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54. 상태이상 >
“왜 여기로 왔나 했더니 엘프가 있었나.”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엘프. 꽤나 낯이 익다.
“강한데. 어지간한 집행자들 이상이야. 내 집행자로 삼고 싶네.”
드네르바가 입술을 핥았다.
“죄수다. 연옥에 오래 갇혀 있던 죄수지.”
“흐음, 감옥에 간 떨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제법이네.”
“그래봐야 죄수다.”
신의 뜻을 거역하고 반역자 김우진에게 붙은 얼간이.
원래 목표했던 셋은 아니었으나 쓸만해보여서 자비를 베풀어줬건만 감히 신의 제안을 발로 차버린 머저리.
“저런 우매한 년에게 쓸 시간 같은 건 없다.”
“과연, 저 자가 김우진이네.”
뇌쇄적인 눈빛이 김우진을 빠르게 훑는다.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 끝을 함부로 짐작할 수 없는 깊이에 드네르바가 경각심을 가졌다.
“네 말이 맞았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없다.
“아쉽게 됐네.”
발로란 섬은 대륙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진 곳이다. 엘프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되, 후환을 남기지 않고자 모두 처리하기 위해서 인류가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을 선정했으니.
덕분에 본래의 계획대로 모든 인류를 이용한다는 계획은 폐기다.
허나, 그렇다고 김우진이 대륙으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않나. 그 안에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약간의 덤일 뿐이다. 없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아.”
“같은 생각이야. 메이.”
“예, 신이시여.”
드네르바가 이끌고 온 집행자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감히 무도한 눈빛으로 신을 노려보는 저 어리석은 엘프를 잡으렴.”
“명을 받듭니다.”
그녀가 사라졌다.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섬으로 들어간 메이와는 반대로 섬에서부터 떠오른 존재가 있었다.
“김우진.”
베른이 상대의 이름을 읊조렸다.
삼십의 집행자들이 김우진을 포위했다.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어째서 내 영역을 침범했지?”
“귀찮게 그러지 말자.”
김우진이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후, 미세한 귀지들이 바람에 흩날렸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굳이 같잖은 명분 쌓기를 할 필요는 없잖아.”
“···그렇군.”
베른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까지 온 이상 그런 건 의미 없었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게 될 뿐,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누가 패배하고 누가 모든 것을 잃을지, 그 결과는 정해져 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항복하고 대가를 치를 생각은 없나?”
파지지지직, 새파란 뇌전의 창이 베른의 손에 잡혔다.
“잘못이 없는데 무슨 대가를 치러.”
화륵, 김우진의 불의 검을 움켜쥐었다.
“오히려 탈옥수를 감싸준 네놈이 내 앞에서 석고대죄를 해야지. 나도 기회를 줄게. 도망친 새끼, 어딨어?”
“그 건방짐이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 보겠다.”
“평생 갈 거야. 평생.”
“상황이 달라졌음을 인지하지 못하는군. 아니면 인정하지 못하는 건가. 네놈이 무엇이라 지껄여도 참아야만 했던 연옥과 달리 이곳은 나의 영역이다.”
“그래서?”
“그래서···.”
파앗-
마력 칼날이 김우진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일부러 몸을 노리지 않았다. 그저 주의를 끌고자 하는 목적에 불과했다.
“그래서 둘 다 나를 잊은 것 같은데. 그러면 꽤나 섭섭해.”
그제야 둘의 시선을 받은 드네르바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가워, 김우진. 난 드네르바라고 해.”
“그래서?”
“내 집행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어? 너라면 많이 예뻐해 줄 자신이 있는데.”
“연옥으로 와. 내가 특별대우를 약속해주지.”
“신을 감옥에 가둘 생각을 하다니. 과연 반역자네.”
마나가 요동쳤다.
“소문대로 꽤나 건방지고.”
그저 의지만으로 발현된 마법이 김우진을 덮쳤다. 바닷물을 끌어들인 거대한 용오름이었다.
“죽으렴.”
