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51. 무조건 >
- 악의의 잠식은 일정한 규칙이나 정해진 방향이 없다.
- 완벽하게 예측하고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균열 사태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부에서 연락이 왔다.
틀에 박힌, 김우진의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응이었다.
“신이라는 작자들이 참으로 무능하군.”
- 넌 우리를 관리자라고 부르지.
- 관리자들이 실책을 저지르는 경우가 뭐 대수라고.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수정구를 타고 전해진다. 김우진 또한 마주 웃어주었다.
- 연옥의 피해 상황은 네가 좋아하는 보고서로 잘 써서 올리도록 해라.
- 허면 거기에 맞춰서 보상과 필요한 것들을 줄 터이니.
- 혹시 균열 사태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이 있나?
- 딱히 문제 삼을 수도 없으니 숨기지 않아도 된다. 네가 계약서에 추가한 대로 천재지변에 가까운 일이니까.
“죄수 하나가 탈옥했다. 신기하지 않나? 천재지변이 일어났다고 냉큼 탈옥을 강행하다니. 차원의 방벽은 자격이 없으면 넘을 수 없는데 말이야.”
- 그거 참 안타까운 일이군.
- 악의로 인해 벌어진 균열에 몸이라도 던진 모양이군.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하는 놈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했다.
- 균열 사태만 아니었다면 참 기꺼운 일이었을 텐데 안타깝구나.
- 잡아서 돌려놓아라. 허면 모든 것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테니.
- 기한은 두 달 정도면 충분하려나?
모든 것을 알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꽤나 가증스러웠다. 물론 김우진도 카를로를 일부러 탈옥시켰다는 점에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 탈옥자가 신의 권역에 있다면?”
- 신의 권역이라.
-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군.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는 건가. 1초의 텀이 있었다.
- 신은 권역에 침입한 침입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건 너라고 해도 다르지 않지.
- 허나,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해결할 문제다. 해당 권역의 신과 잘 이야기해보도록.
“네놈들이 잘도 나에게 협조하겠군.”
- 그것 또한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
- 허나, 무슨 일이 있든 죽을 일은 없지 않나.
- 백신전과 너의 계약에는 서로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는 조항 또한 있으니.
김우진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수정구를 꺼트렸다. 굳이 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 있으면 넘어 와봐라, 이거군.”
카를로를 탈옥시킨 시점에서 어차피 갈 수밖에 없다.
균열은 천재지변에 속해 김우진에게 책임을 물지 않지만 장시간 탈옥한 죄수를 다시 붙잡아 오지 않는 건 온전히 김우진의 책임이다.
그렇다고 신이 자신의 권역으로 들어온 카를로를 순순히 연옥으로 돌려보낼 리도 만무하며, 데리러 간다고 순순히 내놓을 리도 없다.
“바라는 대로 해주지.”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연기하느라 고생이 많군.”
빛을 잃어버린 수정구 너머로 그의 얼굴이 비쳤다.
“분노가 연기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모든 것이 신들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연기라고 하십니까?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해도 권역에서의 신은 절대적입니다.”
“일반적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김우진은 일반적이지 않다. 신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다. 짐작은 하면서도 김우진의 진짜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균열 따위가 일어났다고 김우진이 죄수가 탈옥하게 놔둘 것 같으냐.”
아니다. 고작 그 정도의 사태는 김우진에게 침을 뱉는 것 마냥 간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탈옥수가 발생했다는 것은 김우진이 고의적으로 놓아줬다는 뜻이다.
“이쪽의 계획을 전부 눈치 챘다는 것이겠지.”
“허면 당장 다른 신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옳지 않다.”
남자가 턱을 괴었다.
“너는 신이 왜 신이라 불리는지 아느냐.”
“···신이기 때문 아닙니까?”
“원론적인 답변이구나. 허나 틀렸다. 신은 신으로 불릴 자격이 있기에 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고고하고 고귀하며, 품격 있고 권위롭다.
신이라 불릴 만한 힘과 권위가 있기에 신이라고 불리는 거다. 신이라고 불리기에 힘과 권위가 생기는 게 아니라.
“허나, 요즘 몇몇 자들은 그 순서를 잊어버렸다.”
그러니 김우진에게 관리자라는 말을 들어도 싸다. 신이 신답지 않으니 어찌 신이라 불릴 수 있을까.
“베른은 증명해야할 것이다.”
