받아들일만큼 강한가.
그걸 감안해 신들은 집행자를 기른다. 만약에 대비해 새로운 신이 탄생할 때, 통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게 들어맞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이변이 일어났다.
“신을 찾아야 한다. 찾아서 끌어들이든, 죽이든 해야 한다.”
백신전의 시스템에 순응한다면 일원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추살한다.
과거 우주의 힘을 가진 수많은 종족들을 그랬듯이.
“쉽지 않겠군.”
“어쩌면 쉬울 수도 있다.”
“김우진인가.”
알비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백신전의 집행자들이 아니라면 가능성이 있는 건 역시 연옥의 소장 김우진이다.
“하지만 놈은 과거, 신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아카식 레코드가 이미 한 번 거부한 놈에게 다시 제안했을까?”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우리는 신이지만 아카식 레코드는 아직 완전히 알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고차원적이다. 그 깊은 뜻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설사 김우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김우진의 감옥에 존재하는 죄수들 중, 규격외의 존재들이 있다. 어쩌면 그들 중 하나가 신이 된 것일 수도 있다.
“연옥에 감찰관을 보내야겠군.”
“그것으로 한 번에 두 가지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신과 김우진이 칼카르를 죽이는데 함께 했는지, 아닌지.”
“계약의 제약이 발동하지 않았다. 가정은 했지만 김우진이 범인일 가능성은 낮다.”
“계약에 맹점이 많다는 걸 알 텐데?”
당시 신들은 오만했다. 그래서 계약에 맹점을 이용해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하지만 김우진이 여러 번 맹점을 이용하면서 생각은 변했다.
“단순히 도움만 주고 마무리는 다른 자에게 맡겼을 수도 있다는 거냐?”
“난 그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봐도 김우진이 아니면 칼카르에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없다.”
“확실히. 좋다. 내가 직접 연옥으로 가겠다.”
알비츠의 눈이 가라앉았다.
“만약 칼카르를 죽인 게 김우진이라면 놈은 선을 넘었다. 내가 직접 확실하게 파악하겠다.”
“아니. 너는 백신전을 지켜라.”
베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감찰관으로는 내가 직접 가겠다.”
그가 선언했다.
“놈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아니까.”
* * *
“···골치 아프게 됐네.”
씨부랄.
김우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방금의 일이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이는 이 자리에 없다.
율리아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았다.
그리고 신이 되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백신전의 백은 신들이 아닌 아카식 레코드가 정한 수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데 백 명이면 충분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리 아카식 레코드라고 할지라도 신들을 만드는 건 백 명이 한계이기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백신전은 항상 정원을 유지했다.
정확히는 오래전부터 하나둘 늘어가다가 백 명이 되면서 증가가 멈췄다.
그래서 백신전이 되었고 줄어들면 충원되었을 뿐, 지금까지 그 이상이 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짐작했어야 했다.
주신 칼카르가 죽어버린 이상, 하나의 공석이 생겼고 아카식 레코드가 인원을 충원시키려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게 하필 율리아라니.
물론 그녀가 신이된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적들의 전력은 줄어들고, 이쪽은 늘어난 것이니.
하지만 역시나 시기가 문제다.
“대체 왜 제가 선택 받은 거죠? 백신전의 신들이 자기들끼리 다 해먹는 것 아니었나요?”
“해 먹게 판을 짜고 있긴 하지. 하지만 네가 세계수의 열매를 먹고 한층 진보하면서 판을 엎어버렸지만.”
“네?”
“아카식 레코드가 힘을 부여하는 건 오직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다. 거기에 백신전의 의견 따위는 없어.”
“그래. 맞다.”
알베니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김우진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건 신들의, 그리고 아카식 레코드의 존재를 아는 모두의 짐작이지만 거의 정설로 여겨지고 있지. 아카식 레코드는 공석이 생기면 피조물들 중 가장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를 다음 신으로 선정해.”
백신전의 신들은 모두 그렇게 신이 되었다. 그리고 김우진에 의해 두 명의 신이 죽었을 때, 정확히 그대로 되었다.
신들을 제외하고 가장 빛에 가깝고 강한 자들. 그게 당시 최고의 집행자라 일컫어지던 드네르바와 베른이었다.
그들은 곧장 신이 되었고 신들은 자신들의 가설에 더욱 확신을 가졌다.
“신들이 집행자를 굴리는 이유는 자신들의 수족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유도 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신위를 독점하기 위해서.
상식적으로 집행자들보다 강한 자들은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어머니 나무의 열매를 먹고 어머니 나무의 도움을 받아 완전히 흡수한 제가 지금 존재하는 어떤 집행자들보다 강하다는 거군요?”
“그렇게 되겠지.”
- 단순히 열매를 먹어서는 아니란다. 너는 애초에 뛰어난 아이였으니까.
“그런가요?”
율리아가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러면 저보다 소장님이나 알베니우스님이 신이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거부했다.”
“네?”
“나도 김우진도 김우진의 손에 두 명의 신이 죽었을 때, 드네르바와 베른보다 먼저 권유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은 강제가 아니라 선택이다. 다만, 지금까지 그걸 거부한 이들이 오직 김우진과 알베니우스 뿐이었다.
상식적으로 신이 될 수 있다는데 그걸 거부할 만한 이는 없었다.
“왜···아, 그럴만 하네요.”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죽이며 싸우던 자들이 한순간에 한 팀이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 백신전 쪽에서도 결코 원치 않았을 거다.
“···잠깐만요, 그러면···.”
그러다 문득, 율리아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용사들에게 힘을 포기하게 하고 그러지 않으면 연옥에 가두는 이유가···.”
“네 짐작이 맞아.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 신의 힘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신위에 대한 모든 것을 통제에 두기 위해서.”
그 세 가지가 신들이 연옥을 만들고, 죄수들을 가두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주신이 죽고 율리아가 신이 되었다.
- 백신전이 뒤집어지겠구나.
그래, 다르게 말하면 이건 진짜 큰일 이다.
“···빨리 돌아가야겠어.”
율리아를, 세계수를 숨겨야 한다.
- 율리아를 숨길 방법이 있니?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을 율리아를 숨길 수 있을지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의문이었다.
저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 이상 결코 허투루 확인하지 않을 텐데.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다행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집행자. 그들을 이용한다면 설사 주신이라 해도 숨길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대가로 다른 걸 내줘야겠지만.”
베른의 집행자들을 권속으로 들였다는 것.
뭐, 그 정도야 율리아가 신이 되었다는 것을 숨기는 것에 비하면 싸다.
‘릴리도 확실하지는 않군.’
상황의 심각성을 반추해봤을 때, 주신이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과연 하늘구름이 주신까지 속일 수 있을까?
- 음, 혹시 그게 내가 생각하는 그 방법이니?
“그 방법이 율리아가 미라가 되는 거라면 맞습니다.”
- 불쌍한 아이.
- 네 권속이 되었다는 집행자들은 좋아하겠구나.
- 어쩌면 릴리도.
“···뭐죠. 갑자기 오한이 드는데요.”
“착각이야.”
김우진이 차원의 통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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