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49. 적당 >
이후, 카를로는 몇 개를 더 불었다.
“강민식 덕분에 쉽게 탈옥했지만 사실 신들께서 탈옥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따로 마련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기회?”
“연옥에 아주 큰 혼란이 찾아올 거라고 하셨습니다!”
큰 혼란이라. 신들이 자신이 나섰다는 명백한 증거 없이 연옥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수단이 무엇일까.
짐작 가는 게 하나있다.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으니 속단은 금물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카를로를 탈옥시키려는 신들의 목적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대부분의 계약은 연옥에 한정된다.’
때문에 연옥에서는 김우진이 계약을 위반하는 일을 벌이지 않는 이상, 그를 공격할 수 없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연옥 밖에서는 아니란 뜻이다.
당연히 연옥 밖이라고 한들 무조건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못한다. 하지만 서로의 권리가 충돌한다면, 신들은 당연히 본인들의 손을 든다.
소장으로서의 김우진은 보호를 받지만, 신의 권역을 침범한 김우진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권역을 침범 당한 신은, 침입자를 격퇴할 권리를 가진다.
그리고 차원 ‘케이룸’은.
스스로를 하늘의 신이라 일컫는 케이룸의, 아니 베른 오르티안의 권역이었다.
“베른의 수작인가.”
하긴, 생각해보면 굳이 찾아와 경고를 날린 것도, 새로운 죄수들의 입소를 알린 것도 베른이다.
김우진에 대한 놈의 적개심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정말로 직접 붙어보고자 함인가?
혼자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신은 오만하다. 오만한 만큼 자존심이 높고 낮잡아 보이고 무시당하는 것을 혐오한다. 설사 상대가 같은 신이라고 할지라도, 아니 같은 신이기에 더욱 더.
백신전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백 명의 다른 인물이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움직일 수가 없다.
또한 케이룸은 완벽한 베른의 영역. 개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는 먹고 들어간다고, 신이라고 다르지 않다.
저들이 굳이 용사들을 이용해 멸망 위기에 처한 차원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그것이 관리자로서, 그들의 사명이기도 하지만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신도를 받고 숭배를 받아 신앙을 드높이기 위해서.
피조물들의 찬양과 신앙은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 관리자들이 자신들을 진짜 신이라고 부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곳이면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신은 하위 차원에서 힘을 제약 받지만 권역에서는 또 다르니.
그렇다고 김우진을 죽이겠다는 건 아닐 거다. 적어도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신들은 김우진을 죽일 수 없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면.’
힘으로 굴복시키고 계약의 수정이 가장 그럴듯한 추론이다.
‘누구 마음대로.’
당연히 그대로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덕구야. 가자.”
그 전에 다른 탈옥수들부터 잡고.
‘그런데 하필 케이룸이라···.’
시에나 올름의 고향이 어디였더라.
* * *
“이게 뭐야!”
“씨발, 차원의 방벽? 이걸 어떻게 통과하라고!”
탈옥수들을 잡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죄수들을 가로 막는 연옥의 세 가지, 장벽.
구속구, 정원, 그리고 차원의 방벽.
운이 좋아 구속구를 해제하고 정원을 통과했다고 한들, 차원의 방벽을 통과하는 건 권능에 가까운 힘이다.
신이거나 신에 준하는 힘이 없는 이상, 혹은 공간 마법에 능력을 몰빵 해 간신히 틈새를 조금 벌리는 게 아니면 불가능에 가깝다.
다섯은 차원의 장벽에 도달하기 전에 잡혔다. 둘은 차원의 장벽을 두드리다 잡혔으며, 다른 하나는 아예 도망치지 않았다.
“나와.”
처음에는 카를로를, 그 이후에는 김우진을 따라다니던 켄타우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도망치지 않았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오. 이곳이 하나의 차원이라는 것을.”
“그것뿐?”
“카를로라는 자에게 방법이 있어 보여서 뒤따라가고 있었소. 헌데 소장이 순식간에 뭉개버리더군. 그래서 포기했소. 할아버님의 말이 맞았소. 이 빌어먹을 곳은 힘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나갈 수가 없소.”
네 다리의 켄타우로스가 절망에 차 중얼거렸다.
객관화가 잘되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놈보다는 주제를 알고 얌전히 감옥에 붙어 있는 놈이 관리하기 편하니까.
