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62. 손 >
“충동질하는 건 여전하군.”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만.”
“굳이 칼카르가 갈 필요 없는 일이다.”
“다른 신들을 믿을 수 없다고, 알베니우스를 직접 잡아와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한 건 칼카르다.”
“그렇게 부추긴 건 너도, 베리안.”
회색빛 동공과 푸른 눈이 마주쳤다.
“놈이 불안해하고 있으니 그저 긍정해준 것뿐이다.”
베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국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갈 뿐인 것을. 주신이라는 자가 아둔하게 자신의 성미를 이기지 못하니.”
“그 순리를 우리가 만들어가는 거다. 칼카르는 다른 신들을 애증한다. 김우진에게 또 다른 신이 죽는 것을 원치 않으니 스스로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일뿐.”
“베른과 드네르바를 미끼로 던지는 것에 동의한 건 다른 칼카르인가?”
“작은 피해로 더 큰 우환을 막는 거다.”
“농담이다. 나도 동의했으니 그걸 탓할 처지는 아니지.”
“어디 가는 거지?”
“남아 있을 이유가 있나?”
“없다.”
베리안이 대전을 빠져나갔다. 텅 빈 대전에 홀로 남은 알비츠가 무표정하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회의는 끝났다.
모든 신들은 각자의 영역으로 돌아갔고 칼카르는 직접 알베니우스를 쫓아 차원의 변방으로 향했다.
이제 남은 건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뻔할 것이다. 신들 중 누구도 칼카르의 실패를 예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는 주신이다. 태초에 선택을 받은 절대자이자 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강자.
“···그때 끝냈어야 했거늘.”
신의 죽음이라는 미지에 주신들마저 신들을 살리기 위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들의 희생을 감안하더라도 김우진을 끝냈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적어도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는다.
칼카르가 알베니우스를 잡아온다면.
“김우진도 끝이다.”
무조건.
* * *
죽일 듯한 살기.
사방에서 넘실거리는 마기.
이게 얼마만일까.
김우진은 비로소 자신이 전장에 서 있다는 실감이 났다.
자신보다 한참 부족한 하수들의 재롱을 보고 적당히 맞춰주는 게 아니라, 생사가 오가며 언제는 목을 물어 뜯거나 뜯길 수 있는 숨 막히는 곳.
무엇보다 넘실거리는 마기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결코 좋은 기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으며 그때의 일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김우진은 있을 수 없었을 거다.
그 모든 것이 쌓여 지금의 그가 되었으니.
김우진이 파르르 경련하는 주먹으로 검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몸이 비명을 지르다니, 이것 역시 수십 년만의 일이다.
허나, 수십 년 전에는 수도 없이 겪었던 일. 당황할 이유는 없다.
그림자가 진다. 망치가 다시 떨어지고 있다.
이전의 것이 단순히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한 가벼운 손놀림이라면 이번에는 격이 다르다.
망치에 뭉친 마기는 권능에 가깝다. 능히 공간을 찢고 대지를 박살낼 힘을 품고 있다.
그러니 굳이 정면으로 상대해 줄 필요는 없다.
김우진이 몸을 날린다. 공간을 격하며 거인을 향해 질주한다.
허나, 그림자는 김우진의 머리 위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내리 찍는 상황에서 각도를 꺾어 나를 쫓아와?’
조금 놀랐으나 그뿐, 신과 대적할 위대한 종족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염두에 두고 있긴 했다.
허공에 널린 마기를 박차며 속력을 더한다. 아슬아슬하게 망치의 범위에서 벗어난다.
──!
애꿎은 대지를 강타한 충격파가 등을 덮친다.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불꽃을 피어내자 거인과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진다.
“······!”
거대한 주먹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빠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불의 방패가 주먹과 김우진의 사이를 가로 막았다.
────!
불꽃과 마기가 뒤엉켰다. 단단하던 방패가 아주 잠깐 시간을 끌고 소멸했다. 하지만 그 잠깐의 틈은 김우진이 몸을 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타이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김우진은 어느새 거인의 코앞까지 당도했다.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손으로는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어정쩡한 자세.
