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52. 엘프 >
김우진에게는 제법 많은 능력들이 있다. 불을 다루는 힘, 공간을 다루는 힘, 그리고 모습을 바꾸는 힘까지.
김우진의 머리카락과 눈동자의 색이 붉게 변했다.
“···대체 가진 능력이 몇 개니?”
“이건 권능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냥 제 성향의 마나를 외부로 표출시키는 거죠.”
외부의 마나가 마나하트를 통해 흡수되면 연공법과 사람의 성향에 따라 마나의 성질도 달라진다.
김우진의 마나는 불과 같이 뜨겁고 붉다. 모습을 바꾼 것은 대단한 권능이라기보다는 그 붉은 마나를 외부로 표출시켰을 뿐이다. 항시 운용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성가시지만 김우진에게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자, 그럼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기.”
시에나가 잡화점에서 구입한 지도의 한쪽을 콕 찝었다. 거기에는 엘븐이라고 쓰여진 거대한 숲이 있었다.
“적어도 지도상으로는 내가 이곳을 떠나기 전과 큰 차이가 없구나.”
“의도했을 겁니다. 신의 입장에서는 신도가 줄어들면 그만큼의 신앙이 줄어드는 것이니. 신들의 권역이 된 세상에서 같은 신앙 간의 분쟁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들을 섬기지 않는 엘프들은?”
“그걸 지금 알아보러 가는 중이죠.”
김우진은 시에나의 불안을 이해했다.
모든 신들이 엘프들을 적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신들의 권역에서는 엘프들이 기를 피고 살 수 없다.
그들은 신을 섬기지 않기 때문이다. 신에게는 신도가 아닌 이를, 신도가 될 가능성이 한 없이 0에 가까운 이들을 보살펴줄 의무가 없다.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눈이 두 개인 게 문제라고, 모두가 신을 섬기는 곳에서 홀로 나무를 섬기는 엘프들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드물지만 아예 대놓고 엘프들을 박해하는 관리자놈도 있다.
“차라리 대놓고 물어보기라도 하면 속시원하겠구나.”
“상황이 어떤지 모르니 조심할 수밖에 없죠.”
아스란 왕국의 북부 요새 도시, 칼칸을 벗어나 남하했다. 다섯 개의 마을과 도시를 거쳤고 단 한 명의 엘프도 보지 못했다. 엘프에 대한 언급도 들어보지 못했다.
물론 그게 특별히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엘프란 대체로 폐쇄적이고 인간과 뒤섞이지 못한 건 일반적이니까.
하지만 만약 그게 단순히 엘프들이 폐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단으로 몰려 박멸당한 거라면 그들을 언급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김우진을 찾기 위해 눈에 불을 키는 베른이 좋다고 하겠지.
비약일 수도 있지만 이곳이 베른의 권역인 이상, 모든 걸 조심하는 게 좋다.
“여기저기에 신전이 넘쳐나는구나. 내가 있을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자주 돌아다니셨나 봅니다.”
“엘프치고는 방랑벽이 있었지. 그래서 장로들한테 별종이라는 말도 종종 들었단다. 근데 그냥 전력으로 질주하는 게 낫지 않니?”
“그러면 반드시 마나가 드러납니다. 이질적인 마나는 눈에 불을 키고 저희를 찾는 베른에게 들키기 딱 좋죠.”
그러니 최대한 마나를 감추면서 적당히 빠른 지금이 딱 좋다. 그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며칠 뒤, 둘은 발칸이라는 대도시에 들어섰다. 아스란 남부의 도시로 왕도와 비견될 정도의 규모가 큰 곳이었다.
“여기라면 엘프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내 생각도 같단다.”
둘은 일단 주점을 찾아 이런 저런 소문들을 들어보기로 했다.
“들었나? 신탁이 내려왔다네.”
“성녀님께서 직접 오신다는군!”
“빨리 가세!”
그들이 들어서기 무섭게 모두가 빠져나가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신의 신탁이 내려왔고 성녀께서 직접 그 말씀을 전해주신답니다. 세상에, 성녀께서 이곳에 오시다니! 제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점원이 손님을 버려두고 달려 나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던 거대한 주점 안에는 오직 둘 만이 남아 있었다.
“썰렁하군요. 술도 못 마시게.”
“바텐더가 제일 먼저 나가더구나.”
“어떻게, 한 번 보시겠습니까?”
