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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57화 (57/150)

# < 056. 집으로 >

구두뿐인 맹세는 믿지 않는다.

신의 말에는 힘이 있다고 하지만 신이기에 어느 정도 감당할 여력이 있다.

때문에 김우진이 믿는 건 하나, 그를 연옥에 묶어둔 우주의 법칙이다.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

결코 어길 수도, 어겨서도 안 되는, 신조차 피해갈 수 없는 맹약.

“아카식 레코드의 계약서를 만들어라.”

“나, 나는 말단 신이라서 아카식 레코드에 접근할 권한이 없어.”

“허튼 수작을 부리면 베른과 똑같이 될 거다.”

애초에 신이 특별한 이유는 아카식 레코드에게 권능과 권한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김우진이 그들을 관리자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모든 신들은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빌려 계약을 할 수 있다.

“···알았어. 그전에 이 불꽃 좀 없애줬으면 좋겠는데. 개수작이 아니라 힘을 모조리 잡아먹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거든. 아카식 레코드의 권능을 빌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잠깐 노려보자 드네르바의 입이 바쁘게 움직였다. 알고 있었기에 불꽃을 거두어 들였다. 그리고 잠시 동안 힘이 회복하게 기다려주었다.

그러길 한참, 신의 권능이 요동쳤다. 새하얀 빛의 계약서가 드네르바의 손에 들렸다.

김우진이 계약서를 건네받았다. 느껴지는 우주의 기운은 그때와 같다. 결코 가짜가 아니다.

“풀 네임.”

“드네르바 아르사.”

“거짓말은 아니겠지?”

“바로 들통 날 거짓말을 할 정도의 멍청이로 보여?”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원하는 조항들을 적었다. 아카식 레코드는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계약 존재와 감응하는 고차원의 계약서다. 가짜를 적으면 진짜로 바뀌니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서명해라.”

“···잠깐만, 이건 불합리해! 완전 불공정 계약이잖아!”

[연옥의 소장, 김우진을 ‘갑’이라 칭한다.

백신전의 일원, 드네르바 아르사를 ‘을’이라 칭한다.

1.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2.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에게 해를 입힐 수 없다.

3. 을은 어떠한 경우에도 갑이 원하는 정보를 빠르게 알려준다.

4. 단, 갑이 원할 경우, 모든 조항에 예외가 존재할 수 있다.

5. 위 조항들을 어길 시, 을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심연으로 끌려간다.]

“무조건적으로 내가 손해 보는 계약이잖아!”

“패자와 승자가 같은 조건에서 계약을 맺을 이유가 있나?”

“···그건.”

맞다. 드네르바는 패배자였고 승자의 자비를 구걸해야하는 처지였다.

“하지만 명색이 신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일에는 채찍과 당근이 동반되어야 한다. 적절한 보상이 없이 강제하고 억압하기만 해서는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김우진이 계약서에 항목을 세 개 추가했다.

[6. 갑은 을이 계약 사항을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도록 협력한다.

7. 갑은 을의 정체를 함부로 발설할 수 없다.

8. 백신전이 붕괴되었을 때, 혹은 백신전에 의해 갑이 사망하였을 때 이 계약은 종료된다.]

“···이건?”

“이 정도면 충분히 호의를 베풀어 준 거다. 서명해라.”

“···아까보다는 조금 낫네.”

일단 기한이 생겼다는 것이, 김우진의 승패에 상관없이 벗어날 구멍이 생겼다는 것이, 그리고 김우진이 의도적으로 그녀를 토사구팽 할 수 없다는 것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확인한 드네르바가 어쩔 수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김우진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는 그 순간, 계약서가 빛으로 화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는 김우진과 드네르바의 몸속으로, 일부는 저 차원 너머의 우주 속으로.

간단해 보여도 우주의 법칙인 아카식 레코드의 힘을 빌린 권능이다. 설사 신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어길 수 없는 계약이 두 사람을 옳아 매었다.

“그럼 마무리를 지어볼까?”

“마무리? 끝난 거 아니야?”

“내가 너희들이랑 드잡이질 하러 여기 온 줄 알아?”

