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61. 증명 >
차원이동은 우주의 힘이 없는 자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고차원적인 권능이다.
하지만 모든 건 상대적이다. 평범한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할 일이지만 우주의 축복을 받은 차원용에게도, 김우진에게도 그리 어려울 것 없는 일이기도 했다.
“······?”
하지만 알베니우스가 이끄는 대로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모든 차원은 장벽으로 막혀 있다. 그리고 길이 있다.
차원과 차원은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광활한 우주를 사이에 두고 수많은 갈래들이 존재한다.
물론 차원과 차원을 잇는 길인만큼 일반적인 길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관념적인 형태인지라 피조물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나 김우진은 단순한 피조물을 넘어 권능을 손에 넣었고 알베니우스가 얼마나 수많은 차원들을 헤집고 다닌지 눈치 챘다.
그만큼 지금의 차원은 무척이나 멀었고, 외진 곳에 있으며 절대 일반적으로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차원의 풍경 또한 일반적이지 않았다.
잿빛 사이로 여기저기 균열이 벌어진 하늘.
메마르고 갈라진 대지.
느껴지지 않는 생명의 기운, 진득한 사기와 마기까지.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턱턱 느껴지는 불쾌함에 김우진이 눈살을 찡그렸다.
수많은 차원들을 돌아다니고, 확인한 것은 아니나 적어도 이런 상태의 차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한 가지 밖에 없었다.
“···멸망한 차원이군요.”
“그래. 다가오는 종말을 막아내지 못하고 끝끝내 멸망한 차원이지. 아르반도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되었을 거야.”
모든 생명체가 말살하고, 모든 문명의 흔적이 지워지며, 모든 것이 붕괴한다.
그것이 멸망. 빛이라는 백신전의 대척점에 선, 어둠이 행하는 일.
“···여기에 타이탄이 있다는 겁니까?”
“맞아. 이곳에 숨어 있지. 신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만 정작 멸망한 차원에서는 눈을 떼버리거든.”
신들은 이미 떠나버린 차원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멸망한 차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살리지 못한다. 그곳에는 오직 어둠의 파편들만이 꿈틀거리며 다음 종말을 위해 힘을 키울 뿐이다.
“이곳도 마찬가지야. 텔라스라 불리던 이곳은 신들의, 용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종말을 막지 못했다. 모든 생명이 말살됐고 차원은 빛을 잃었지.”
신은 눈을 땠고, 신에게 쫓기던 자는 그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우주의 지도를 알고 있지?”
“대충은. 아카식 레코드가 중심에 있고 그 주변에 백신전과 같은 상위 차원들이 그 주변으로 하위 차원들이 있는 것 아닙니까.”
“원래는 이 차원도 그 자리 중 하나에 있었어. 하지만 멸망 하는 순간, 빛의 가호가 사라졌지.”
가호가 사라진 차원은 자연스레 아카식 레코드에게서 멀어진다. 점점 변방으로, 외진 곳으로.
멀어진 거리만큼 차원은 점차 형태를 잃어가고.
종국에는 소멸하고 만다.
그것이 우주의 법칙, 하나의 차원이 사라지는 과정.
“하지만 그렇기에 도망자가 몸을 숨기기에는 더 없이 훌륭한 곳이지.”
“그 말에는 동의 못하겠습니다만.”
단순히 신의 이목을 피한다는 점에서는 그 말이 맞다. 하지만 멸망한 차원은 단순히 모든 생명체가 죽기만 한 게 아니다.
캬르르르-
카아아-
세상을 멸망시킨 어둠의 파편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군세를 키워가는 종말의 구렁텅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물들에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하물며 먹을 것도 없고 말입니다.”
“타이탄은 반신이야.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지.”
“하지만 편안하게 숨어 있을 수는 없겠군요.”
김우진이 불꽃을 일으켰다.
“멈춰. 굳이 상대할 필요 없어.”
“무슨 뜻입니까?”
“지켜보면 알 거다.”
주변은 순식간에 수백, 수천, 수만의 군세로 뒤덮였다.
자연스레 오래전의 일이 떠올렸다. 수만의 마물 군단과 마주했을 때. 숨 막히는 마기와 마물들이 내뱉는 광기, 살기는 전장의 공기를 턱턱 막히게 했다.
‘놈의 목은 내가 베겠다.’
‘딱히, 누가 베든 상관없는데.’