빈틈투성이다.
김우진이 검을 뻗었다. 그의 손에 딱 맞은 크기의 검이 화염을 머금으며 더 크게 타올랐다.
흡사 거인의 망치처럼. 그 끝이 목적지에 닿기 직전, 거인의 피부가 검은 빛으로 물들었다.
────!
그대로 받아냈다. 화염이 폭발했다. 막대한 반탄력에 김우진의 팔이 찌르르 울렸다.
“간지럽다.”
비웃음이 뒤섞인 음성과 함께 어느새 회수된 주먹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김우진의 육신이 대지를 파고 들어갔다. 마나와 오러의 일부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소멸했다.
“어떻게 되어 먹은 몸뚱아리입니까?”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수많은 전투와 수라장을 헤쳐 나왔지만 저 정도로 단단한 육체는 본 적이 없었다.
그와 싸웠던, 그의 손에 죽었던 혹은 그저 만나기만 했던 모든 신들도 저렇지는 않았다.
구덩이 속으로 그림자가 졌다.
“보여줄 건 방금 그게 끝인가?”
“도발을 잘못하는군요.”
자신을 내려다보는 거인의 동공에 김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마나와 오러를 끌어올렸다.
머리와 눈이 붉게 물들었다. 피부 곳곳에서 잔불이 피어올랐다.
“이제 보니 그 힘, 꽤나 익숙하군. 정령술사인가?”
“아니요.”
“그럴 리가.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더 없이 자연에 가까운 정순함은 오직 정령만이 가능하다. 그건 틀림없는 정령왕의 불꽃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칼날을, 불꽃을 압축시켰다. 더욱 날카롭게, 더욱 뜨겁게.
“반대로 돌려드리죠. 알고 싶으면 자격을 증명하세요.”
“···재미있는 놈이군.”
그대로 대지를 박찼다. 달아오른 대기를 짓밟으며 발밑의 화염을 폭발시켰다.
한순간에 거리가 좁혀졌다.
기다렸다는 듯 떨어지는 망치. 공간을 격하며 피해냈다.
똑같은 패턴이었다. 대지를 강타하는 망치, 폭풍처럼 일어나는 충격파, 저항하지 않고 나아가는 김우진, 마중 나오는 주먹.
달라진 게 있다면.
이번에는 주먹을 피하지 않고 검을 마주 뻗었다는 것이다.
주먹이 묵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전과 달랐다.
──!
흡사 금강석을 때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마기와 화염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고 검날이 그대로 주먹을 파고들었다.
“크윽···?”
거인의 비명도 잠시, 극도로 압축된 불꽃이 일거에 방출되었다.
─────!
그것은 거대한 화염의 폭풍이었다. 폭풍은 주변의 모든 것을 쓸어내며 태산과도 같은 거인마저 영향력에 넣었다.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동체가 허공을 날았다. 한참을 체공한 뒤, 대지에 처박혔다.
아니, 처박힌 거라고 생각했다.
─────!
날아가던 거인의 몸이 멈췄다. 폭발이 일어났다. 열기가 치솟았다.
추락하던 육신이 떨어지는 것보다 더 빠르게 다시 올라갔다.
“재미있는 광경이다···!”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 거기에 뒤섞인 열기와 신의 힘에 김우진의 얼굴이 굳었다.
“도마뱀을 잡으러 온 곳에서 멸족한 줄 알았던 타이탄과 연옥의 소장을 보게 될 줄이야···!”
불꽃이 피어났다. 김우진 것보다 더 색이 짙은 홍염이었다.
“더불어 환영 인사도 아주 거칠고···!”
거리는 멀었으나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 그리고 이미 멸망해 마기가 넘쳐나는 세상속에서도 고고히 흘러나오는 신의 힘까지.
“칼카르···.”
백신전을 주도하는 세 명의 주신 중 하나.
“왜 여기에?”
멍청한 질문이다. 놈은 이미 스스로 이유를 뱉었다.
