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60화 (60/150)

# < 059. 진화 >

“그동안 어떻게 지냈습니까?”

알베니우스를 만나면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허나, 정작 마주하고 나니 가장 먼저 나오는 건 간단한 안부였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안정적인 마나가, 그리고 방금의 전투로 인해 그가 어떤 상태인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많은 일이 있었지만 간략하게 표현하자면 내내 도망자 신세였지.”

과연. 김우진이 알베니우스를 알기 전부터 그는 도망자 신세였다.

추격자는 당연히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의 앞잡이, 집행자들이었다.

“도망치면서 간신히 상처를 회복했다. 그리고 신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그들에게 적대감을 가진 자들을 규합했지.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왔군.”

“많은 것이 생략되었군요.”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기니까.”

헤어지고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다. 전부 이야기하려면 몇 달도 부족했다.

“그러는 너는? 연옥의 소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 꽤나 놀랐어. 결국 신들의 앞잡이가 되어버린 건가 싶다가도 내가 아는 너라면 절대 신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되지 않았다. 김우진이 연옥의 소장이 된 것은 어디까지나 거래였다.

동료들을 잃어버린 게 처음인 백신전의 신들에게도, 모든 신들을 상대할 자신도 능력도 없는 김우진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솔직히 그건 김우진에게 행운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은 결코 두 번 오지 않을 것이다.

신들은 죽음이라는 미지에, 피조물 주제에 신을 죽일 무력을 가진 김우진이라는 미지의 존재에 잠시 겁을 먹었을 뿐이다.

김우진도 죽음도 더 이상 미지가 아니게 되었으니 신들의 양보는 더 이상 없다.

“그 이야기 좀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

“관리자들에게 적대감을 가진 존재들을 규합하고 있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만나서 반가운 건 맞지만 둘 사이는 단순히 서로의 안부만 묻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려고 절 부른 것 아니었습니까?”

“···역시 넌 성격이 급해.”

알베니우스가 웃었다.

* * *

- 자, 이야기를 나눌 때 음료가 없으면 섭하지. 한 잔씩 마시렴.

세계수의 가지들이 음료 세 잔을 내왔다.

산뜻함과 달콤함을 비롯한 여러 복합적인 풍미가 넘쳐나는 술이었다.

“뭡니까?”

- 만 년 넘은 세계수의 수액을 발효시킨 술.

- 신들도 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지만 쉽게 구하지 못하는 보물이란다.

“그러니까 당신의 수액이라는 거 아닙니까.”

- 그래서 갑자기 마시기 싫어지니?

“딱히, 그런 건 신경 안 씁니다.”

벌컥, 김우진이 술을 들이켰다. 세계수의 수액이 발효된 술은 과연 맛과 풍미가 남다르다. 특히 만 년이 넘은 세계수의 수액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약이 따로 없다.

“감사해요, 어머니 나무님!”

알베니우스와 율리아도 차례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일단 당신의 목적부터 들어봅시다. 무엇이 하고 싶은 겁니까?”

“세계수가 말하지 않았나?”

“말했습니다.”

“세계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군.”

“교차 검증하고 싶을 뿐입니다.”

목을 축인 알베니우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와 내 동족들은 아주 오랜 세월, 신들의 미움을 받고 탄압 당했다. 지금은 오직 나밖에 남지 않았지.”

알베니우스는 살아남고자 발버둥 쳐왔다.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감히 신들에게 대항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신이니까. 신이기에.

하지만 40년 전, 그 일이 있고 난 후 알베니우스는 마음을 바꿨다.

“저 때문입니까?”

“네 덕분이지. 네가 신을 죽였으니까.”

우주가 생겨난 이래로 처음이었다. 신은 오직 생겨나기만 했지, 죽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 절대불변의 법칙이 깨졌다. 신 또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도망친 곳에 해답은 없어.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신들은 알베니우스를 포기하지 않는다. 않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도전자를 반기지 않기에.

때문에 알베니우스에게 평화가 찾아오기 위해서는 백신전이 무너져야 한다. 그가 죽든, 신들이 죽든 한쪽이 몰락해야 끝나는 판이니까.