베른이 번개의 창을 던졌다. 낙뢰가 내리 꽂혔다. 용오름과 어우러져 천벌이 쏟아졌다.
집행자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냈다. 각자의 공세가 천벌의 틈새로 들어가 김우진을 공격했다.
────!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깊은 바닷물이 증발해 일시적으로 바닥이 드러났다.
아니, 그건 폭발의 여파가 아니었다.
바닷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진홍빛의 화염이 폭발을 집어 삼키며 확장하고 있었다.
불길은 그대로 모든 것을 불태우며 전진한다.
대기에, 바다에, 마나에. 모든 것에 들러붙으며 전진한다.
신에 필적하는 권능. 그 모습에 드네르바가 헛웃음을 지었다.
“말로만 들었지, 이건 정말 내 눈을 믿을 수가 없네.”
그녀가 손을 뻗는다.
꾸득, 대기의 마나가 강제로 일그러진다. 합병되어 하나의 마법을, 권능을 시전한다.
거대한 압력. 중력의 강화.
행성이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인력이 몇 배, 몇 십 배, 몇 백 배로 강해진다.
“그래서 더 끝을 봐야겠고.”
모든 것을 찍어 누르고 움직임을 강제한다. 그 속에서 번개가 일렁인다.
처음부터 둘의 역할은 정해져 있었다.
드네르바가 김우진을 붙잡고, 베른이 끝을 낸다.
파지지지직-
베른은 방심하지도, 김우진을 얕보지도 않았다.
김우진을 싫어하고 놈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우진의 힘을 인정했다.
놈은 신에 필적하는 피조물이고 신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자존심을 굽히고 다른 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신의 권역으로 끌어들였다.
수십의 집행자들을 덧붙였다.
반드시 이기기 위한 수. 그 과정에 간을 보는 행위 같은 건 없다.
처음부터 끝장을 낼 각오로.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파지지지지직-
수 억, 수 십 억 마리의 새들이 지저귀는 것과 같은 소음과.
콰르르르르릉-
천둥의 굉음이 모든 소리를 먹어 치운다.
세상을 푸르게 물들인다.
푸른 섬광이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나간다. 긴 궤적의 끝에 압력에 저항하는 불꽃이 있다. 그 너머, 김우진이 존재한다.
─────!
충격파가 퍼진다. 불꽃이, 뇌전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김우진을 포위하며 방진을 형성하고 있는 집행자들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베른은 해치웠나? 같은 진부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던지고, 던지고, 또 던졌다.
신으로서 쌓아온 모든 마력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폭발은 대기를 먹고, 바다를 먹고, 마나를 먹었다. 점점 커지는 범위는 그 안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역시 신의 힘.”
“···굉장해.”
“신이시여.”
간신히 범위에서 벗어난 집행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럭 무럭 솟아나는 경외에 그들의 신앙이 더욱 신실해졌다.
“신살자라고 해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시시하네.”
말과는 달리 드네르바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김우진이라는 규격 외의 괴물을 묶어두기 위해서, 베른이 작정하고 쏟아내어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어그러트리는 곳에서 끊임없이 권능을 시전하고 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이었으나 베른 또한 신이었으니.
신자들이 있는 곳에서 신으로서 보일 모습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큰 우환을 정리하였으니 나쁘지 않다.
“···그런데 김우진이 죽으면 어떡하지? 그건 문제 아니야?”
“걱정 마라. 죽지는 않을 테니.”
진한 탈력감에 호흡을 고른 베른이 대꾸했다.
죽일 각오로 퍼붓기는 했으나 신을 죽인 신살자다. 미약하게나마 목숨은 붙어 있을 터.
드네르바와 베른이 지금 멀쩡히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죽었다면 계약을 어긴 것이고, 계약을 어기면 그들이 신이라고 할지라도 심연으로 끌려 갔을 테니.
“그럼 다행인···.”
그 순간이었다.
────!
아무런 징조도 없이.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그대로 무방비 상태의 베른과 부딪혔다. 베른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어떻게!”
