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58. 봉인 >
당장이라도 달려가 묻고 싶은 게 많다.
그날 이후, 어떻게 지냈는지, 신들을 상대로 어떤 계획을 짰는지, 정말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지.
하지만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다.
당장은 알베니우스를 만나는 것보다 자칭 하늘의 신 케이룸, 베른 오르티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급하다.
당장은 볼품없이 기절해 집무실 바닥을 뒹굴고 있지만 명색이 관리자다. 김우진이나 그에 준하는 자가 아니면 문제없이 관리할 수 없으나 그렇다고 김우진이 항시 붙어 있을 수도 없다.
그렇기에 김우진은 신목에서 방안을 찾았다.
- 삐삐?
“그래. 네가 맡아 줬으면 해.”
세계수는 신목이다. 누가 붙였든, 세계수는 신이라는 이름이 전혀 아깝지 않은 나무다.
그들의 뿌리는 능히 아카식 레코드에 닿을 수 있으며 그들의 권능은 상황에 따라서는 관리자들에 필적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뿌리는 능히 약해진 신을 구속할 수 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봉인이 더 옳다.
“뿌리로 옭아매고 깊숙이 묻어. 움직임을 봉쇄하고 마나가 요동치면 흡수해서 힘을 줄여.”
절대로 깨어나지 못하도록. 세계수로 하여금 봉인하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봉인 상태인 이상, 베른은 세계수의 일부가 된다. 하늘구름으로 함께 기운을 감출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힘이 증폭된 릴리를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최선의 방법이다.
“···이게 가능할까요?”
율리아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의심은 타당하다. 세계수로 신을 봉인하는 건,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은, 그렇기에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미지였으니까.
그래서 릴리의 의중이 중요하다. 결국 모든 건 릴리에게 달렸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 삐삐.
“···정말요? 가능은 할 것 같다고 하세요.”
- 삐이이이?
“하지만 그 대가가 무엇이냐고 물으시네요. 정말, 왜 이렇게 속물이 되신 건지···. 이건 다···.”
가늘게 뜬 율리아의 시선이 김우진에게 향했다.
“릴리, 신의 힘이야. 그것만으로도 대가는 충분한 것 같은데?”
- 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하시는데요.”
“뭘 원하는데?”
- 삐삐삐.
“앞으로 자리를 자주 비우지 말고 매일 찾아오라는···쳇, 눈꼴 시려서 정말. 어머니 나무님! 제가 매일 찾아왔잖아요!”
“그 정도라면야.”
생각보다 무난한 방법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가 기쁨의 날개짓을 하며 김우진의 품에 안겼다.
“그런데 데이드람은 갔다 와야 하는 거 알지?”
- 삐삐.
“생물학적 어머니한테 안부 인사 전해주라네요.”
그리고 잠시 후.
릴리가 베른을 인계 받았다.
수 십, 수 백 개의 가지와 뿌리들이 천천히 베른을 감쌌다.
파지직, 관리자의 힘이 미약하게 저항했으나 세계수의 뿌리는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내려가는 지독한 녀석들이다.
베른의 육신에 자연스레 걸쳐져 있던 방어 기재가 모조리 뚫렸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놈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자신을 옥죄는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에 그가 당황했다.
“세계수···? 세계수라고?”
연옥에 어떻게 세계수가 심어져 있는지 의심도 잠시, 세계수가 무엇을 하려는 지 깨달았다.
“이 따위 나무로 나를 억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김우진을 발견한 베른이 분노했다. 허나, 그것은 겁먹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짓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가 말했지.”
김우진이 이를 악문 베른과 눈을 맞췄다.
“후회하게 될 거라고. 넌 마지막 기회를 놓쳤어.”
“이 반역자 놈! 네놈, 대체 어떻게 연옥에 세계수를 들인 거냐! 대체 언제부터!”
“얼마 되지는 않았어. 물론 네가 오기 전이었지만.”
“그럴 리가···. 내가 세계수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당황하는 놈의 모습을 보니 꽤나 즐거웠다. 김우진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앞으로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에 묶인 채 힘을 쭉쭉 빨려나갈 거야. 나무에 영양분을 공급하는 거름이 되는 거지.”