‘놈을 베고 반드시 돌아가겠다. 나에겐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어. 율리아님은 내게 자식이나 다름···.’
‘클리셰 멈춰! 죽고 싶다고 발악하는 거야, 뭐야?’
‘그게 무슨 소리지? 넌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를 하더군.’
하지만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있었고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인류가 있었다. 연합군이 함께였다.
“···공격하지 않는군요.”
김우진과 알베니우스를 포위한 채, 움직이지 않는 행태에 그의 상념이 끊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접근하지 않았다. 마기와 살기는 여전했으나 무언가 참고 있는 것 같았다.
마물이 이성으로 본능을 제어하다니. 꽤나 흥미로운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그냥 더 큰 본능에 눌린 것일 수도 있다.
“뭡니까? 이놈들?”
“말했잖아. 싸울 필요가 없다고.”
알베니우스가 가장 거대해 보이는 마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거기 너. 우리를 네 주인에게 인도해라.”
말이 통할까 싶었는데 마물이 순순히 몸을 돌렸다. 포위망이 쫙 갈라지더니 길이 만들어졌다.
“···제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지구에서 벗어나 마물과 용사들, 그리고 관리자들과 엮인 지는 꽤 오래되었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차원용의 말을 알아듣고 비켜주는 마물이라니? 알베니우스의 공이 아니다. 이건 김우진의 추측대로 저들의 본능을 억압하는 더 상위의 존재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김우진. 너는 어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알베니우스가 갈라진 길을 걸었다. 김우진이 그 뒤를 따랐다.
“우습지만 백신전이 빛이라는 거, 그 대척점에 선다는 것.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정도?”
“어둠이 백신전처럼 집단을 형성하고 무언가를 이룬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지?”
“예.”
“어둠은 그저 관념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관념적인 존재?”
“어둠의 반대는 빛이나 빛은 백신전을 뜻하는 게 아니야. 아카식 레코드지. 백신전은 아카식 레코드의 대리인에 불과하다.”
그리고 빛 또한, 아카식 레코드 또한 관념적인 존재다.
“아카식 레코드는 뚜렷한 이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존재하며 세상에 빛을 실천하는 우주의 의지일 뿐이야. 어둠도 마찬가지.”
빛이 세상을 구하고 유지하려는 거대한 의지라면, 어둠 또한 세상을 멸망시키고 파괴하려는 거대한 의지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창조가 있으면 파괴가 있듯이.
아카식 레코드와 어둠은 모두 세상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우주의 의지다.
함께 균형을 맞춘다.
“여기서 의문이 있지. 빛은, 아카식 레코드는 백신전이라는 대리인을 선택해 세상을 구원한다. 그렇다면 어둠 또한 그럴 수 있지 않을까하는. 무엇일 것 같아?”
“이미 정답을 알고 있습니다만.”
정답은 ‘그렇다’다.
이미 멸망을 겪은 수많은 차원들이 증명하고 있다.
때로는 마왕이, 때로는 광룡이, 때로는 악인이, 때로는 극단적인 종족주의자가, 때로는 타차원의 괴물이.
세상을 파멸시키려는 존재들을 다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지독할 정도로 짙은 마기에 휩싸여 있다는 것.
마왕도 광룡도 악인도 갑자기 솟아나는 게 아니다.
조금 많이 나쁜 생각을 하던 친절한 이웃이 어둠의 선택을 받아 종말의 사도로 거듭나는 것.
그게 종말의 시작이다.
“그래, 맞아. 그게 종말이지. 그런데 말이야. 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선택을 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혼자서는 도저히 백신전과 비벼볼 수가 없거든.”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마인이 되는 것을 자처했다. 마물의 군세를 틀어쥐고, 어둠의 사도가 되기로 했다.
“다 왔다.”
마물의 길이 끝났다. 알베니우스가 멈춰 섰다.
“보이지?”
알베니우스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산이 있었다.
하늘을 꿰뚫을 정도로 거대한 동체가.
지금까지 느꼈던 어떤 마기보다도 짙고 농후한 마기가.
투박하면서도 광폭한 기세가.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거대한 위압감이.
“네놈인가.”
쿠그그그그그-
태산이 움직였다.
* * *
과거 신의 힘을 가진 거인들이 있었다.
덩치는 태산과 같으며 손짓 한 번에 태풍이, 발걸음에 지진이 일어나는 초월자들이었다.