당황한 드네르바가 급하게 마력을 조작했다. 한 순간에 조형된 마나의 칼날 수 백개가 김우진을 뒤덮었다.
허나, 그것은 불길에 먹혀 그의 본체에 상흔을 입히지 못했다.
그리고.
콰득-
거친 손길이 그녀의 목을 강타했다.
“커헉···!”
아찔한 통증,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강인한 압박이 그녀의 육신을 뒤흔들었다. 그대로 증발한 심해로 내리 꽂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쿨럭, 드네르바가 피를 토했다.
“···대체 어떻게?”
허나, 통증보다 먼저 밀려오는 것은 궁금증이었다.
드네르바가 전력을 다해 그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모든 권능을 쏟아부은 만큼 도망치지 못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런 상황에서 베른의 전력을 정통으로 맞아놓고 멀쩡하다니?
아무리 신을 죽인 신살자라고 할지라도, 신에 필적하는 힘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결국 신은 아니다.
그런데 신의 권능을 이렇게 쉽게 버텨내다니.
“이번엔 조금 위험하기는 했어.”
김우진의 말대로 그도 정상은 아니었다. 머리와 옷은 일부 불타고, 상처도 새겨졌다.
허나 그것은 결코 깊지 않았다. 치명상도 아니었으며 견뎌내느라 모든 마나를 소모하지도 않았다.
감히 두 명의 신을 상대로!
“그런데 그거 알아?”
꽈득, 손아귀의 힘이 강해졌다.
드네르바의 얼굴이 더욱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애초에 내가 죽인 관리자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이 쌍년아.”
화륵, 불길이 그녀를 덮었다.
“아아아아아아악!”
뜨거운 열기에 그녀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 * *
“쿨럭···!”
시에나가 잔해를 치우며 일어났다. 손발이 미약한 경련을 일으켰다.
마나나 오러도 딱히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상대는 더욱 좋지 않았다.
미리 대비하고 피한 그녀와 달리 메이라는 집행자는 시에나의 의도대로 정면으로 충격파를 얻어맞아야만 했으니.
이미 그녀의 화살이 몸에 몇 대 박혀 있는 상황에서 신의 힘이 발생시킨 충격파는 쐐기와 다를 바 없었다.
“아···.”
상처투성이의 집행자가 멍한 눈으로 시에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미 상황은 끝났다.
“먼저 가서 기다리렴. 네가 그렇게 모시는 신도 그 뒤를 따라가게 해줄 테니.”
화살이 심장을 꿰뚫었다. 집행자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대단하네.”
피를 털어낸 시에나가 저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구멍이 보였다. 바다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는 영역과도 같이 푹 파인 구멍.
그것을 만들어낸 것은 신들이었다, 김우진이었다.
“살아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오히려 반격을 해?”
김우진은 그녀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강자였다. 신을 상대로 자신하고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어째서 신들이 그를 경계하는지 여실히 깨닫게 해준다.
“···대체 얼마만큼의 괴물인거니.”
신 이상이다. 아니, 어쩌면 잘못된 게 아닐까. 저들은 그냥 관리자가 김우진이 진짜 신인 게 진실이 아닐까.
그녀가 픽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억측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너를 따라가면···.”
복수를 할 수 있을까.
뿌득, 시에나가 이를 갈았다. 동족들이 모두 죽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는 뒤가 없었다.
“···위대한 신이시여.”
그때, 그녀의 귓가에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래, 네가 있었지.”
케이룸을 섬기는 성녀였다. 그녀의 적.
성녀는 충격파 속에서도 간신히 몸을 숨겨 살아 있었다.
“···신의 힘을 견뎌내? 신께서 패배하셨어? 말도 안 돼. 신이 패배할 리가 없어. 신은 완전하기에 신이야. 신에게 패배라는 건 존재할 수 없어. 그런데 저건? 어떻게 버텨낸 거지? 신이 아니잖아. 저 자는 반역자일 뿐인데···? 어떻게? 어째서? 왜? 설마 진짜로 패배한 건 아니겠지?”
“······?”
다만, 이상하게 상태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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