“···내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것보다 더한 일을 하고도 무사했어.”
감사하게 여겨.
“계약 때문에 관리자들을 죽이지 못해서 목숨이라도 붙여놓는 거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베른은 이미 진즉에 죽었다.
“아무튼, 너는 거름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거야. 적어도 내가 계약을 끝내고 연옥의 소장직을 벗어던지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 다음 일은 뻔하다.
“그러니까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반성하고 있어.”
“넌 결코 백신전을 이기지 못한다! 나와 드네르바는 제대로 된 신도 아니었어!”
“이제와서? 그리고 자꾸 잊어먹나 본데.”
콰득, 김우진의 손이 베른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가해지는 압력에 베른이 신음을 삼켰다.
“너희들이 관리자가 될 수 있도록 전임자를 죽여 버린 게 나야.”
두 번을 했는데 세 번은 못할 것 같아?
“앞으로 98번만 반복하면 돼.”
물론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계약이 있는 한 김우진이 저들을 죽이지 못하는 것처럼, 저들도 김우진을 죽이지 못한다.
살아만 있다면 기회는 또 생긴다.
“그리고 그런 건 내 전문이야.”
그건 연옥의 소장이 되기 전에 수도 없이 반복했던, 가장 자신 있고 잘하는 일이었다.
* * *
세상이 뒤집어지면서 바뀌었다.
마나가 지나칠 정도로 풍부한 연옥과는 다른 공기와 마나의 분포. 데이드람에 오는 건 두 번째다.
“역시 데이드람은 뛰어난 차원이야.”
세계수가 있는 차원들은 대부분 그렇다. 부화할 때는 막대한 마나를 잡아먹는 세계수는 어느 정도 성장하면 반대로 마나를 보다 정순하고, 풍부하게 만드니까.
어린 세계수들은 그 범위가 한정적이지만 만 년을 넘게 살아온 세계수라면 능히 차원 전체로 퍼트릴 수 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김우진과 율리아가 떨어진 곳은 엘프들의 숲이었다. 세계수가 그리 멀지 않은 곳.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엘프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러니까 이름이···.”
“발라크입니다. 김우진님.”
“아, 기억났어.”
“율리아님도 오랜만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오랜만이에요. 발라크님.”
발라크와 엘프들의 인도에 따라 숲의 내부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두 분만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이전과 똑같이 세계수가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그들은 사라졌다.
“이번에는 새는 안 보이네.”
“기다리고 계신 모양이에요.”
길은 짧았고 세계수는 멀지 않았다.
- 어서 오렴.
거대한 나무 앞, 이전과는 다르게 꽤나 거대해진 새 한 마리가 오연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나무님, 다시 뵙게 되어 기뻐요.”
- 숲의 아이야. 나도 마찬가지란다. 생각보다 빨리 너를 볼 수 있게 되어 더 기쁘단다.
“이번에는 참새가 아니군요.”
- 그 모습이 좋다면 다시 바꿔줄 수도 있단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형태가 작은 참새로 줄어들었다.
“딱히,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 후후, 겉모습 같은 게 무엇이 중요하겠니. 내가 너희들을 불렀고, 너희들이 내 앞에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참새가 웃었다.
“그래서 알베니우스는 어디 있습니까?”
- 성격이 급하구나.
“그를 만나기 위해서 왔으니까요.”
- 허나, 그는 너를 바로 만나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더구나.
“무슨 뜻입니까?”
- 너를 끌어들여도 될지, 안 될지 고민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우스운 소리군요.”
김우진이 픽 웃었다.
율리아를 보내 그를 끌어들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알베니우스를 잘 아는 김우진은 그 말 뜻을 이해했다.
화륵, 불꽃의 검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어···, 소장님?”
“다치기 싫으면 물러서. 세계수께서도 물러나시지요.”
- 나는 뿌리가 차원의 중심까지 내려져 움직일 수가 없단다.
하지만 내 몸 하나를 지킬 수는 있지. 세계수의 강대한 마나가 율리아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강대한 마법 방어진이 주변을 감쌌다.
그 직후, 김우진이 움직였다. 불꽃이 잔불을 흘리며 세계수의 옆에 있던 바위를 베었다.
베어버리는 줄 알았다.
───!