“성녀를?”
“일단 어떤 자인지, 한 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죠. 필요하면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를 테면?”
“인질?”
“좋은 생각이군.”
신전은 굳이 찾을 필요가 없었다. 도시의 중앙, 거대하고 새하얀 지붕이 보였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가장 노른자 땅을 신전이 떡하니 차지하고 있다니. 과연 권역이라고 불릴 만한 차원이다.
신전을 중심으로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 있었다. 어쩌면 도시의 모든 인구가 몰린 게 아닐까, 정도의 막대함이었다.
“성녀님께서 오신다!”
그리고 성녀가 도착했다.
* * *
성녀는 김우진과 시에나의 예상을 깨트렸다.
그들의 시선이 대로로 향할 때, 다른 모두의 고개는 위로 들렸다.
“성녀님이다! 성녀님께서 오셨다!”
“오오! 하늘이시여!”
허리까지 내려오며 길게 하늘거리는 자수정 빛 머리카락, 신에게 선택 받은 듯 한 황금빛 동공과 새하얀 사제복.
그리고 더 없이 찬란한 빛의 날개까지.
그 자태는 더 없이 우아하고, 고귀했다.
초승달을 그리는 눈매와 입가에는 인자함이 가득했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신성력은 모두에게 경건함을 심어주었다.
그녀의 두 다리가 부드럽게 땅을 디뎠다. 날개가 사라졌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고운 미성이 잔잔하게 퍼졌다.
“신을 섬기는 첫 번째 종, 디아네 디트린입니다.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신전을 중심으로 빽빽한 인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은 시에나와 함께 슬쩍,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베른을 경배하고 고개를 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집행자?”
“집행자를 성녀로 삼았군요.”
일반적으로 신성 감응력이 뛰어난 인간을 성자나 성녀로 삼지만 권역이 되어 신의 힘이 충만한 곳에서는 집행자를 성녀로 삼아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하위 차원에 집행자를 내려 보내려면 신이 그 업을 감당해야하지만 권역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신께서 신탁을 내리셨습니다. 위대한 대지에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악마가···타락을 경계하고···.”
“네가 순진한 신도들을 타락시키는 악마가 되었구나.”
“뭐, 저놈들 입장에서 틀린 말은 아닙니다.”
“허나 신께서 그대들을 굽어 살피시니 어둠은 결코 빛과 하늘을 침범하지 못할 것이며···.”
“말이 안 되는구나. 이미 너와 내가 차원의 방벽을 뚫고 넘어왔는데 말이지.”
“원래 관측되기 전까지는 다 그런 겁니다.”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는 걸 관측이라. 재미있는 표현이야.”
피조물들 대부분은 모르지만 신이라고 피조물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다. 단지 격이 높고 강하며 권능을 가졌다는 것뿐.
“···땅과 대지와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늘의 이름으로.”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성녀의 이야기가 끝났다. 신도들은 더욱 경건하게 입을 다물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봤군요.”
“저 정도 수준의 집행자라면 납치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예, 이런 곳에서는 들키지 않을 수 없죠. 일단 가죠.”
그래도 베른이 하위차원에서 대놓고 집행자들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수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남문으로 나가자구나.”
“예.”
김우진과 시에나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멈춰 섰다.
“안녕하십니까. 두 분 다.”
골목길 한 가운데를 점유하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방금까지 저 인파속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던 성녀였다.
둘은 어느 틈에 이곳까지 왔냐고 묻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성녀?”
“저희에게 무슨 볼일 있으십니까?”
“못 보던 얼굴들이신 것 같은데 어디서 오셨습니까?”
“북부에서 활동하던 용병들입니다.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따뜻한 남부로 이동 중입니다.”
“그렇군요.”
성녀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여정에 저 또한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갑자기?”
“성녀께서 함께해주신다면 영광입니다만,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신께서 내려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라면?”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진실 되게 하늘을 섬길 기회를 주는 것.”
그녀의 눈이 사명감으로 빛났다.
“그게 저희와 함께 하는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신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이가 무릎을 꿇고 경건하게 말씀을 받들었습니다. 단 두 명만 빼고 말이지요.”
“···그게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신의 은혜가 이 세상에 내려진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모두에게 신의 말씀을 경청하라 강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신께서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오직 자비로만 모두를 대하시는 분이시니.”
“그래서요?”
