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50. 원하는대로 >
언젠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대체 마기는, 마수와 마물들은, 마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어째서 그들은 인류를 멸망시키려 하는 걸까. 전지전능하다는 신이라는 작자들은 왜 그들을 멸종시키지 않는가. 왜 용사라는 대리인을 이용하는가.
마지막 두 개의 궁금증은 그들이 진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안 순간, 해소되었다.
이 세상에는 상위 차원과 하위 차원이라는 게 있다.
신이 살아가는 차원과 몇몇 특수한 차원들이 상위 차원이며, 다른 대다수의 차원이 하위차원이다.
그리고 신은 하위 차원에서 제약을 받는다. 함부로 강림할 수도, 강림한다고 해도 멋대로 힘을 사용할 수도 없다.
그리고 그게 신들이 집행자를 하수인으로 두고, 용사들을 이용해 세상을 관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그렇다면 마기는? 마수는? 마물은? 마족은?
그것들은 무엇일까.
균형이다.
필요악이며, 흐름이자 법칙이다.
동전의 이면처럼, 선이 있으면 악이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이 세상의 법칙이다.
신이라는, 용사라는 세상을 가꾸는 존재가 있다면, 악의와 마라는 세상을 파괴하는 존재 또한 있어야 한다.
···라고 알베니우스가 그랬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한 악의의 파도가 연옥을 덮쳤다는 것. 김우진, 그의 영역을 침범했다는 것.
릴리는 새장 속에 들어갔다. 하늘구름은 릴리를 억압하는 구속구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녀를 지키는 방호구이기도 하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한, 당분간은 안전할 거다.
애초에 세계수인만큼 그리 약하지도 않고.
신입 죄수들을 단단히 구속해 감옥에 처넣고 다른 죄수들을 풀어 놓은 이상, 정원 바깥은 몰라도 정원이 완전히 파괴될 일은 없다.
그러니 김우진이 당장 신경써야 할 일은 없다.
연옥을 향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저 쓰레기를 치우는 것 외에는.
김우진이 주먹을 쥐고, 가볍게 뻗었다.
단순한 정권 찌르기. 하지만 그 결과는 단순하지 않다.
콰아아아아-
주먹으로부터 비롯된 화염의 폭풍이 일직선상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운다.
균열 속에서 몸을 던져 연옥으로 떨어지던 마수들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잿더미가 된다.
김우진의 몸이 떠오른다.
홍염의 파도가 하늘을 유영한다.
모든 것을 뒤덮는 재앙이었다.
* * *
뜨거운 열기.
붉게 물든 하늘.
마수와 마물들의 비명 소리.
그 모든 것이 오직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장관이 따로 없군.”
불길의 파도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마수가 데르카인의 도끼에 반으로 갈라졌다.
반쯤 녹아내린 마수를 죽이는 건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도살에 가깝다. 그 정도로 싱거웠다.
“대체 한계가 어디인지···.”
전율적인 광경에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저런 존재와 싸웠다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물론, 김우진이 손속에 사정을 둔 덕분이긴 하지만.
“능력은 역시 불에 관련된 것이겠지?”
“아마도. 정령의 느낌도 살짝 나네.”
“그럼 불의 정령과 계약이라도 한 건가?”
“정령마법이라면 정령왕이 아니고서야 이런 건 불가능해.”
글쎄, 과연 정령왕이라고 한들 가능할지 의문이다. 불의 신이라면 모를까.
“공간 관련 능력도 있으세요.”
다리 여덟 개 달린 마수의 육신을 스무 조각 낸 율리아가 검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내며 합류했다.
“공간?”
“강민식님을 잡으러 갔을 때, 집행자를 만났거든요?”
“집행자?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더니 신들의 사주를 받은 게 정말이었나.”
“그러게.”
“모르셨어요?”
“짐작은 하고 있었네. 하지만 말은 안 해주지 않았나.”
“율리아, 너 그런 걸 숨겼다고?”
“···아. 제가 말 안 했어요?”