“그러니까 결국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일을 벌이고 있다는 거군요.”

“어쩔 수 없지만 대책이 없는 건 아니야. 40년 동안 놀고만 있지는 않았으니까.”

신들의 눈을 피해 신에게 적대감을 가진 자들을 모아왔다.

“대부분 용사였던 이들이지.”

이용만 당하고 토사구팽된 자들. 신을 향한 적대감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반대로 말하면 더 이상은 용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자들을 천 명, 만 명 모아봤자 신 하나 못 잡습니다.”

상대가 신과 집행자들인만큼 벽을 넘은 자들이 필요하다. 일개 피조물들은 아무리 모아봐야 피조물일 뿐이다.

인간 앞에서 개미는 결국 개미니까.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힘을 주면 다시 전성기를 되찾을 자들이란 뜻이지.”

“힘을 준···. 설마?”

“맞아. 사실 너한테 볼품없이 밀린 것도 다 그 때문이지.”

“한 둘이 아닐 텐데요?”

“그러니 더 좋지.”

알베니우스의 눈이 희열로 가득찼다.

* * *

“···이해를 못하겠어요.”

율리아는 둘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기본 바탕이 달랐기 때문이다.

- 율리아, 너는 용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니.

“음, 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 신의 힘을 받은 자들?”

- 정확하구나. 그렇다면 그 신의 힘이란 과연 무엇일까.

이전의 율리아라면 전혀 감을 잡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용사로서 활동하고, 연옥에 갇혀 김우진과 함께 하다 보니 그녀는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카식 레코드와 연관이 된 것 아닌가요?”

- 맞단다.

- 정확히는 아카식 레코드가 부여하는 우주의 힘이지.

아카식 레코드란 우주의 흐름과 법칙, 그 자체다. 인격체라기보다는 우주를 관장하는 거대한 의지라고 보는 것이 옳다.

신이란, 그 의지에게 우주의 힘을 부여 받은 자들을 뜻한다.

혼란스러운 우주를 안정시키기 위해.

“···그래서 소장님이 관리자라고.”

그제야 율리아는 어째서 소장이 신들을 관리자라고 부르는지 보다 명확히 깨달았다.

신들은 진짜 관리자들이었다. 단지, 그들을 고용한 고용주가 아카식 레코드라는 범우주적인 차원의 의지일 뿐이었다.

- 빛이 있으면 어둠이 존재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란다.

- 신들이란, 아카식 레코드가 선택한 ‘빛’이고.

그 능력은 신이라는 이름에 결코 부끄럽지 않았다.

- 허나, 아카식 레코드에게 선택 받았기에 그들은 함부로 세상의 균형을 어지럽힐 수 없단다.

- 상위 차원이 아닌 곳에서는 제약이 따르고 자연스레 하위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이 줄어들었지.

하지만 그들에게는 빛으로서 어둠을 물리쳐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그래서 용사들이 탄생했다.

- 자신들이 부여 받은 우주의 힘 일부를 용사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란다.

우주의 힘이란 피조물을 뛰어넘는 힘. 피조물로 하여금 악을 멸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쯤 되자 율리아는 또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 신들이 용사들을 핍박하고, 토사구팽하는지.

“그 나누어줬던 힘을 다시 돌려받기 위해서군요!”

- 그래.

- 용사가 스스로 힘을 포기하면 다시 신에게 돌아가지만 허무하게 죽으면 신이 아닌 아카식 레코드에게 돌아가니까.

물론 그렇다고 신들의 힘이 용사를 만들수록 깎여나가는 건 아니다. 긴 시간이 필요할 뿐, 어떻게든 수복할 수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 긴 시간을 감내하고자 하는 신은 없었다. 피조물들이 살아가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야 천년이고 그 안에 스스로 포기하게만 만들면 되는 것을 그 이상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서.”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단순히 자신들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 효율을 위해서.

- 물론 그들이 힘을 가지고 돌아갔을 때, 다른 차원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도 있긴 할 거란다.

하지만 그 정도가 앞선 두 개 보다는 크지 않을 것이라 세계수는 단언했다.