검이 바위에 닿기 직전, 수십 개로 중첩된 마법진이 검을 흘려냈다. 불꽃을 튕겨냈다.
미미한 떨림, 바위는 곧 인간의 형태가 되었다.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새하얀 백발에 하얀 눈.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행색의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흩어지는 마법에서 느껴지는 마나, 낯익은 목소리, 익숙한 얼굴.
“알베니우스.”
정말 그였다.
“그래, 나다.”
새하얀 마나가 움직인다. 반투명한 비늘이 그의 전신을 뒤덮는다. 신의 공격도 견뎌내는 우주의 어떤 것보다 단단한 비늘, 용린.
“오랜만이다, 김우진. 그때 내가 죽을 뻔한 걸 구해준 이후로 처음이니, 대략 40년 만인가?”
“아마도 그 쯤 되었을 겁니다.”
─!
검과 손톱이 충돌한다. 으깨지는 불꽃과 마나가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를 발산한다.
콰콰콰!
부서지는 대지와 흩날리는 나뭇잎, 부러지는 잔가지들에 세계수가 방어 마법진에 마나를 더 실었다.
또 다른 손톱이 다른 각도를 그린다. 허공에 상흔을 남기며 전진한다. 김우진 또한 쌍검으로 응수한다.
─!
──!
한 순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이어진다. 붉은 파도와 하얀 파도가 뒤섞여 엉킨다.
“···엄청나게 성장했군. 그 애송이가 이렇게까지 되다니.”
“그거 아십니까?”
카가가각, 김우진의 검이 기묘한 각도를 그린다. 손톱을 쳐내고 측면을 파고든다. 하얀 오러가 방패를 만들어내지만 그대로 뚫어낸다.
“이런!”
급하게 영창된 마법 수 백개가 연달아 쏟아진다. 허나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불꽃이 모든 것을 상쇄시킨다.
그 폭발의 범람 속에서 붉은 검이 틈새를 꿰뚫는다.
남자를 지키는 모든 마법을 부수고, 용린을 찢는다.
그리고.
“당신을 뛰어 넘은지는 이미 오래 됐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구해줬죠.”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하하.”
본능적으로 양손을 들어올린 남자, 알베니우스가 헛웃음을 지었다.
“신들에게 붙잡혀 수십 년간 고초를 겪었다길래 약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군.”
“딱히 고초랄 것도 없습니다. 조금 지루하긴 했지만.”
“솔직히 놀랐어. 신들을 증오하던 네가 신들의 개가 되었다고 해서.”
“훗날을 위한 계약일 뿐입니다. 자살폭탄 테러는 취미가 아니라서.”
알베니우스가 손을 내렸다. 김우진이 검을 소멸시켰다. 알베니우스가 손을 내밀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군.”
“마찬가지입니다.”
김우진이 그 손을 잡았다.
“굳이 한 번 싸우고 인사를 나누는 이유는 뭘까요?”
율리아의 궁금증에 대답한 건 세계수였다.
- 확인하는 거란다.
- 끌어들여도 되는지 안 되는지.
“소장님을 끌어들이라고 한 건 알베니우스님인데요.”
- 김우진은 신들을 죽이고 고초를 겪었거든. 그가 약해졌는지, 그대로인지, 아니면 더 강해졌는지 알아야 그에 맞춰 대응하지 않겠니?
“그것도 그렇네요.”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신 둘을 상대해서 한 명을 포로로 잡아온 김우진이었으니까.
‘이게 약해진 거라면 그것 나름대로 소름이···.’
율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나름 자신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격이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됐으니 제 임무는 끝났네요.”
알베니우스와 데이드람의 세계수가 율리아에게 부탁했던 것은 세계수의 씨앗을 연옥에 심는 것.
세계수를 이용해 연옥을 무너트리고 신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었다. 더불어 김우진을 설득하는 것까지.
비록 연옥을 무너트리진 않았지만 그 외에 모든 것을 완수했다. 율리아가 할 일은 더 없었다.
- 그래, 정말 수고 많았단다.
작은 참새의 날개가 율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예상보다 더한 성과를 얻었으니.
- 이제.
-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지.
그러기 위한 알베니우스와 김우진의 상봉이기도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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