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65화 (65/150)

# < 064. 열매 >

콰르르르릉-

낙뢰가 내리친다. 마기에서 비롯된 검은 번개는 이미 난장판이 된 대지에 상처를 하나 추가한다.

“여기도 이제 끝이군.”

두리쉬마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과 마왕의 격전 덕분에 반쯤 갈라지고 쪼개졌던 차원은 완전 넝마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원의 균열들은 커지고 있으니 차원의 수명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어떻게 합니까?”

“딱히 새로울 것도 없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두리쉬마는 신들의 눈을 피해 변방의 차원만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변방의 차원들은 전부 종말을 맞이하고 마지막 운명을 기다리는 곳들이었다.

소멸이 예정된 차원은 그리 오래 있을 수 없었고 두리쉬마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차원을 옮겨왔다.

“문제는 이 다음이군.”

분노에 취해 주신인 칼라르를 죽인 것까지는 좋았다. 그 대가로 두리쉬마도, 김우진도 얻은 게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하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일반 신이 죽어도 난리가 나는 게 백신전인데 주신이 차원 외곽에 들렀다가 실종되었다.

차원이 곧 붕괴하여 소멸하게 생겼으니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면 저들은 신이 아니라 머저리다.

“일단 저는 나름 숨길 수 있습니다만.”

애초에 현재 김우진은 연옥에서 나오지 않은 상태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차원의 장벽을 관리하는 건 백신전이지만 차원에 뿌리를 내린 세계수는 그것에 간섭할 수 있다.

릴리가 김우진이 연옥을 나섰다는 것을 숨겨주었고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데이드람에 방문하고 나왔다는 것을 숨겼다.

소멸에 가까운 종말 차원의 방벽은 느슨해질 대로 느슨해졌으며 신들의 관심 밖이다. 즉, 누구도 김우진이 연옥에 있지 않다는 걸 모른다.

하지만 두리쉬마는 다르다.

그가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은 차원의 변방에 숨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들이 그의 생존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 칼카르의 실종에 백신전에서 변방 전체를 이 잡듯이 뒤진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들키고 만다.

“차원은 많다. 당연히 용사들에게 구해진 만큼, 멸망한 차원도 많다. 백신전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모든 차원을 확인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말된 차원은 생겨나고 있다. 도망칠 곳이 무수히 많으니 두리쉬마는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다가 신에게 들킬 수도 있다. 하지만 두리쉬마는 어둠의 사도이자 마왕이었다.

“칼카르와의 전투로 인해 꽤 많은 마물들이 죽었다. 다른 종말 차원들을 돌며 그들을 수복하고 군단을 만들 거다.”

그들은 백신전의 몰락을 위한 선봉이 될 거다.

“나는 자의로 어둠의 사도가 되어 차원을 멸망시켜야 하는 숙명을 얻었으나 노리는 건 단 하나다.”

백신전이라는 차원.

“그곳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수 있다.”

하물며 주신을 죽인 대가로 쌓은 업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런가요. 그래도 혹시 진짜 위험해지면 연옥으로 오세요.”

“연옥? 네가 소장으로 있다는 감옥인가.”

“여러 차원이 교차되는 교차차원에 세워진 감옥입니다. 주로 하는 일은 용사들을 가두는 것.”

두리쉬마의 미간이 구겨졌다.

“신들의 개 노릇을 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계약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계약이 끝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죠.”

“계약이라. 아까 칼카르가 이야기했던 그것이군. 서로를 죽일 수 없는 건가?”

“그밖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일단은 그렇죠.”

“신들이 어째서 너와 그런 계약을 맺었지?”

“왜냐하면 제가 신들을 죽였거든요.”

“···신을 죽였다고?”

프흐흐흐, 고개를 갸웃거리던 두리쉬마가 폭소를 터트렸다.

“하긴, 그 정도 실력이면 그럴 만도 하지. 과거 그 어떤 타이탄도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을 네가 이루었군. 그래서인가. 공간과 불, 전혀 다른 권능을 다루고 칼카르가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른 것은.”

“예, 신의 힘도 하나 먹었죠. 흡수하느라 꽤나 고생했지만요.”

솔직히 지금도 좀 거북하긴 하다. 주신이 괜히 주신이 아닌지 요동치려는 기운을 억제하는 것도 꽤나 심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거다.

“이곳이 멀쩡한 차원이고, 신들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면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을 텐데.”

“연옥에 오면 제가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허나, 지금은 그만 가봐야 할 때다.”

콰르르르, 차원의 붕괴가 조금씩 가속화되고 있었다. 차원의 수명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모조리 소멸한다. 신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끔찍하군요.”

“받아라.”

두리쉬마가 건틀렛 하나를 건넸다.

“내가 쓰던 건틀렛이다. 다음에 나를 찾으러 올 때 나침반 역할을 해줄 거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걸 드리겠습니다. 언제든 위험해지면 연옥으로 오세요.”

김우진이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건넸다. 큰 의미는 없는 물건이지만 꽤 오랫동안 착용하고 다녔으니 그를 찾는 나침반 역할로는 더 없이 적합할 거다.

“내가 갑자기 가면 네가 위험해지는 것 아닌가?”

“아뇨, 나름대로 차원에 들어왔다는 것을 숨길 방안은 있어서.”

“알겠다.”

두리쉬마가 가볍게 망치를 휘둘러 공간을 찢었다. 거대한 균열과 함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따라와라!”

그의 외침에 살아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몰려들었다.

“어떻게 가나 했더니, 이런 것도 가능하십니까?”