율리아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소장님이 공간 관련 권능을 가지고 계시다는 거죠.”
“그게 정말인가?”
“네. 집행자가 강민식님을 데리고 공간이동마법으로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서 맨손으로 공간을 찢어 균열을 만들고 쫓아갔다니까요?”
“···그게 가능하다고?”
“율리아, 아무리 소장이라고 해도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김우진이 아예 공간 특화 권능을 가졌다면 모를까, 완전 경우가 다른 힘이 아닌가.
“차라리 공간 마법을 사용해서 추적했다면 믿겠네. 저런 괴물이 마법적 소양이 없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맨 손으로 공간을 찢고 들어간다니. 그게 말인가, 방귀인가.
“정말이에요. 어머니 나무에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정말이라고?”
“어머니 나무는 그렇게 함부로 거는 게 아니야.”
“진짜에요! 저 혼자 봤으면 제가 거짓말 한다고 했을 거예요.”
“누구랑 같이 봤는데?”
“집행자요.”
“그 집행자는 어디 있나?”
“···죽었죠.”
율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하지만 데르카인도, 시에나도 그녀의 말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신이 견제하는 인간이니 그 정도 능력이 되지 않고는 말이 안 되긴 하네.”
김우진이 노는 판은 용사인 그들과도 아득하게 격이 다르다. 그들의 상식으로 김우진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암담해졌다.
“···그러니까 신들에게 대항하려면 적어도 저 정도 수준까지는 올라가야 한다는 거군.”
일단 같은 선상에 올라야 대항을 하든, 전쟁을 하든 할 것 아닌가.
“···마물 좀 더 잡고 올게요.”
“같이 가지.”
율리아와 데르카인이 각자의 무기를 꼬냐쥐고 광견처럼 달려 나갔다. 이미 미친개가 된 타르칸과 합류했다.
홀로 남은 시에나는 시위를 당겼다.
파앗-
오러의 화살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작은 마수 하나를 저격했다. 머리가 터진 마수가 힘없이 추락한다.
“신.”
시에나 또한 신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를 이곳에 가둔 장본인들. 그리고 그녀의 고향을 멋대로 바꾸어버린 개자식들.
어째서 벨레르가는 케이룸이 되어야 하는가.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충격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가서, 확인해 보겠어.”
만약 엘프들이 모두 사라졌거나, 박해를 받고 있다면.
입술을 깨물었다.
기꺼이 데르카인과 같은 길을 걸으리라.
단순히 마음속에 삭히는 저주와 원망이 아닌, 실질적인 적대로.
화살이 다시 한 번 허공을 갈랐다.
* * *
균열은 거대하다.
수천의 마수와 마물들을 떨어트린 만큼 역겨운 마기로 점철되어 있기도 하다.
김우진은 혐오감을 느꼈다.
크게 이상할 건 없다. ‘마’는 오직 파괴만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여전히 토악질이 나오도록 마수와 마물의 군단을 토해내고 있는 구멍을 보며 김우진은 과거를 회상했다.
오래 전의 일.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된 건 아니다.
기껏해야 연옥의 소장이 되기 이전에서 10년 정도를 더 되돌린 정도.
적이 있었으나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다. 고작 일백 정도.
하지만 그 면면은 이따위 마수와 마물들에 비교하는 것 자체가 수치다.
누구는 그들을 천사라 불렀고, 누구는 그들을 신의 사자라 불렀으며, 누구는 그들을 집행자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자. 인류는 그를 신이라 불렀다.
‘김우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얌전히 내 집행자가 된다면 모든 죄를 덮고 없던 일로 해주겠다. 말해라. 놈은 어디 있지?’
‘좆까.’
‘넌 속고 있는 거다. 놈은 그렇게 선한 존재가 아니다.’
‘용사를 개처럼 부리고 토사구팽하는, 속이 시커먼 네놈들만 할까.’
신은 회유했고, 그는 거부했다.
싸웠고 전투에서는 승리했다. 하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다.
그리고 그 결과 연옥의 소장이 되어 용사들을 관리하게 되었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을 테니.