“그러면 알베니우스님이 용사들의 힘을 돌려준다는 것은?”

- 이 세상에는 몇 가지, 특별한 종족들이 있단다.

어째서인지 탄생과 함께 우주의 힘을 쥐고 태어난 자들.

신들의 전유물이라는 차원이동을 너무도 쉽게하는 자들.

- 그렇기에 자신들이 남들보다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여기는 신들에게는 더 없이 눈에 가시와 같은 자들.

그래서 신들에게 핍박과 박해를 받고 오직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종족이 멸족한 자들.

- 차원용.

알베니우스는 그 유일한 생존자였다.

* * *

“···제기랄. 내가 대체 왜.”

드네르바가 욱신거리는 팔과 다리를 부여잡았다.

합당한 이유를 핑계로 김우진에게 맞은 자리였다. 그의 마나가 그녀의 육신을 파고들어 주요 지점들을 틀어막았다.

고통은 배가 되고 치유는 늦어졌다. 그녀가 신인 이상 결국 완치가 되겠으나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모습을 백신전의 신들 앞에서 보여야만 했다.

김우진의 제안은 어디로 보나 합리적이었다.

베른을 잃고 유일하게 도망친 그녀의 입장에서 다른 신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하지만 그건 그녀의 위신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두 명의 신이 한 명의 필멸자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다. 수십의 집행자들이 함께였으며 신의 권역이었다.

그럼에도 졌다.

단순히 패배가 아니었다. 압도적으로 짓눌렸다.

신 하나는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 다른 신은 이 추잡한 모습을 그대로 백신전의 신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패배의 증거로.

“···하하. 내 꼴이 참 우스워. 그렇지 않아?”

“신이시여.”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부르지 마. 더 열 받으니까.”

그녀를 보필하는 집행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분노가 무서워서이기도 했지만 차마 그 말에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우진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던 그 모습은 도저히 신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차라리 김우진이 신이라면 모를까.

때문에 그는 화제를 돌렸다.

“들어가셔야 합니다.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 그래.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아니 그보다 더 못한 취급을 받으러 가야지.”

목숨을 구걸한 대가는 컸다. 하지만 드네르바는 치솟는 분노보다, 앞으로 감당해야할 수치심과 모욕감보다 목숨이 더 소중했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거니까.

‘적어도 김우진은 쉽게 죽을 놈이 아니야.’

백신전의 승리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김우진 또한 쉽게 당할 인간은 아니었다.

최소한 몇 이상의 신들은 더 그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걸 이용하는 게 옳다. 목줄이 씌워졌지만 목줄을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는 법 아니겠나.

‘그 공석만큼 내가 올라갈 수 있어.’

그래, 이건 기회다. 김우진의 끄나풀이 되어 위험 부담이 생겼지만 반대로 다른 이들보다 먼저 김우진에 대한 정보들을 알 수 있다. 그걸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신의 위신을 떨어트렸다고? 그렇다면 당신들이 해보지 그래? 거기 앉아서 주둥만 나불대지 말고 말이야.”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모욕하는 신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 * *

- 삐삐삐!

“으음.”

호랑이가 없으면 여우가 왕이다.

세계수는 김우진을 가장 좋아하지만 김우진이 없으면 율리아를 찾는다. 그리고 율리아마저 없으면 시에나를 찾는다.

세계수의 정령체, 파랑새가 그녀의 앞에서 아른거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그런 이유다.

하지만 이 정령체가 과연 그녀가 알던 정령체가 맞는지, 시에나는 의문이었다.

파지직-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튀어나오는 스파크라니.

“······.”

세계수를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게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았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해부해봐도 되나?”

“미쳤어?”

“크흠, 아니, 번개를 내뿜는 세계수라니 이건 아주 귀한 연구 자료···.”

- 삐이이이!

“끄아아악!”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에 맞은 데르카인이 바닥을 굴렀다.

“···소장이 빨리 와줬으면 좋겠는데.”

분명히 떠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세계수가 이상할 정도로 자라나 있었다.

으음. 그래도 문제없는 거겠지?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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