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67화 (67/150)

# < 066. 선택 >

“뭐라고?”

잘못 들었나. 김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머리색과 동공의 색이 다르고 기운도 작아졌지만 본질 자체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기가 차는군. 만약에 정말로 그 켄타우로스 놈이 주신의 집행자라면 분명 베리안의 짓이겠군.”

알비츠와 베리안. 남은 두 주신 중 그런 음습한 짓을 할 놈은 베리안밖에 없다.

- 예, 그렇습니다.

“알았다. 일단은 그대로 두도록.”

- 잡지 않는 겁니까?

“자기 주인한테 연락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기만 해라. 그놈만 특별히 감시가 더해지면 의심을 살 테니 다른 죄수들 모두.”

지금은 신들의 모든 계획들이 어그러진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들은 모르지만 기둥 하나가 뽑힌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집어넣었다고 여겨지는 첩자를 굳이 색출해 경계심을 더 올리기 보다는 당장은 두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쪽이 낫다.

- 예.

“아, 지금 놈은 어떻게 하고 있지?”

- 떠나신 그날부터 엘프를 제외한 아홉 명 모두 독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카를로를 잡았지만 아직 첩자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김우진이 차원을 나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아예 독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했었다.

“큰 문제는 없겠지?”

- 예, 물론입니다.

“알았다. 최대한 빨리 복귀하지.”

- 예.

연락이 끊어졌다. 김우진이 혀를 찼다.

단순히 탈옥을 위해 죄수들을 매수한 것을 넘어 자신의 집행자를 넣어버리다니. 전혀 예상치 못했다.

디아네가 잘못 봤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아주 낮을 거다. 아마도.

‘무슨 수를 쓴거지?’

물론 주신이니까 나름의 한 수는 있겠지만 김우진 스스로가 집행자의 격을 눈치 채지 못할 줄이야.

‘나도 아직 부족하군. 어쨌든 디아네의 말이 사실이라면 놈을 절대로 연옥 밖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놈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시체가 되는 것뿐이다.

카를로 사태 이후, 릴리를 어느 정도 자유롭게 풀어놔서 놈이 느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세계수의 존재가 언젠가는 들킬 수밖에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최대한 늦추는 게 좋다.

‘일단은 돌아가서 상황을 좀 파악해봐야겠군.’

칼카르를 죽이고 데이드람에 돌아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기운을 온전하게 흡수하는데 집중하고 세계수의 도움을 받다보니 정도 이상의 힘을 사용할 때가 아니면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수준이 되었다.

상대가 설사 신이라고 해도.

율리아는 더했다. 애초에 하이엘프인 그녀에게 세계수의 열매는 더 없이 적합한 영약이었고 세계수의 조력까지 있으니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열매의 기운을 완벽하게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김우진은 숲의 정기를 빼앗긴 채, 훈련에 임하는 율리아를 바라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능숙해진 그녀는 이제 단순한 용사라고 볼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제대로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닌, 세계수의 열매로부터 우주의 힘을 조금 공급받은 것이기에 신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집행자의 최상위권 정도는 되었다.

‘그래도 만약 가장 신에 근접한 자를 고르라면 율리아가 맞긴 해.’

알베니우스와 데이드람 세계수의 계획은 들었다. 들었을 때도 그럴 듯 했고 진행되고 있는 현재도 그럴 듯 했다.

만약 율리아에게 특별한 계기가 더 주어진다면 신에 필적하는 초월자가 될 지도 모르겠다.

“물론 당장은 힘들···.”

────!

데이드람의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미중유의 힘은 자연스레 방벽을 통과해 일직선으로 내리 꽂혔다.

“···어?”

- 어?

“어···?”

신들조차 경계하는 연옥의 소장도, 만 년을 넘게 살아온 세계수도, 신들에 의해 추살령이 내려진 차원용도. 그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허나, 예견된 미래였다.

김우진이 두리쉬마와 함께 주신, 칼카르를 죽인 순간부터.

비어버린 공석은.

채워야만 하니까.

* * *

“···그러니까 더 이상, 죄수가 아닌 협력자로 대우를 해달라는 거군.”

“맞습니다.”

바른 자세로 소파에 앉은 강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들은 소장님과 완전한 협력 관계가 된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죄수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너희들은 죄수로 연옥에 들어왔다.”

“그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부소장은 섣불리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소장님이 강민식을 예의주시하라고 한 것과는 별개로 강민식의 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탈옥 사태를 기점으로 죄수들과 김우진의 관계는 변했고 그건 부소장이나 교도관들과의 관계도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부터 제대로 된 죄수가 아니었고 이제는 완전한 협력자로 돌아섰는데 계속해서 죄수로 둘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교도관으로 들어온 집행자들은 애초에 소장님의 적이었던 자들이 아닙니까. 저들보다는 저희가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식적으로 듣자면 이것 또한 맞다. 하지만 부소장은 소장님이 어째서 그러한 결정을 하셨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게 불만이면 네가 그들보다 강해지면 된다.”

“···그건 좀.”

김우진은 강자를 아꼈다. 그리고 죄수들 중에서도 특별한 율리아 카르센, 시에나 올름, 데르카인 알베트, 타르칸 톨리스를 제외하면 객관적으로 집행자들보다 강한 이들은 없었다.

‘아, 소지도 포함인가.’

하지만 그는 다른 죄수들과는 또 다른 케이스다.