지금의 상황을 보라.
신에 대한 혐오감이 더욱 무럭무럭 자라난다. 과거의 선택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위대한 계약을 맺어 놓고도 전전긍긍하며 비겁한 수작을 부리는 꼴이라니.
이러니 더욱 저들의 생각이 확실해진다.
마수의 출현은 엄연히 신들의 관리 잘못이고 이는 김우진이 억지로 우겨넣은 천재지변의 조항이다.
즉, 탈옥수가 생겨도 김우진의 책임은 없다. 그저 잡아오는 수고로움만 있을 뿐.
신들 또한 그걸 알고 있으니 케이룸으로 유도하는 것은 엄연히 그를 힘으로 굴복시키겠다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허나, 그 결과까지 너희들이 원하는 형태일지는 장담할 수 없다.
김우진이 손을 뻗었다.
손을 타고 화염이 자라난다. 그것은 거대한 손이 된다. 한 손은 균열의 끝에, 다른 손은 반대쪽에 자리한다.
김우진은 균열의 양 끝을 붙잡은 뒤, 그대로 잡아 당겼다.
────!
공간이 일그러진다. 벌어졌던 균열이 억지로 좁혀지며 비명을 지른다. 고개를 내밀던 마수들이 열기와 좁아지는 입구에 타격을 받아 그대로 소멸한다.
“···균열을 맨 손으로 잡아서 닫는다고?”
“···미쳤군.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모양이야.”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어요? 지금 닫고 계시잖아요! 반대도 가능하다니까요?”
“역시 소장님이십니다!”
죄수들의 경악과 환호가 뒤섞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균열은 빠르게 좁아졌다.
이윽고, 완전히 서로의 면이 입술처럼 부딪혔다.
김우진은 그대로 열기를 더했다. 마치 용접하듯, 공간을 이어 붙였다.
제대로 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닫힌 건 닫힌 거다.
완벽하게 복구하지 않으면 다시 벌어지겠지만 적어도 당분간은 넘어오지 못한다.
“···내가 알던 상식이 박살나는군.”
“당신은 저런 건 못해? 명색이 우주 제일의 대장장이 아니야?”
“차라리 강철로 금을 만들어 달라고 하게.”
“못 해?”
“···가능은 하네.”
더 없이 비효율적이라 그냥 금을 사는 게 더 싸서 그렇지.
그들이 김우진에게 감탄하는 사이, 모든 작업이 끝났다. 벌어졌던 균열은 다시금 붙었고 하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맑아졌다.
수많은 마수와 마물들의 시체와 소장이 일으킨 잔열만이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
소장이 지상으로 내려왔다.
“소장님, 역시 굉장하십니다! 소장님을 따르기로 한 결정이 제가 살면서 가장 잘한 결정인 것 같습니다!”
“굉장하다는 말밖에 안 나오는군. 혹시 연금술이 신의 경지에 이르면 자네처럼 공간도 용접할 수 있나?”
“역시···.”
“상황이 이러니 귀휴는 당장 나가지 못하겠지?”
“아니요. 나갈 수 있습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수많은 소음들 중, 김우진은 시에나의 물음에만 답했다.
“부소장!”
그의 고함이 연옥 전체를 뒤흔들었다. 곧 부소장이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죄수들의 상태는?”
“모두 얌전히 독방에 있습니다.”
“카를로는 어디 있지?”
“1183번은 4층의 독방에···.”
김우진이 성큼 성큼 연옥 안으로 들어갔다. 4층으로 올라가 카를로의 독방을 열었다.
얌전히 침대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를로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했다.
“소, 소장님?”
“나가.”
“갑자기 그게 무슨···.”
“나가라.”
“예···?”
“지금 당장 탈옥해.”
케이룸으로 가 알려라.
“마수의 침입이란 천재지변이 일어났고, 강민식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했다고.”
어째서 기껏 붙잡아 놓고 다시 탈옥하라고 하는지, 카를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늘한 김우진의 눈빛에 물어볼 용기 또한 없었다.
“···예.”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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