어디까지나 연옥의 소장으로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다.

“어디 있어?”

집 나간 탈옥수를 찾으러 갈 시간이다.

* * *

김우진은 기절한 베른을 드네르바가 짊어지게 했다.

“집행자들도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싫다고?”

“누가 싫다고 했어? 그냥 그렇다는 거지.”

김우진은 다시 섬으로 돌아갔다.

전투는 섬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벌어졌으나 신들의 대전은 섬에 영향을 끼쳐 섬의 대부분을 소멸시켰다.

그나마 그건 약과였다. 증발한 바닷물과 충격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크레이터는 차원 전체의 해수면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으니까.

아마 케이룸의 인류는 갑작스러운 현상에 꽤나 당황스러워할 거다.

“신이시여!”

그때, 누군가가 달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성녀?”

성녀였다. 어째서 그녀가 무릎을 꿇는가. 김우진은 잠시 생각했다.

“네 신은 거기가 아니라 여기 내 어깨 위에 있거든?”

“사이비 가짜는 닥쳐주셨으면 합니다.”

“···사이비 가짜? 지금 나한테 한 소리는 아니지?”

“당신한테 한 소리가 맞습니다. 정확히는 당신과 당신 어깨 위에 있는 기생충들에게 한 소리입니다.”

“···기, 기생충?”

드네르바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베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일개 집행자 주제에 감히 신에게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녀의 분노에 감응한 주변의 마나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신에게 그러면 그러하겠죠.”

“그게 지금 무슨 뜻일까?”

“신이 아니면서 신인 척 하는 가짜들에게는 이 정도도 과분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그거 내가 가짜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아직도 아니라고 말할 참입니까?”

“뭐라고?!”

“신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완벽하기에 신입니다! 헌데 그런 신이 패배한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허나, 당신들은 패배했습니다. 그럼 결론은 간단합니다. 당신들은 애초에 신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람을 속이는 이 가짜들.

성녀가 경멸의 눈초리를 보냈다.

“나는 진짜 신이야!”

“진정한 신을 보았으니 더 이상 사특한 가짜에게 속지 않습니다.”

광신도와 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신이 무어라 하든 이미 등을 돌린 광신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성녀는. 아니, 신앙을 잃어버린 집행자, 디아네 디트린은 그대로 김우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머리를 조아리고.

“디아네 디트린이라고 합니다.”

발에 입을 맞췄다.

극도의 경배에 김우진이 움찔했다.

“···지금 나보고 하는 소린가?”

“예. 당연한 말씀이십니다.”

“나는 신이 아니다만.”

“더 이상 저를 시험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불민하고 믿음이 부족하여 처음에는 당신을 의심했으나, 이제는 진실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지?”

“신은 완벽한 존재입니다. 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신은 패배할 수 없습니다.”

한 점의 티끌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신이다. 그렇기에 숭배 받고 신앙의 대상이 되는 존재다.

그렇기에 패배한 이들은 신이 아니다. 신이 될 수 없다.

“하물며 저 가짜들은 비록 가짜이나 가히 신이라 불릴 정도의 힘과 권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착각하고 진심으로 믿을 만큼.”

헌데 그런 자들이 꺾였다. 압도적인, 진짜 신의 힘을 보여주었다.

“오직, 오직 당신만이, 당신이야 말로 진정한 신이십니다!”

눈앞의 김우진이!

그가 신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신일까.

디아네가 더욱 머리를 깊숙이 조아렸다.

“부디 불민한 종의 믿음을 받아주시옵소서.”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과연 신께서는 자신을 용서해주실까. 감히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가짜를 섬기며 모욕했는데.

아무리 가짜들에게 속았다고는 하나 신을 욕한 입은 그녀의 입이었고 신을 공격한 손은 그녀의 손이었다.

“···재미있네.”

잠깐의 침묵. 한참 후 들려오는 신의 고귀한 음성에서는 권태와 흥미가 느껴졌다.

“허나, 나는 신이 아니야.”

“그게 신의 뜻이라면, 따르겠습니다.”

