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53. 진짜 원수 >
“어째서인지 저를 향한 불온한 감정이 느껴진다 했습니다. 이러면 모든 게 이해가 되는군요.”
귀쟁이 엘프가 아직도 멀쩡히 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니. 케이룸님, 맙소사.
성녀가 헛웃음을 지었다.
“설마 신께서 내려주신 자비를 무시하고 사특한 나무나 섬기는 이교도 족속과 마주할 줄은 몰랐습니다.”
눈빛에 서린 경멸에 시에나가 발끈했다.
“사특한 나무? 지금 말 다했니?”
“완전한 신도, 완전한 나무도, 완전한 정령도 아니니 그게 사특한 나무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나무를 믿는 엘프들 또한 진정한 신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불민한 이교도들에 불과하지요.”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참 빙빙 돌려서 잘도 말하는구나.”
“역시 진정한 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사특한 나무를 섬기는 족속입니다. 감히 신의 사도인 제게 그런 망발을 내뱉다니.”
끓어오르는 살기에 김우진이 이마를 부여잡았다.
다행이라면 성녀를 본 순간, 즉시 도시를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것. 불행이라면 그럼에도 굳이 쫓아와 이 사단을 냈다는 것이다.
“일단 좀 진정해보시죠.”
“신을 모욕하는 이교도를 눈앞에 두고 진정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당신도 이 이교도와 동료였죠. 당신은 이교도의 사특한 나무를 옹호하는 자입니까?”
성녀의 시선이 이번에는 김우진에게 향한다.
“옹호하지도 그렇다고 적대하지도 않는다면 문제가 됩니까?”
“이교도의 사특한 나무를 적대하지 않는 다는 것은 그들을 옹호한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극히 이분법적인 가치관이었다.
“애초에 엘프라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접근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규율을 어긴 것을 처벌할 뿐.”
마나가 움직였다. 어느새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규율이라니요?”
“모르는 척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사특한 나무를 섬기는 엘프들은 본디 모두 박멸해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그럼에도 신께서는 자비를 내려주어 그들을 다른 곳에서 신의 관리 하에 사는 것으로 자비를 베풀어주셨죠.”
“살던 곳에서 쫓아내고, 감시하면서 자비라고?”
“모두 죽었어야 할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자비로운 신의 은총입니다.”
“그래. 어디···.”
으르렁거리는 시에나를 제지했다.
“그럼 엘프들은 그 곳에 격리되어 있겠군요. 그곳이 어디 입니까?”
“그거야 발로란 섬···당신들, 그걸 왜 모르죠? 신을 섬기든, 섬기지 않든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이 차원에 존재하지 않는···.”
성녀의 얼굴이 굳었다.
“···그 얼굴.”
성녀가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김우진의 얼굴과 대조했다.
같았다. 비록 머리색과 눈동자 색이 달랐으나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같았다.
“···반역자, 김우진. 맞습니까?”
“결론을 내려놓고 질문을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정말로!”
확 바뀐 말투와 분위기에 그녀가 도끼를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김우진의 주먹과 도끼가 충돌했다. 충격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성녀가 충격을 이용해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설마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신께서 내려주신 행운입니다. 직접 반역자를 처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니!”
펄럭, 빛의 날개가 솟아났다. 가공할 신성력이 도끼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신의 이름으로, 당신들을 처단합···!”
──!
그 순간, 날아든 섬광에 성녀가 급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비겁한 짓을 하다니. 과연 사특한 나무를 섬기는 이교도와 반역자입니다. 더욱 더 당신들을 처단해야겠습니다.”
“행운이라고 했지?”
허나, 성녀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야.”
훅 들어온 목소리는 어느새 그녀의 코앞에서 들리고 있었다. 도끼가 가공할 기세로 내려왔으나 불의 검에 가로 막혔다.
우악스러운 손이 성녀의 목을 움켜쥐고 그대로 내리 꽂았다.
콰앙, 그녀가 울컥 피를 토했다.
“너는 운이 나쁜 거야.”
두터운 신발이 그녀의 복부를 지려 밟았다.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과연 신께서도 경계하시는 반역자···!”