그리고 그런 이유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행자들과 너희는 경우가 다르다.”

죄수들은 신들의 인계를 받아 죄수로 등록이 되어 있다. 그들의 신분을 김우진 마음대로 정할 수가 없다.

“그건 알지만 그럼 신들의 감찰관을 보낼 때만 연기를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네 의견도 어느 정도는 타당하다. 하지만 결국 내게는 결정권이 없다.”

“아, 저도 당장 그런 게 아닙니다. 단지, 소장님게 말씀 좀 잘 해주셨으면 합니다. 예전에야 제가 신들의 개였지만, 개과천선해서 소장님을 도운 일이 한두 번이 아니잖습니까?”

“···염두에 두지.”

“감사합니다!”

“다만, 조건이 있다.”

“예?”

“요즘 들어 죄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고 있다지?”

“···알고 계셨습니까? 최대한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하하, 강민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뒷통수를 긁적였다.

“독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에게 접촉하는 것을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하하···.”

“첩자는 찾았나?”

“그게···.”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카를로를 제외한 세 명을 찾았습니다. 모두 카를로와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아, 말씀을 안 드리려고 한 건 아닙니다. 단지 조금 더 확실해지면···.”

“크게 터치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도 계속하도록.”

“···예?”

“아직 1188번과는 접촉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1188번이라면 켄타우로스···?”

“그자와 접촉해라. 다른 죄수들에게 했던 것처럼.”

독방에 갇혀 있는 바라하 칸, 아니 페트로 코페르크가 강민식의 행동을 알고 있을지, 모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중에 독방에서 나왔을 때, 그리고 다른 죄수들과 교류 했을 때, 강민식이 그하고만 접촉을 안 한다면 그것 또한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내가 원하는 정보들을 알아온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하도록 소장님께 말씀드려 보지.”

“원하는 정보가 무엇인지는 알려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네 능력을 시험해보도록 하지.”

“···좋습니다. 다 털다보면 하나쯤은 걸리겠죠.”

잠시 고민하던 강민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주신의 집행자다. 강민식이 베른에 의한 첩자라는 것을 알 터. 강민식의 접촉을 피하지는 않을 거다.’

몇 번 조심하겠지만 괜찮다 싶으면 본색을 드러낼 가능성도 있다.

‘소장님이 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기를.’

소장님이 없을 때, 연옥의 총책임자는 그다. 최대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문제가 생긴다면 조용히 처리하는 게 그의 사명.

강민식을 내보낸 그가 생각에 잠겼다.

* * *

백신전. 누군가는 신계라고 불리는 그곳은 모든 차원들 중, 가장 우주의 중심에 가까운 상위 차원이다.

그리고 가장 우주의 중심에 가깝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우주의 기록, 아카식 레코드와 가장 근접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카식 레코드. 세상은 빛, 아카식 레코드와 어둠에 의해서 균형을 맞추어 간다.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는 세계의 의지이며 백신전의 신들은 그 의지를 받들어 우주의 균형을 수호한다.

때문에 누군들 안 그러겠냐만은 신들에게 있어 아카식 레코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존재였다.

항상 살피며 아카식 레코드의 의지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려고 애쓴다.

쩌적, 균열이 열렸다. 백신전의 신들에게 주신이라 불리는 알비츠가 조심스레 우주의 공간에 발을 들였다.

시커먼 우주를 관통하며 그 끝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뻗은 아카식 레코드는 언제 보아도 영광스러웠다.

신이라고 자부하지만 그 앞에만 서면 인간 앞에 선 개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아카식 레코드여.”

그가 짧게 목례하며 아카식 레코드를 살폈다.

알비츠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알베니우스를 잡으러 떠난 칼카르가 몇 주가 지나도 소식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잘못되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잘못되었어도 충분히 헤쳐 나올 수 있는 능력 또한 있기에.

괜히 백신전의 신이고, 괜히 주신이겠는가.

그럼에도 온 것은 무언가 며칠 째 묘한 불안감이 알비츠의 마음을 간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직감은 권능과도 같다.

단순한 기우가 아니기에 불안감의 원인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가 아카식 레코드를 살피기 시작했다. 방대한 우주의 도서관은 주신이라 자부하는 그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단편적인, 파편적인 부분들을 얻을 수 있을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파편들만으로도 꽤나 도움이 됐다.

“···이건?”

그리고 알비츠는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진 새로운 기억을 읽어냈다.

- 새로운 신.

그리 길지 않은, 많은 정보를 담지도 않은 짧은 파편.

“···새로운 신이 탄생?”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알비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신전이 백신전인 이유는 신이 백명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이 백명뿐인 것은 아카식 레코드가 그 이상의 신을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런 아카식 레코드가 새로운 신을 선택했다는 것은.

“···신이 한 명 죽었다.”

그리고 아마 그건 높은 확률로···

“아니, 칼카르는 주신이다. 상식적으로 그가 죽을 리는 없다.”

백신전의 가장 위협적인 적인 김우진보다 격이 높은 게 칼카르다. 그가 고작 신의 힘을 조금 받은 도마뱀을 잡으러 갔다가 죽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다른 신이겠지.”

아마 백신전의 하위 신들 중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리라.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알비츠가 닫히기 직전의 균열에 다시금 손을 넣고 되돌아갔다.

모든 백신전의 신들을 소집해야만 한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