그들은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신의 힘을 가졌고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신들과 분란을 겪었다.
신들은 본인들 외의 초월자를, 도전자를 원치 않았다.
거인들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신들의 탄압에 분개했다.
전쟁이 일어났고 거인들은 패배했다.
신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한 거인, 티탄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들을 학살하여 분란의 씨앗을 완전히 즈려 밟았다.
허나, 그들은 몰랐다.
티탄들의 모든 분노와 절망을 짊어진, 생존자가 남아 있음을.
쿠그그그-
거인이 움직인다.
단순하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내려치는 행위였다. 하지만 그 단순함에 대기가 찢어지고 거대한 충격이 엄습했다.
김우진이 주먹을 들어 마주 뻗었다.
─!
터져 나온 충격파에 마물들이 비틀거렸다. 두 발이 대지를 파고들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형성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과연.”
산이 몸을 일으킨다. 어둠속에서 빛나는 붉은 동공이 더욱 높아진다.
다시 한 번 주먹을 뻗는다. 이전과는 다른 제대로 된 주먹질.
“미치긴 미쳤군요.”
폭풍을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주먹질에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허나, 그의 말에 화답해줄 알베니우스는 이미 저 멀리 도망쳐 있다. 이런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한 거겠지.
사실 김우진 입장에서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전설속의 종족이라고 해도 신들과의 전쟁에서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 직접 붙어보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으니까.
화륵, 불꽃이 김우진의 전신을 휘감았다.
붉은 궤적을 그리며 주먹을 마중나갔다.
──────!
뒤섞인 화염과 마기가 화산처럼 퍼져나갔고 이전의 충격파를 버텨내던 마물들 일부가 쓸려나갔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충돌로 김우진은 깨달았다.
“알베니우스님이 자신할만 하군요.”
눈앞의 타이탄은 어지간한 신보다 강하다는 것을.
“···전력을 다해야겠는데.”
“과연. 도마뱀 놈이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군.”
그리고 호승심을 느낀 건 김우진만이 아니었다.
“어디 이것도 받아 봐라.”
티탄이 산을 집어 들었다. 아니, 그건 산이 아니었다. 거인의 손길에 맞게 제작된, 산처럼 거대하고 묵직한 망치였다.
망치가 하늘을 가렸다.
그대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기 직전, 한 자루의 검이 마중 나왔다.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
───────!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에 세상이 흔들렸다.
공간이 붕괴하고 마기와 화염이 범람했다.
그리고 그 폭풍에 밀린 거대한 망치가 왔던 길을 역행하기 시작했다.
“······!”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인의 자세가 무너졌다.
콰아아아앙, 거인의 거구에 깔린 마물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압사 당했다.
거인이 헛웃음을 지었다.
“···힘으로 나를?”
“저도 힘으로는 자신이 있거든요.”
김우진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꽤 오래 살으셨다고 하고, 아군이 될지도 모르니 일단 예의는 차리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도마뱀의 말이 맞았구나.”
거인이 몸을 일으켰다. 폭사되는 마기에 마물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인정하마. 넌 가벼운 마음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이 세상에는 강자만의 특권이 있다. 내 이름을 아는 것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고자 한다면.
“자격을 증명해라.”
“그걸 원한다면.”
김우진이 질주했다.
* * *
공간이 갈라졌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차원으로 떨어졌다.
“그 도마뱀이 있다는 곳이 여긴가. 쓰레기 같은 곳으로 멀리도 왔군.”
지독할 정도로 넘쳐나는 마기, 여기저기 보이는 균열은 차원의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긴, 이런 곳에 숨었으니 찾기가 힘들지.”
신들은 멸망한 차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매일 같이 새로운 종말이 일어나고 싸우는데 이미 끝나버린 곳에 미련을 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쓸모없는 것들.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하다니.”
어쩔 수 없다.
명색이 신이라는 놈들이 전혀 믿음이 가지 않으니.
“김우진이 차라리 더 신 같군.”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지만 적어도 그가 느끼기엔 그랬다. 오랜 권태 때문인지 신의 위엄을 잃어버린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욱 더 김우진을 처리해야만 한다.
김우진은 반드시 백신전에 큰 위험이 되어 돌아올테니.
“그 쥐새끼 같은 도마뱀을 잡아서···.”
그 순간이었다.
───────!
“이게 무···!”
차원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발이 그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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