그럼에도 눈은 올곧았다.
“허나, 고난이 있을지언정 악은 결국 신 앞에 무릎을 꿇을지니···!”
──!
성녀가 간신히 주먹을 쥐었다. 청명한 하늘에서 거대한 낙뢰가 내리 꽂혔다.
“천벌이 내릴 지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 오십 번.
쉴 세 없이, 끊임없이 김우진을 두들겼다.
새들이 날아가고, 나무가 불타고, 대지가 무너질 때까지.
“다 끝났냐?”
그럼에도 김우진은 멀쩡했다.
“···어떻게?”
“그러니까 싫다고 했을 때 그냥 꺼졌어야지.”
퍽, 성녀가 기절했다.
* * *
“으음···.”
성녀가 눈을 떴다. 온 몸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내가 왜···.”
망막을 가득 채우던 주먹이 떠올랐다. 한 발 늦게, 기억이 났다.
신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무교인들에게 포교를 하고자 했으나 이교도인 엘프였다. 그리고 그 동료는 반역자 김우진이었다.
싸웠고, 패배했다. 압도적인 차이였다.
어떻게 신도 아닌 존재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몸이···.’
손과 발이 억압되어 있고 무슨 짓을 했는지 마나로드가 죄다 막혀 있어 마나의 운용도 불가능했다. 나약해진 몸 뚱아리에 성녀는 기도했다.
“신이시여, 미천한 종을 굽어 살피옵소서. 이 어둠속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어둠이 찾아와 그녀를 뒤덮었으나 신께서는 결국 그녀를 구원하여 주실 것이다.
“지랄 났다. 아주.”
김우진이었다. 그는 바위 위에 앉아 턱을 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얼음이 둥둥 떠 있는 검정 물이 들려 있었다.
여전히 붉은 눈과 머리였다.
“일어나자마자 하는 일이 기도? 광신도 나셨군.”
“저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녀는 의외로 침착했다.
“살아 있는 시점에서 너무 뻔 한 것 아닌가.”
“저를 인질로 잡으실 생각이시군요. 신을 압박할 수단으로.”
“정답이야.”
그럴 수는 없다. 신께 짐이 될 수는.
성녀가 다시 한 번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손과 발을 묶은 구속구로 인해 마나의 흐름이 불안정하다.
‘신의 기운이 느껴진다.’
오랫동안 느껴운 익숙한 힘이다. 어쩌면 노력하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구속구가 전부라면.
주요 마나로드 곳곳을 틀어막은 이질적인 기운은 분명히 반역자의 그것이었다. 마나를 움직여도 단단한 철벽처럼 꼼작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살도 불가능하다. 고작 혀를 깨문다고 죽을 만큼 그녀의 육신이 나약한 것도 아니고.
외통수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깨달았다.
“신이시여, 불민한 종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정말로 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허나, 죄송할 뿐, 신께서는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실 거다.
“저를 인질로 사용하셔도 뜻하는 바를 이루시지는 못할 겁니다.”
“어째서?”
“신께서는 결국 저를 구원해주실 것이며, 당신께 천벌을 내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글쎼, 설사 그놈이 나를 죽인다고 해도 그전에 네가 먼저 나한테 죽을 텐데.”
“허나 영혼은 구제 받겠지요.”
“내가 이긴다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너무 자신만만한 거 아닌가?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게 있어.”
“당신 같은 피조물에게는 존재하겠으나 신께서는 아닙니다.”
완벽하고 지고한 존재. 그것이 신이다. 신이 패배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렇기에 신이고, 그렇기에 절대자이다.
“당신이 저보다 강하고 신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줄지언정 결국 모든 건 신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단지,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하고 티끌만큼이라도 짐이 된다는 것이 안타깝고 죄송할 뿐.
흔들림 없는 눈빛에 김우진은 설득이나 협박 같은 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있네.”
허나, 그렇기에 갑자기 궁금해졌다.
만약, 그 믿음이 깨어진다면.