‘알베니우스···!’
설마 꼬리가 잡히다니.
신들의 능력을 고려해보면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알베니우스가 40년 가까이 숨어 다닐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문제는 하필이면 지금이라는 것.
하필이면 칼카르라는 것.
‘차라리 알비츠가 나은데.’
같은 불꽃이라고 한들, 그 순도와 질이 다르다. 모든 권능이 불꽃에 집중된 칼카스의 불꽃은 그야말로 신의 불꽃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다.
놈의 불꽃은 다른 불꽃마저 불태우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모든 불꽃을 불태우고 먹어치우는 염화의 왕, 그것이 놈의 권능이다.
“김우진.”
눈 깜짝할 사이, 칼카르는 김우진의 앞에 서 있었다.
“직접 보는 건 오랜만이군.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칼카르.”
“백신전의 일원들이 네게 신세를 졌다더군. 베른은 잘 있나?”
“드네르바와 함께 잘 도망가던데. 백신전에 돌아간 게 아니었나?”
“딱히 상관은 없다. 어차피 계약이 유지중인 걸 보면 살아는 있을 테니까.”
칼카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헌데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지?”
“내가 할 소리다. 도마뱀을 잡으러 왔더니 마기에 점철된 타이탄이 있질 않나, 김우진 네놈이 있질 않나.”
다른 신들을 보내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계약으로 묶여 있으니 한 번의 자비를 베풀어주마. 떠나라. 연옥으로 돌아가서 네 본분을 다해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의미 없을 테니까.”
화륵, 미약한 화염이 그의 육신을 감쌌다. 김우진의 것에 비해 더욱 짙은 붉은 빛의 염화는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나는 신의 이름으로 어둠에 몸을 맡긴 악마를 처단하고 백신전에 반기를 든 도마뱀을 잡아갈 생각이다. 네 목적이 무엇이든 무엇 하나 이룰 수 없을 거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 대항하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는다는 것과 같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에 김우진이 표정을 굳혔다.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칼카르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최초의 신이자, 백신전의 주인이다. 네놈이 백신전의 신들을 여럿 상대해 봤다는 건 알지만 내게는 이야기가 다르다.”
“누가 보면 40년 전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지 않은 줄 알겠군.”
“신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감내였다. 허나, 두 번의 기회가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지 마라.”
“그러면서 신 둘을 미끼로 던져? 그 버러지 둘로는 안 된다는 걸 네가 정말 몰랐을까?”
“네게 대답해줄 이유는 없다. 마지막 경고다. 가라.”
“그렇다는데 말입니다.”
김우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시선은 칼카르를 향하지 않았다. 그 뒤, 거대한 망치를 든 타이탄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제는 저와 함께할 마음이 생겼습니까? 아무래도 혼자서는 버거우실 것 같은데.”
“두리쉬마다.”
“이제 이름을 알려주시는군요.”
“자격을 증명했으니까.”
“정령술사는 아니고 정령왕을 좀 삼켰습니다.”
“그런데도 살아 있다라, 용한 인간이군.”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죠.”
“지금 뭐하는 거지?”
“뭐하긴.”
망치가 떨어졌다.
칼카스가 주먹을 마주 뻗었으나 그 충격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육신이 대지 깊숙이 틀어박혔다.
충격에 몸이 경직된 잠깐의 틈.
김우진의 칼날이 사각을 노렸다.
“네 놈···!”
불꽃이 갈라지고 신력이 밀려난다. 칼카스가 급하게 다른 손을 내밀어 칼날을 붙잡는다.
“이런 짓을 하지.”
“계약을 잊었나!”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한 걸음, 전진한다. 칼날 또한 전진한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애초에 먼저 계약의 허점을 노리고 시비를 건건 네놈들이야.”
“명색이 용사였던 놈이 마왕과 손을 잡겠다는 거냐!”
“그게 어때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검 끝이 칼카스의 복부에 닿았다.
“난 백신전을 무너트릴 수만 있으면 그 무엇하고도 손을 잡을 수 있어.”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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