“허나, 사명을 받은 종으로서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비록 여러분이 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한들, 이 세상에서 신의 말씀만큼 귀한 것이 없으니.”
황금색 동공이 일렁인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반드시 물과 음식이 필요합니다. 헌데 거식증에 걸려 그것을 거부한다고 한들, 먹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김우진은 그녀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 챘다.
“성녀님께서 친히 말씀을 전해주시겠다는 겁니까?”
“말씀이랄 것도 없습니다. 신의 자비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녹아들어 있습니다. 단지 모를 뿐이지요. 너무도 당연한 것에 쉽게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지 일깨워드리는 거지요.
“그렇다고 믿음을 강제할 생각은 없습니다. 믿음이란 본디 진심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니까요. 저는 그저 여러분을 따라다니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싫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의외로 그녀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을 섬기는 신도가 아니니 제가 함께하는 것이 불편하실 거라는 것은 압니다. 지금 저의 행동이 막무가내로 보인다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걸 알면서도 행해야하는 일이 있습니다. 틀린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신을 따르는 신도의 자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었다.
김우진은 조금 당황했다.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미친년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싸우자고 덤벼들면 죽여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도 아닌데 먼저 사건을 만들어 위치를 들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성녀는 김우진이 베른이 찾는 그 악마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으니.
“이거 완전 미···.”
김우진이 시에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성녀가 빙긋 웃었다.
“이해합니다. 원래 신을 믿는 신자들은 욕을 먹기도 하죠.”
“그래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렇게까지 싫으십니까?”
“예.”
“이 세상에 위대한 하늘의 은혜가 충만합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모든 사람들은 신의 첫 번째 사도인 저와 함께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아쉽게도 저희는 아니군요.”
“그렇게까지 거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괜한 무례는 오히려 신에 대한 반감을 불러올 뿐이니. 오늘은 한 발 물러나겠습니다.”
그녀가 성호를 그리며 고개를 숙였다.
“하늘의 자비가 함께하길. 그대들의 앞에 자비와 은총이 가득하길,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길 신께 기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녀가 사라졌다.
“···저건 완전 미친년이잖니?”
“빨리 여길 뜨죠. 괜히 더 엮여서 좋을 건 없습니다.”
“동감이란다.”
김우진과 시에나가 급하게 자리를 떴다. 허나, 그들이 사라진 뒤 성녀가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자비로운 신이시여. 여전히 당신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넘쳐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온 세상에 신의 자비와 은혜가 어려 있거늘, 그것을 부정하고 신을 믿지 않는다니. 어찌 저리도 무지몽매할까.
“허나, 그런 그들을 계도하고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제가 해야 할 일이겠지요.”
그러기에 그녀는 성녀다. 집행자이기 전에 성녀. 성녀이기 전에 그의 첫 번째 사도.
“반드시 저들을 귀의시키겠습니다.”
김우진이라는 악마를 찾아내야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수많은 신도들과 그녀 휘하의 집행자들이 행하고 있으니 당장 그녀가 해야 할 것은 이것이 맞았다.
그녀의 눈이 사명감으로 불탔다.
* * *
“그러니까 뭐라고요?”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그러니까, 별다른 일은 아니었다. 성녀와 만난 뒤 바로 도시를 떠났다.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해 일반인들은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마을 몇 개를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 다음 도시에 들어왔더니 성녀가 있었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군요.”
그녀는 반갑게 김우진과 시에나를 맞이했다.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만, 이것도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두 분은 어디로 가십니까?”
“글쎄요.”
“설마 기다리고 있던 거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 또한 신의 사명을 받들어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허나, 이렇게 만난 것은 신의 이끌림이 아니겠습니까?”
“스토커처럼 따라온 건 아니고?”
“저는 신을 모시는 종입니다. 그런 추잡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추잡하다는 건 아는 모양이네.”
시에나가 툭툭 쏘아내자 성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런데 서로 간에 대화를 할 때는 로브를 벗고 이야기 하는 게 예의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딱히 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 아니라서. 그냥 달라붙는···.”
순간, 성녀의 손이 움직였다.
“신 앞에서는 모두 감추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시에나가 반응했으나 작정하고 일으킨 광풍에 그녀의 로브가 벗겨졌다.
“아.”
“···엘프?”
성녀의 시선이 뾰족하게 솟아오른 시에나의 귀로 향했다.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야, 그럼 지금까지 엘프가 말대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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