자신들에게 신의 자격이 있음을.
신들마저 경각심을 품게 하고, 신을 죽여 버린 처음이자 마지막 신살자에게서부터.
* * *
신의 권역이란 무엇인가.
신을 섬기는 자들이 넘쳐나는 곳을 뜻한다. 피조물들의 믿음과 신앙이 신에게 힘을 주어 차원 전체에 신의 힘이 넘쳐나는 곳.
때문에 하위 차원임에도 신에게 가해지는 제약이 더 없이 약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곳.
이를 테면 신의 앞마당이라고 표현하면 된다.
하늘이 열렸다. 벌어진 균열 사이로 두 인영이 떨어졌다.
급격한 하강 후에 사뿐히 착지했고 균열은 순식간에 닫혔다.
하늘은 어두웠다. 새카만 먹구름이 가득했고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이 차가운 냉기와 만나 눈보라가 되었다.
모든 것이 새하얀, 눈 덮인 설산이었다.
“드디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 엘프가 무릎을 꿇고 대지에 입을 맞췄다.
“마나가···.”
차원 이동의 후유증으로 어지러움을 참아낸 시에나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마나의 성질에 눈살을 찌푸렸다.
큰 차이는 아니었으나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권역이 된 차원은 그 신을 닮아 갑니다.”
때문에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보다 쉽게 힘을 내려줄 수 있으며, 신의 이적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없던 신앙도 생겨난다. 신의 입장에서는 더 없이 좋은 선순환이다.
“일단 여기서 좀 벗어나죠. 놈이 저희가 왔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겁니다. 여기가 어딘지는 짐작가십니까?”
“일단 내려가봐야 알 것 같구나.”
“일단은 마을을 찾아서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는 게 좋겠군요. 폴리모프 마법은 모르시죠?”
“난 마법사가 아니란다.”
“어쩔 수 없죠. 로브 뒤집어쓰고 귀 잘 가리세요.”
베른이 엘프들을 어떻게 대했고 대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성격상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을 터. 엘프라는 것은 끝까지 들키지 않는 게 좋다.
김우진과 시에나가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설산에서 거주하는 예티와 여러 몬스터들이 반겨주었으나 상대가 되지 않음은 물론, 그들의 속도를 따라올 수도 없었다.
산의 중턱쯤부터 눈이 그쳤다. 산 앞에는 요새에 가까운 도시가 있었고 둘은 경비병들의 시선을 피해 성벽을 넘었다.
“어서오십시오!”
사람들이 북적이는 주점을 찾아 들어가자 무기를 든 인간들이 가득했다. 용병들이었다.
빈자리에 앉은 김우진과 시에나가 간단한 음식을 시켰다.
“이제 좀 알겠어요?”
“여기가 칼칸이면 대륙 북부 아스란 왕국의 영역이야. 엘프들의 숲은 남서쪽으로 내려가야 해.”
“잡화점에서 지도를 팔까요?”
“자세한 건 안 팔겠지만 대도시나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을 정도의 지도는 팔 걸.”
그 정도면 된다. 대략적인 위치를 잡고 길을 잃지만 않으면 되니까.
“멉니까?”
“왕국 세 개 정도는 지나야 해.”
“그렇게 멀지는 않군요.”
가면서 엘프들에 대해 알아보면 딱 좋을 것 같았다.
“음식 나왔습니다. 용병분들 같은데 다른 곳으로 가시나 봅니다.”
따끈한 스프와 두툼한 고깃덩어리였다.
“예, 여기서는 벌만큼 벌었고 남쪽으로 좀 가려고 합니다. 추위는 이제 질색이라.”
“여기 오셨던 분들은 전부 질색을 하면서 떠나시더라고요. 익숙해지면 나쁘지 않은데 말이죠.”
“그럼 맛있게 드세요.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점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시에나가 잠시 머뭇거렸고 김우진이 뒷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숙였다.
점원이 사라졌다.
“능숙하구나.”
“어색해하면 안 되요. 그냥 뒷말만 적당히 따라해주면 됩니다.”
“신을 섬겨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고 우리가 ‘어머니 나무의 가호가 함께하길’ 같은 소리는 하지 않잖니.”
“그건 또 그렇네요. 그래도 앞으로 염두에 두세요.”