“어둠의 사도가 된 이후로 종말을 맞이한 차원 간의 이동이 좀 자유로워졌을 뿐이다. 그럼 다음에 보지. 타이탄에게 함께 싸운 전우는 이미 동지다. 넌 내 동지이니 언제든 위험하면 내게 와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가 떠나갔다. 수만의 마물들이 함께였다.

칼카르와의 전투에서 꽤 많은 마물들이 죽었는데 아직도 저 정도라니. 적어도 한 차원에서 모은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잘 됐으니 다행이군.”

“어디 숨어 있다 이제야 나타나는 겁니까?”

“너도 알다시피 지금의 나는 좀 약해서.”

알베니우스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도 가지. 여기 더 있다가는 정말로 소멸해버릴 것 같으니.”

“예.”

알베니우스가 차원의 방벽을 열었다.

* * *

율리아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넘었다.

허나, 자연은 더 이상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밟고 선 가지들이 휘청이며 그녀를 떨쳐냈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향해 줄기들이 쏟아졌다.

─!

검격이 코앞까지 다가온 줄기의 진로를 비틀었다. 간신히 자세를 다잡으니 수 백 개의 나뭇잎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율리아가 호흡을 가다듬고 바람을 일으켰다. 바람은 그녀의 편이니, 부드럽게 나뭇잎들을 비껴내며 전진했다.

사방의 나무가, 바닥의 잔디가, 낙엽이 모든 적들 사이를 고고히 지나쳤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신목 앞에 섰을 때.

“파하아아···!”

율리아가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사라졌던 자연의 가호가 다시금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 수고했구나.

“별 말씀을요.”

작은 참새가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았다.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지만 평생 친구로 알고 지냈던 자연이 적이 되는 건 정말 끔찍하네요.”

김우진과 알베니우스가 떠난 뒤, 율리아는 데이드람에 혼자 남게 되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기약 없는 시간들을 그녀는 허투루 쓰지 않기로 했다.

세계수에게 부탁을 했고 그녀의 도움을 받아 훈련을 시작했다.

숲의 가호를 없애고, 우주의 힘으로 강화된 자연을 상대한다.

언제나 자연의 도움을 받아왔던 하이엘프에게는 더 없이 가혹한 전투였으나 해내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 신들은 자신의 권역을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지.

- 그곳의 자연이 네 편이 아닐 경우가 더 많을 거란다.

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신인 이상,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녀가 만약 신에 필적하는 강자였다면 김우진이 그녀를 놓고 갔을까? 아니다. 그녀가 약하기에 두고 간 거다.

“저는 나름 제 실력에 자신이 있었는데 연옥에 들어간 이후로는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지네요.”

- 넌 충분히 강하단다. 다만, 상대가 나쁠 뿐이야.

“그렇다고 피할 수는 없잖아요.”

신에게 대적하기로 한 모든 이들이 그렇듯, 율리아 또한 신에게 맞설 이유가 있다.

복수. 그녀에게 있어 부모나 다름없던 자의 복수.

그때, 열매 하나가 날아와 그녀의 손 안에 안착했다.

- 걱정마렴. 너는 충분히 그들과 함께 설 수 있을 테니.

그건 세계수의 열매였다. 아무리 하이엘프라고 한들 쉽게 접할 수 없는 보물.

- 이제는 때가 되었어.

하물며 만년을 살아온 세계수의 열매라면 그 값어치는 수십 배 이상 뛴다.

- 그거 아니? 만 년이 넘어간 세계수는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를 내려 보다 많은 권능을 손에 넣지만 반대로 열매를 맺는 주기는 늦어진단다.

본디 백 년에 하나씩 열리던 열매가 천 년으로 늘어난다.

하지만 그만큼 열매는 농익게 되고 마나는 보다 풍부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은 여파로 우주의 힘이 깃든다.

- 알베니우스와 나는 백신전에 대항하기로 한 이후, 끊임없이 아군을 끌어모았단다.

하지만 신에게 대항할 수 있을 만한 초월자들이 많을 리가 없었다.

이제야 김우진과 접촉했고, 우연찮게 멸망한 종족의 후예를 찾았다.

때문에 둘은 오래 전부터 계획해왔다.

찾을 수 없으면 최소한 한 명이라도 만들어 내자고.

신이란 결국 아카식 레코드에게 우주의 힘을 받은 자. 그들과 대적하려면 굳이 신이 되지 않아도 된다. 우주의 힘을 다룰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가장 바탕이 신들에게 직접 그 힘을 부여 받은 용사들이나 신에게 직접 받은 만큼 신을 공격하는데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허나, 그 바탕이 탄탄하고 재능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용사로서 신의 힘을 다루어 봤기에 신의 힘에도 익숙하다.

때문에 애초부터 용사를 생각했고 그렇게 고른 게 율리아 카르센이었다.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준비한 칼.

아직 완전히 갈아내지 못했지만 반드시 명검이 될.

“이미 다 이야기 하셨잖아요. 하지만 연옥에 가야했기 때문에 열매를 먹는 건 뒤로 미뤘고.”

- 그래, 그랬지.

세계수의 열매를 먹은 상태에서 연옥에 가게 되면 신들에게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이걸 먹으면 소장님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 아니.

- 그 아이는 정말 괴물이란다.

“···같이 설 수 있을 거라면서요?”

- 설 수는 있겠지. 적어도 가장 가까운 전장에서 싸우는 것 정도는?

참새가 샐쭉한 율리아의 시선을 회피했다.

- 그래서 안 먹을 거니?

“그럴 리가 없잖아요.”

율리아가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혀에 닿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

막대한 마나와 이질적인 힘이 그녀의 몸속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율리아가 눈을 감았다. 세계수의 가지와 나뭇잎들이 그녀를 감쌌다.

- 김우진이 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네.

참새가 율리아의 머리 위에 앉아 마나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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