“···단순히 그것만으로 이들이 신이 아니라는 추론은 꽤나 억지 아닌가? 집행자로서, 성녀로서 이들을 섬겨온 네가 무엇보다 잘 알텐데?”

“예, 맞습니다.”

성녀가 마른 침을 삼켰다.

“부끄럽지만 저는 저들의 하수인으로 꽤 오랜 세월을 일해 왔습니다.”

충성을 다하며 믿음을 바쳐왔다.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허나, 그렇기에 저들에 대해서 잘 알았다.

“백신전과 백 명의 신들. 그들이 모두 가짜가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그들이 보여준 힘과 권위는, 권능은 신이 아니라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다.

백신전의 신들 중에 분명 신들은 있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신은 아니겠지요.”

“그건 또 무슨 뜻이지?”

“백신전은 당신을 반역자라고 부릅니다. 하찮은 가짜들이 감히 진짜인 당신에게···!”

뿌득, 디아네가 이를 갈았다.

“아실지 모르지만 인간들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고 진짜를 반역자로 만듭니다.”

빈번하게, 아주 빈번하게 일어난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왕이 되기 위해.

“백신전의 신들 또한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당신을 반역자라 부를 이유가 없으니!”

이들은 찬탈자입니다!

“제가 당신과 함께 하겠습니다. 당신의 종이 되어 당신의 신앙을 널리 퍼트리겠습니다!”

잘못된 세상을 되돌리겠습니다!

“신 중의 신, 오직 하나뿐인 진짜 신. 이 세상의 주신이시여!”

성녀가 다시 한 번 신발에 입을 맞추고 김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무조건 옳다는 확신에 찬 눈동자에 김우진이 당황했다.

“···뭐?”

“조심해. 저거 완전 미친년이야.”

어느새 다가온 시에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 * *

성녀, 아니 디아네는 베른의 첫 번째 집행자이자 종이었다.

그녀는 베른의 모든 것을 알았고 거기에는 당연히 탈옥수, 카를로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감히 신의 관리를 거부하고 탈옥한 버러지는 하늘의 신전에 있습니다.”

“하늘의 신전?”

“저 찬탈자가 구름 위에 권능으로 만든 신전입니다.”

하늘의 신전에 도착하자 신전을 지키는 경비들이 보였다. 집행자는 아니나 차원에서 제법 강자 축에 속하는 자들이었다.

“성녀님, 이분들은?”

“위대한 분입니다. 카를로는 어디 있죠?”

“대지의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만, 케이룸님께서는 왜 저리···.”

“신경 끄고 비키세요.”

“···성녀님?”

“비키라는 말 안 들리나요?”

성녀가 도끼를 꺼내며 살기를 드러내자 경비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이쪽입니다, 주신이시여.”

“그 주신이라는 말 좀 안하면 안 되나?”

“아직 정체를 숨기길 바라시는군요. 하긴, 찬탈자들이 득세하니 은연 자중해 힘을 숨기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허면 무어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애초에 찬탈 되서 힘을 뺏겼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신은 완벽한 존재라며?”

“허나, 찬탈자들에게 주신의 위엄을 보이셨죠.”

“내 말 뜻이 그게 아니란 걸 알 텐데.”

“···당신은 주신이십니다.”

“아하.”

김우진은 디아네의 상태를 보다 명확히 파악했다.

광신은 신앙을 넘어선 신념이다. 평생을 믿어왔던 신념이 부서지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그녀는 그러한 세상을 복구해야만 했다. 자신의 신앙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김우진은 그러한 대체재였다.

자신이 믿던 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렇기에 맹목적으로 믿고, 주신이어야만 하는.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다르게 말하면 그녀의 신앙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김우진이 패배하지만 않는다면.

“이해했다. 안내를 계속해.”

“예.”

잠시 후, 디아네가 한 문을 열었다. 호화스러운 내부의 침대 위,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누···, 히이익! 어떻게?”

“오랜만이야, 카를로. 일탈은 끝났어.”

무형의 힘이 누워서 포도를 먹고 있던 카를로의 육신을 강제로 일으켰다.

“다시 집으로 갈 시간이야.”

아, 참고로 스페인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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