차원이 신의 권역이 되었다는 것은 피조물들 중 절반 이상이 신도가 되었다는 뜻이니. 앞으로 지겹도록 볼 거다.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저 꼴을 봐야한다는 거, 맞지?”
“예.”
시에나의 시선 끝에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내려주신 위대한 하늘게 감사합니다. 하늘의 자비가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하늘의 자비가 늘 함께하길.”
음식을 앞에 두고 기도를 올리는 더 없이 신실한 용병들이 있었다.
사실 용병들이 신도들인 것은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용병이란 하루하루 목숨으로 돈을 버는 족속들이고 운과 우연, 그리고 신앙과 징크스 같은 것에 기대는 하루살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신 케이룸이라. 내가 용사가 되어 이 차원을 떠나기 전까지, 나는 케이룸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단다.”
하지만 케이룸이라는 이름이 들렸다는 것 자체가, 그의 신자들을 보았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과 시에나의 신경을 건드렸다.
“신전이 있군요.”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자 대로 한복판에 새하얀 신전이 보였다.
예배를 드리기 위함인지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어떻게 예배라도 드리겠니?”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마시죠.”
김우진과 시에나는 행렬을 지나쳐 도시를 돌아다녔다. 혹시나 있을 엘프를 찾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요새에는 단 한 명의 엘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차원을 몇 개 다녀봤는데 인간과 엘프 사이가 좋은 것 보다는 나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 우리들도 인간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단다.”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고 데면데면했지만 그렇다고 인간들의 요새에 엘프가 없다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조금, 아주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시에나는 그것을 애써 묻어두었다.
“엘프들의 숲까지 가다보면 엘프 하나쯤은 찾을 수 있겠지.”
“네, 그럼 바로 가죠. 딱히 휴식을 취할 필요는 없으···.”
그때였다.
번쩍-
하늘에서 빛의 기둥이 떨어져 신전을 강타했다.
폭음도 충격도 없었다. 빛은 따스하게 신전을 감쌌다.
“오오오!”
“신의 말씀이 내려온다!”
신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신을 경배했다.
잠시 후, 신전의 사제가 밖으로 나왔다.
“새로운 신탁이 내려왔도다! 감히 신께 대적하는 악의가, 인간의 탈을 쓴 검은 눈과 검은 머리의 악마가 내려왔으니, 찾으라! 찾아서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천하라!”
“신명을 받듭니다!”
“신이시여!”
“당신의 종을 굽어 살피시옵소서!”
눈앞에서 신탁을 목격한 신도들이 신을 찬양하고 경배했다.
“저거 아무래도 너 같은데.”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온 검은 머리, 검은 눈의 악마는 그저 가볍게 혀를 찼다.
* * *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1만 미터 위의 상공.
구름 위에 지어진 신전에서 지상을 굽어 살피던 베른 오르티안이 작은 이변을 감지했다.
“···왔군.”
방벽이 열렸다. 그리고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 흔적은 빠르게 지워졌으나 들어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김우진이 왔어.”
베른이 웃었다.
“디아네.”
“예, 신이시여.”
“신탁을 내리고 김우진을 찾아라.”
“신명을 받듭니다.”
그의 명을 받은 집행자가 사라졌다.
“간도 크네. 진짜로 올 줄이야.”
함께 자리하고 있던 녹빛 머리의 여인, 드네르바가 비웃었다.
“놈은 올 수밖에 없다. 천재지변이든, 뭐든 결국 죄수를 잡아서 돌아가야 하니까.”
“여기가 당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자신감이겠지.”
놈은 신을 죽였다.
그래서 신살자라 불리고, 그래서 신들의 경계를 받는다.
가당찮은 일이다. 일개 피조물 따위가 감히 신을 죽였다며 으스대고 다른 신들을 무시하다니.
“인정한다. 놈은 강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을 죽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속사정이 있었고, 신의 상태가 어땠는지를 떠나 신살을 했다면 결코 경시할 수 없다.
“허나, 그래 봤자다.”
김우진과 싸웠던 신은 자신의 권역에서 그를 맞이하지 못했다.
덕분에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을 죽였다는 것은 대단하지만 베른은 같은 실수를 반복할 마음이 없었다.
김우진을 권역으로 유인했다.
부끄럽지만 다른 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의 권속들까지 함께할 것이다.
그러니 김우진은 끝이다.
“죽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영원히 연옥에 처박아 놓는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겠지.”
무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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