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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64화 (64/150)

# < 063. 불꽃 >

모든 일에는 연관이 있다.

김우진이 케이룸에 가 있을 때, 알베니우스가 연락을 한 것도.

직접 만난 그가 타이탄과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타이탄이 어둠을 받아들이고 그 사도가 된 것도.

백신전에서 알베니우스의 흔적을 발견한 것도.

주신, 칼카르가 직접 나선 것도.

따로 따로 놓고 보면 그저 우연이다.

하필 이 타이밍에 알베니우스의 흔적이 발견된 것도, 하필 이 타이밍에 칼카르가 직접 온 것도.

하지만 그 우연이 모이면 필연이다.

김우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칼카르는 강하다. 그와 마주한 것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없는 위기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이 아니면 칼카르가 집행자나 다른 백신전의 신들 없이 혼자 다닐 리가 없다.

지금이 아니면 마기가 넘쳐나는, 신들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제약하는 멸망한 차원을 전장으로 삼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지금이 아니면 위대한 타이탄, 두리쉬마와 함께 칼카르를 합공할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

그 모든 것이 맞아 떨어진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확신했다.

지금이다. 바로 지금이 칼카르를 잡을 적기다.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검 끝이 칼카르의 육신을 파고든다. 검날을 붙잡은 그의 손바닥에 미약한 핏물이 흐른다.

“네놈이 끝까지···!”

“망치를 견디기 힘들어 보이는데 그만 푹 쉬는 게 어때?”

“같잖은 소리!”

괴성과 함께 칼카르의 전신에서 화염이 폭사된다. 열기는 김우진의 염화를 잡아먹고 망치를 밀어낸다. 반동에 밀린 거인이 뒤로 넘어간다.

“자비를 베풀어 주었더니 감히 내게 칼을 들이밀어?”

“자비가 아니라 무서워서겠지. 연옥에 갈까봐.”

“네놈 또한 계약에 묶여 있다. 무슨 자신감이지?”

“내가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평소라면 전혀 소용이 없다. 아카식 레코드의 가호를 받는 신을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같은 초월자들 뿐이니.

김우진이 하지 않는다면 김우진 대신 손을 더럽혀줄 사람이 연옥에는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지금은 다르다.

김우진과 대등한 수준의 괴물이 있다. 오랜 세월, 신을 향한 증오를 곱씹으며 힘을 길러온 거인이 있다.

능히 신을 죽일 수 있는, 신의 대적자가.

“노오오오옴!”

칼카르가 돌진한다. 화염을 머금은 주먹이 붉은 궤적을 그린다. 빠르고 강맹하다.

─!

주먹과 검이 부딪혔으나 밀려난 건 검이다. 김우진이 한 걸음 물러난다. 칼카르가 곧장 따라 붙는다.

극도로 압축된 불의 주먹이 김우진을 향해 날아온다. 폭주기관차처럼.

─!

막아냈음에도 폭발이 일어난다. 넘실거리는 화마가 김우진의 불꽃을 집어삼키며 영역을 넓힌다.

역시 상성이 나빠. 김우진이 급하게 두 발바닥에 불꽃을 터트린다. 한 순간에 수 킬로를 후퇴하며 자세를 다잡는다.

“어딜.”

고개를 드는 순간, 주먹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보다 망치가 더 빠르다.

───!

골프공을 후려치는 골프채처럼 경쾌한 스윙이 신을 후려친다. 칼카르의 몸이 통제를 잃고 하늘로 치솟는다.

“···뭡니까, 그 모습은?”

“타이탄은 자신의 신체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다. 걱정 마라. 크기는 줄어들었어도 힘과 견고함은 그대로니.”

전신이 검게 물든 두리쉬마가 무릎을 굽혔다. 다시 폈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 칼카르를 쫓고 있었다.

콰콰콰-

불꽃의 섬광이 그를 마중 나온다.

까앙!

주인의 덩치에 맞게 함께 줄어든 망치가 강제로 각도를 틀어낸다. 애꿎은 마물들이 소멸하는 것과 동시에 신의 주먹이 거인을 후려친다. 거인의 발이 신을 강타한다.