베른 따위는 결코 그런 절대적인 믿음과 신앙을 받칠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신앙을 잃어버린 광신도는 어떻게 될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는 죽으면 죽었지, 당신이 원하는 그 무엇도 협조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광신도라니요. 신을 믿고 섬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추잡한 호칭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성녀가 눈을 감았다.
“뭐, 딱히 협조는 필요없어.”
김우진이 웃었다.
“원하는 건 이미 다 얻었거든.”
“······!”
* * *
김우진과 시에나가 케이룸에 온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탈옥한 카를로를 찾는 것.
엘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
사실 전자는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베른이 바보가 아닌 이상 직접 보호하고 있을 터, 어차피 부딪혀야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그 전에 해야 할 건 엘프들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엘프라는 약점을 만드는 건 옳지 않으니까.
이곳의 엘프들이 전부 뒤지든 말든 상관 없지만 시에나는 조금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엘프에 대해서 묻지 못한 건, 위치를 최대한 발각 당하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성녀와 전투를 벌이면서 모든 게 드러났다. 이제는 시간 싸움이다. 김우진과 시에나는 자리를 피하면서 급하게 발품을 팔았고 손쉽게 해답을 찾았다.
성녀가 발로란 섬이라는 단서를 남겼기에 더욱 쉬웠다.
“발로란 섬? 엘프들이 유배된 섬 아닌가. 위대한 케이룸의 자비지. 사특한 나무나 섬기는 이교도들에게 삶이라는 희망을 주었으니. 그들에게는 과분해.”
“발로란이 어디냐고? 그야 당연히 남···.”
엘프들이 유배되었다는 것은, 엘프들의 유배지가 발로란 섬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다.
김우진과 시에나는 구속된 성녀와 함께 엘프들의 숲으로 날았다. 더 이상 거리낄게 없으니 전력을 다했다. 차원 남부의 끝에 도달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곳에 섬은 보이지 않았으나 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결계가 느껴졌다.
“이건···.”
“결계군.”
“위대한 신의 결계이니 당신들은 결코 들어가지 못할···.”
김우진이 단숨에 그것을 갈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던 곳에 작은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섬은 울창했다. 허나 그 뿐이었다.
“······,”
“······.”
김우진도, 시에나도 그곳에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는 생명의 기운이 없었다.
“···안 돼.”
시에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급하게 섬으로 들어갔다.
김우진이 뒤따랐다.
숲 중앙에 보이는 것은 거대하면서도 새하얀 산이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썩은 내 나는 악취와 검게 굳다 못해 말리 비틀어진 핏자국들이었다. 숲 전체를 뒤덮지 않았을까할 정도로 많은.
“아아아아아아악!”
시에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붉게 물들었다.
김우진이 유골의 산을 살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는 엘프의 뼈였다. 엘프들의 무덤이었다.
죽은 지 꽤 되었다. 아마도 이곳에 들어온 순간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까.
“이게 네가 믿는 신의 정의인가? 살려준다고 선동한 뒤, 남몰래 다 죽여 버리는 게?”
“···신께서는 이미 수차례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기회를 잡히 못한 것은 엘프들입니다.”
얼굴이 굳은 성녀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어쩌면 그녀가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다고 다 죽여?”
“신께서 행한 일입니다. 그 뜻과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의 믿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 개 쌍년이!”
시에나의 발길질이 성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성녀가 볼품없이 뒹굴었다.
분노에 찬 살기가 사방으로 폭사되었다.
“지금 그 따위 걸 말이라고 지껄여?”
“반역자들은 살려둘 수 없는 법. 신께서는 옳은 선택을 하신 겁니다.”
“누가 반역자야! 사이비 새끼가!”
쾅쾅쾅!
시에나의 발이 떨어질 때마다 대지가 진동했다. 성녀가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사방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죽어! 죽으라고!”
그때, 김우진이 시에나를 붙잡았다.
“멈추세요.”
“놔.”
“분노는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다 잡은 벌레에 신경 쓸 때가 아닙니다.”
김우진의 눈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은 하늘, 그곳에는 신이 있었다.
신들이 있었다.
“진짜 원수가 왔습니다.”
“···저 개자식들!”
신을 향한 시에나의 분노가 화산처럼 폭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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