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61화 (61/150)

# < 060. 고대종 >

백신전.

백 명의 신들이 모인, 상위 차원이자 신들의 집단.

드네르바는 새하얗고 고풍스러운 신전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늘의 백신전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보다 무겁고, 차갑다.

신이면서 피조물에게 패배한, 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실패자를 추궁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드네르바가 대전의 문을 열었다.

거대한 대전 바닥에 깔린 부드러운 카펫을 밟았다. 양쪽으로 길게 이어진 테이블들에는 각각의 신이 자리하고 있다.

총 100개. 허나, 양 끝단의 말미가 비었다. 하나는 베른의 자리이며, 하나는 드네르바 그녀의 자리다.

98개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왔군.”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고작 피조물 따위에게 패배하다니. 심지어 하나는 아예 포로로 잡혔다지?”

“자신의 권역에서 패배할 정도니 얼마나 무능한 건지.”

“애초에 자격이 되지도 않는 자들에게 신격을 부여한 것이 실수였다.”

한 마디, 한 마디와 같잖은 시선들이 가시가 되어 그녀의 폐부를 찌른다. 흡사 적으로 가득한 곳에서 청문회에 끌려나온 죄인과 같은 느낌이었다.

‘청문회라니.’

명색이 신이면서 하는 짓은 피조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빌어먹을 것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저들에 비해 격이 조금 떨어질지 몰라도 그녀 또한 신이었다. 오만함과 자존심만큼은 다른 신에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드네르바는 그들의 말에 발끈하고, 반박하는 대신 조심스레 앞으로 나아갔다.

수많은 신들을 지나쳐 대전의 중앙에 도착했다.

“···돌아왔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표면적으로 백신전의 모든 신은 평등하다. 신이란 존재 자체가 완전하고 지고하니 높고 낮음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일 뿐, 백신전에도 고저는 있다.

은연중에 모든 신들이 인정하는 고귀함과 고결함, 그리고 위대함.

신 중의 신. 아카식 레코드에게 가장 먼저 선택을 받은 세 명의 신들.

푸른 알비츠.

붉은 칼카르.

백의 베리안.

최초의 삼신을 그들은 주신이라 불렀다.

“···한심하기 그지없군.”

가장 좌측에 앉은 주신, 칼카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차가운 음성에 백신전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명색이 신이라는 자들이,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권역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도망치다니. 신으로서의 자각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거냐.”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무형의 압박에 드네르바가 숨을 삼켰다.

같은 신이라고 해도 주신은 급이 다르다. 베른은 멍청하게 주신에게도 이빨을 내세우지만 그녀는 그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그저 고개를 숙일 뿐.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지.”

중앙의 주신이자 회의의 의장 역할을 자처하는 알비츠가 칼카르의 타박을 막았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느냐. 어떻게 부딪혔고, 어떻게 패배했으며, 어떻게 도망쳤느냐.”

“놈이 케이룸에 왔습니다. 베른이 엘프들을 처형한···.”

드네르바는 대부분의 진실에 약간의 거짓을 섞었다. 김우진에게 항복해 목숨을 구걸한 것이 아닌, 베른과 함께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도망친 것으로.

“그러니까 다른 신을 미끼로 남기고 자기만 도망쳤다는 거잖아?”

“합공을 펼치고도 그렇게 추하게 도망쳤다고? 신의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군. 아무리 공석이 생겼다고 해도 너무 급하게 올렸어.”

신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들려왔으나 세 주신은 말이 없었다. 그들의 짧은 침묵이 드네르바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김우진의 격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높군.”

“시간은 공평하지. 놈에게도 성장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비루하게 도망치다니! 신위를 박탈해도 모자라지 않다!”

“그만해라. 드네르바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은 그녀를 탓하는 게 아니라 김우진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다.”

알비츠가 다시 한 번 칼카르를 막았다.

“회의는 잠시 휴정에 들어가겠다. 모두 잠시 나가 있도록. 앞으로 김우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각자 대안을 생각해 보아라.”

그의 선언에 신들이 썰물 빠지도록 빠져나갔다.