신과 신을 증오하며 마왕이 된 거인은 그렇게 순식간에 백여 합을 주고받는다. 한 수 한 수에 대지가 붕괴하고 하늘이 갈라진다.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김우진은 격랑 속으로 몸을 던진다.

피조물 따위는 감히 낄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격전이지만 김우진은 아니다.

그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불꽃을 배제했다. 그의 가장 큰 힘이 불꽃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불꽃만이 그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감히 신에게 통할 정도의 권능이 많은 것도 아니기에 불꽃이 없다면 남은 건 하나다.

순수한 오러로 칼날을 벼르고 허공을 가른다.

쫙 갈라진 균열 사이로 검을 찌른다. 신의 등을 찌른다.

“······!”

한순간 느려지는 움직임에 망치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강타한다.

그건 시작이었다.

김우진은 수 십, 수 백 개의 칼날을 제련하고 권능을 부여했다. 공간을 가르고 균열을 만들고 검을 찌른다.

검을 빨아드린 균열은 신의 근처에서 먹은 것을 토해낸다. 그리고 신을 보호하는 불의 권능을 비틀고 들어간 검은 그대로 신의 살을 뚫는다.

“···김우진, 네놈! 이건 아스트마의 권능이구나!”

신의 분노에 김우진이 히죽 웃었다.

“맞아. 네 동료의 권능에 당하는 기분이 어때?”

공간을 비틀어 보호수단을 우회하는 공격. 꽤나 난해하고 격의 차이를 많이 타 평소라면 결코 통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두리쉬마라는 적수가 칼카르를 잡아두고 있는 이상, 빈틈은 수 없이 많다. 수 없이 많이 만들 수 있다.

“이 개새끼가!”

─────!

신의 분노에 감응한 불꽃이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공간의 간섭을 불태우고 마왕이 된 거인을 튕겨낸다. 그리고 주인을 위한 길을 마련한다.

“오냐, 네놈부터 죽여주마!”

신의 신형이 순식간에 허공을 격한다. 김우진이 급하게 검을 휘두른다. 쩌엉, 주먹에 검이 부서진다.

‘빌어먹을, 역시 상성이 안 좋아!’

권능의 불꽃을 두르면 버틸 수는 있다. 하지만 더 정순한 불꽃에 잡아먹혀 오히려 주인을 물게 된다.

급하게 새로운 검을 만들어내며 수십 합을 받아낸다. 김우진의 몸이 정신없이 뒤로 밀려난다.

콰앙, 거인의 망치가 연이어 신의 후방을 후려쳤지만 칼카스의 눈은 오로지 김우진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쩌정, 연달아 검이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보다 놈의 손이 더 빨랐다.

콱, 목을 움켜쥐는 거친 손아귀에 김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여기까지다. 김우진.”

하지만 두리쉬마의 망치질을 맨 몸으로 받아낸 칼카스 상태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부서진 한 쪽 어깨는 꽤나 심각해 보였다.

“그 상태로 두리쉬마를 이길 수는 있고?”

“나는 주신이다. 누구한테도 지지 않아.”

“근데 날 죽이면 심연에 떨이지게 될 텐데? 괜찮겠어?”

“······.”

분노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자각한 칼카르가 멈칫했다.

그리고 그 짧은 틈이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을 불러왔다.

김우진이 공간을 조작했다. 비틀고 왜곡하여 잠시나마 칼카르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허튼 수작을···!”

그리고 그 위로.

두리쉬마의 망치가 떨어졌다.

주인의 모든 마기를 잡아먹어 덩치를 키우고 살기를 극대화시킨.

“이 따위 것···!”

신이 급하게 불꽃을 피워 올렸으나 공간의 권능은 그것마저 일부 왜곡시켰다.

“너 이 개새끼가···!”

부실한 불꽃이 모조리 잡아먹혔다.

신을 보호하는 권능 또한 소멸했다.

그리고 망치는 모든 껍질이 벗겨진 속살을 향해 돌진했다.

────!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 차원을 뒤흔들었다. 갈라지고 찢겨나간 차원의 형태가 모조리 일그러졌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신은 살아 있었다.