“···저는.”

“너도 마찬가지다, 드네르바. 허나, 약속하지. 이번 일로 네게 큰 불이익이 가지는 않을 거다.”

“감사합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드네르바가 사라졌다. 세 명의 주신만이 남았다.

“넌 물러도 너무 물러.”

칼카츠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무를 게 있나? 베른과 드네르바가 패배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미끼로 던진 것이 살아 돌아온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했으니 더 타박할 이유는 없다.”

“그건 나도 동감이군. 단순히 위엄이라는 건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칼카르.”

“아주 신사들 나셨군. 인간 하나에 백신전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다 못해 나락으로 처박히는데 말이야.”

“어디까지나 예정된 결과였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알비츠가 담담히 대꾸했다.

그래, 베른과 드네르바는 애초에 미끼였다.

김우진으로 하여금 계약을 어기게 만들 미끼.

그들이라고 김우진이 강하다는 것을 왜 모르겠나.

오히려 그 어떤 신보다 잘 알았다. 김우진이 어떻게 신을 죽이는지 보았고 싸웠으며 평화를 제안한 장본인들이니까.

그렇기에 더욱 더, 김우진을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신을 던졌다. 대놓고 자신을 방해하는 신들에게 분노한 김우진이 이성을 잃고 계약을 깨트리기를, 그래서 심연에 떨어지기를 바랐다.

김우진을 심연으로 떨어트린 대가로 지불할게 신 둘의 목숨이라면 더 없이 싸니까.

“역시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다는 거겠지.”

“두 신을 죽이고 분노한 상태에서도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인 놈이다. 그렇게 쉽게 이성을 잃을 리가 없지.”

칼카르가 코웃음쳤다.

“말만 하지 말고 좋은 생각 있나?”

“부족한 거다.”

그의 물음에 베리안이 대답했다.

“두 신은 패배했고 탈옥수는 다시 연옥으로 잡혀갔다. 결국 김우진은 약간의 짜증을 얻었을 뿐, 아무것도 손해본 것이 없다.”

그러니 김우진이 굳이 이성을 잃을 이유도 없다.

“동기가 불충분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충분한 동기를 채워주어야지.”

반대로 말하면 만약 그 동기가 충분하다면?

“그만 뜸들이고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해라.”

“김우진에게 있어 중요한 것을 날려버리면 그만이다. 지금 놈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건 두 가지지. 하나는 연옥.”

“연옥을 날려버리자고? 나보다 더 미친 소리를 하는군.”

“연옥은 계약으로 묶여 있다. 연옥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우리 또한 계약을 어기는 꼴이 된다. 본론을 말해라.”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놈이 신살을 하게 된 계기.”

“···알베니우스?”

“그래.”

베리안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마침내 놈의 흔적을 찾았다.”

* * *

어쩐지 조금 이상하다 싶었다.

무려 40년이나 지났는데 그때에 비해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그게 다 이유가 있었다.

“얼마나 됩니까?”

“정확히 281명.”

“많기도 하군요.”

그 정도의 집행자들이라면 백신전의 관리자들과 비교해도 상위 1%다.

애초에 용사란 그리 흔하지 않고 그 중에서도 특출 난 집행자는 더 흔하지 않으며 권속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 나름대로의 손해를 감수해야하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관리자들이 용사들 중에서도 고르고 고르는 거고.

그렇게 따지면 281명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전원 용사라는 점에서 대단해보이지만 관리자들이 한 번 거른 자들이 대부분일 가능성이 높으니.

물론 물량이라는 건 어디서나 힘이 되긴 하지만.

“용케 그들을 모을 때까지 들키지 않았습니다?”

관리자들의 감시와 추적이 결코 느슨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차원용이라고 한들 그게 가능한 건가?

“들켰었지. 그래서 죽을 뻔 했고.”

하지만 결국 살았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신들을 이길 수 없어.”

그래, 세상은 넓고 인재는 많다.

시간만 충분히 혹은 막대히 들인다면 용사나 집행자 수준의 강자는 얼마든지 수급할 수 있다. 알베니우스가 끌어들였다는 281명의 전직 용사가 그 증거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신, 혹은 관리자.

직접적으로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은 초월자들은 같은 초월자들로 밖에 상대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이 아닌 초월자들은 없다.

김우진이라는 예외가 아니고서는.

차원룡의 마지막 생존자인 알베니우스가 아니고서는.

뿌리를 내려 그 차원에서만큼은 신에 준하는 힘을 발휘하는 세계수들을 제외하고서는.

예외는 예외이기에 예외다. 예외가 많다면 그건 예외가 아니라 일반적인 평균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네가 필요하다.”

“저는 아직 함께 한다고 안 했습니다.”

“정말로?”

“가능성이 희박한 도박에 몸을 던지는 취미는 없어서.”

“신들에게 죽어나간 네 동료들을 잊었나? 너와 친하게 지내던, 결국 너에게 모든 것을 바쳤던 내 동족, 팔란크는?”

“그렇게 표현하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무엇보다 애초에 저는 당장 관리자들과 싸울 수 없습니다.”

“계약 때문인가?”

“예.”

김우진은 백신전과 계약으로 묶여있다. 계약이 종료되지 않는 한, 서로는 서로를 죽일 수 없다.

“50명의 죄수들을 출소시킬 때까지라고 했나. 아직 많이 남았군. 하지만 고작 20년 사이에 7명이나 내보냈으니 신들이 조바심을 낼만도 해. 네가 소장을 맡기 전까지는 평균적으로 백 년에 한 명 꼴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나는 네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어.”

알베니우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의 계약이나 연옥의 생활, 그리고 능히 신을 상대할 만한 강자가 있는 차원도.”

“···신이 아니면서 신을 상대할 만한 강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겁니까? 나나 당신 말고?”

“그래. 정확히는 존재‘들’이다. 아니, 들이었지.”

들?

“최초의 신살자는 분명히 너다. 하지만 신들의 폭거에 그 누구도 저항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는 마라.”

아주 오래 전, 신들의 탄압에 분노하여 들고 일어난 자들이 있었다.

신체는 산보다 크고 단단했으며, 권능이 깃들어 신조차 무시할 수 없던 자들.

“그리고 우주의 힘을 가진 종족이 오로지 차원용뿐이라고도.”

아카식 레코드의 선택을 받아 백신전에 소속된 것이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우주의 힘을 품고 태어난 자들.

그렇기에 신들의 미움을 받아 차원용들보다 먼저 척살된 자들.

“타이탄(Titan).”

신이 아니면서 신의 힘을 가진 위대한 종족.

“거인족?”

“거인족과 비교하지 마라. 인간에 비하면 조금 덩치가 큰 거인족에 비해 타이탄은 진짜 세상을 덮는 거인이니까. 타이탄들이 네 말을 들으면 무덤에서 뛰쳐나와 차원을 쪼개버릴 거다.”

“그런 종족이 살아 있다는 겁니까?”

“그래. 신과 대적한 자들을 찾아다니던 중, 우연히 신들의 눈길조차 닿지 못하는 차원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신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를 찾았다.”

신들을 향한 복수심으로 넘쳐나는.

“그래봐야 신들에게 패배한 자들 아닙니까.”

“그러나 신들이 경계하여 멸족시켰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하물며 유일한 생존자다.

“그 생존자가 신들의 눈을 피해 어떤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복수를 위해 어떤 준비를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

알베니우스의 물음에 김우진은 부정하지 못했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알베니우스가 지난 40년간 281명의 전직 용사들을 끌어들였다.

그렇다면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오랜 시간을 곱씹으며 불타던 유일한 생존자는 어떤 준비를 해놓았을지.

그것이 과연 신들에게 유효한지, 그렇지 않은지.

“···지금 가면 됩니까?”

“급하군. 뭐, 상관은 없다. 사실 이것 때문에 급하게 돌아와서 널 부른 것이기도 하니까.”

알베니우스가 내민 손을 김우진이 맞잡았다.

그 순간, 차원이 갈라졌다. 둘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 저는요?”

홀로 남은 율리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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