모든 불꽃이 사라졌음에도.

가호가 사라졌음에도.

망치를 받아낸 팔이 완전히 소멸하고 머리가 일부 뭉개졌음에도.

“내가 이따위 것에 당할 것 같으냐···! 나는 백신전의 삼 주신, 칼카르다···!”

신이 포효했다. 초토화된 차원을 내려다보며 다시금 불꽃을 피워내려 애썼다.

콰직-

허나 세상은, 아니 김우진은 그의 재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러의 검이 신의 목을 꿰뚫었다.

불꽃이 소멸한, 가호가 벗겨진 속살 따위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 또한 초월자였기에.

“쿨럭···너···!”

“신도 피를 흘리는군.”

“김우진, 김우진, 김···우진···!”

“그래, 내 이름이 김우진인 건 나도 잘 알아.”

김우진이 검을 비틀었다.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네 힘은 내가 잘 써주마.”

“개···!”

“두리쉬마님! 여기입니다! 죽기 전에 빨리!”

김우진이 황급히 검을 빼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아.”

신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그림자가 졌다.

────!

* * *

“···죽겠네, 진짜.”

김우진이 크레이터 속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옆에는 신의 시체가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머리가 완전히 터져버린 상태에서 부활할 수는 없으니.

“···마침내.”

두리쉬마가 덜덜 떨리는 몸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주신, 무려 주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백신전을 지탱하는 세 기둥 중 하나.

두리쉬마가 널브러진 신의 머리였던 것을 들었다. 완전히 잔해가 되어버린 흔적들을 높이 들어 올렸다.

“위대한 거인의 영혼들이시여! 이 두리쉬마가 마침내 복수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미 메말라버린 눈에서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허나, 마왕의 마기에 감응한 세계가 요동쳤다.

그 순간, 거대한 마기가 샘솟았다.

두리쉬마는 눈을 감고 조용히 마기를 곱씹었다.

“뭐, 뭡니까?”

“당황할 것 없다. 용사들과 같으니.”

신의 선택을, 나아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용사들은 악을 처단함으로서 업을 쌓고 그에 따른 힘을 얻는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둠의 사도인 두리쉬마는 빛의 사도인 칼카르를 죽이고 막대한 업을 쌓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그의 새로운 힘이 되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네가 아니었으면 결코 이기지 못했을 거다.”

칼카르는 주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두리쉬마와 김우진. 둘 중 한 명이라도 없었다면 목숨을 잃는 건 이쪽이 되었을 거다.

“이제 시작이다. 칼카르를 시작으로 모든 백신전의 신들을 무너트리겠다.”

“그건 그거고 시체는 제가 가져도 됩니까?”

“딱히 시체는 필요 없다만 무엇을 할 생각이지?”

“아까 물으셨지요? 정령술사가 아니면서 어떻게 정령왕의 힘을 사용하냐고.”

김우진이 칼카르의 시체로 다가갔다.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간단합니다.”

김우진의 마나가 시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정령왕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진짜 먹는다는 건 아니다. 흡수. 김우진은 그 근원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용사로서 우주의 힘을 부여받고.

아카식 레코드에게 인정받은 그의 권능.

포식이다.

“···그렇게 된 거였군. 용사인가?”

“용사였습니다.”

칼카르의 육신이 소멸했다. 김우진의 몸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허나, 그것은 더 이상 붉지 않았다.

백염.

신의 불꽃을 먹어치운 불꽃은 한층 진화했다.

눈과 같이 하얀 불꽃의 결정들이 김우진을 감쌌다.

“지금은 감옥의 소장이지만. 원하시면 초대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진 열기와 농도에 김우진이 전율했다.

지금이라면 그 누구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거절한다. 딱히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군.”

“아쉽군요. 볼게 많은 곳인데.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곳에 온 용건은 이루지도 못했네요.”

“하겠다. 이미 함께 주신을 잡은 마당에 네 능력을 의심하는 것도 멍청한 짓이지.”

“피차 마찬가지입니다.”

소장과 거인이 서로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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