켄타우로스를 제외한 죄수들을 모조리 기절시키고 허공에 둥둥 띄워 연옥으로 돌아갔다.
“내가 이겼단다! 내가 우승자야! 귀휴! 귀휴를 나가도록 해주렴!”
“···억울해요. 한 경기 이후에 시간을 주는 건 상식이잖아요.”
복귀하니 환희에 찬 시에나와 하얗게 불태운 율리아가 그를 반겨주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바라서 그리 새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전이었다면 율리아가 이겼겠지. 율리아의 수준이 생각 이상이다.
과연 알베니우스가 키워낸 재목이라고 해야 될까.
‘알베니우스의 연락은 언제 오는 거지.’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분명 다음 만남은 알베니우스와 함께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짧을지, 길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가장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생명체인 드래곤의 시간관념은 인간과는 아득하게 다르니까.
어쨌든 당장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죄수들은 다시 감옥에 처넣고 카를로는 특별 감시가 필요해. 강민식과 같이 권한을 받았다면 구속구나 징벌방 같은 건 소용이 없을 테니.”
“1183번을 강민식과 함께 특별관리대상에 넣겠습니다.”
특별관리대상이라고 한들 그렇게까지 특별한 건 없다. 구속구나 여러 연옥의 시스템들이 제 역할을 못하는 만큼 그저 더 많은 교도관들이 붙어 감시한다는 뜻이니.
“일단은 그렇게 하고 시에나를 불러와.”
“예.”
잠시 후, 시에나가 왔다. 그녀는 당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다.
“귀휴. 귀휴를 주렴.”
“약속은 지킵니다.”
김우진은 시에나에 대한 서류를 살폈다.
그녀의 고향 차원은 벨레르가. 그리고 용사로서 구한 차원은 도이트른이다. 귀휴를 가고자 한다면 둘 중 하나일 터.
그리고 벨레르가는···
“가고 싶은 곳은 어디입니까? 고향인 벨레르가? 아니면 용사로서 있던 도이트른?”
“둘 다 아니란다.”
“허면?”
“케이룸.”
김우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어떻게?”
“얼마 되지 않았단다. 22년쯤.”
김우진이 소장으로 연옥에 부임하기도 전의 이야기다.
케이룸이 생겨난 게 30년이 조금 넘었으니 시기도 얼추 맞는다.
“어떻게냐고 묻는다면. 연옥의 엘프들 중에는 나와 같은 차원 출신의 엘프가 하나 있다고 말해줄 수 있겠구나.”
“거기 가봐야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죄수로서 행동에 많은 제약도 있을 겁니다. 시에나님이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나는 확인해야할 의무가 있단다. 신의 이름 아래, 짓밟힌 벨레르가가 어떻게 변했는지.”
“딱히 짓밟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신의 권역이 되었을 뿐이죠.”
“거기에 벨레르가 차원민들의 의지는?”
“아무리 신이라고 한들, 강압적으로 믿으라고 윽박지를 수는 없습니다.”
윽박지른다고 한들 쉽게 믿는 인간도 아니다. 믿는 척은 할 수 있겠지만 신앙이라는 게 척만으로는 신에게 힘을 주지 않는다.
진실한 믿음이 필요하고 그걸 판단하는 건 위대한 우주의 법칙, 아카식 레코드다.
때문에 관리자들은 포교활동에 적극적이다. 뺀질나게 신의 이름으로 용사를 내려 보내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권역이 되었다면 어떤 방법을 썼든 결국 절반 이상의 인류가 신을 섬긴다는 겁니다.”
“나도 가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단다. 이미 신의 권역이 되어버린 곳에서 기껏해야 죄수 하나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다행히 시에나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 부족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있는 것 아니겠니?”
엘프들은 태생적으로 신과 함께할 수 없다.
그들의 신은 세계수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차원에 수많은 엘프들이 있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세계수를 섬긴다.
그들의 차원에 세계수가 있든, 없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참 신기하긴 하다. 어떻게 세계수를 보지도 못한 엘프도 세계수의 귀중함과 위대함을 알고 섬기는 건지.
칼라로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어쨌든 그러한 엘프들의 성향 때문에 신들은 엘프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히 권역의 엘프들은 눈에 가시이며 박해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시에나의 걱정은 당연했다.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때였다.
────.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함.
지독한 불쾌함과 적대감.
- 침입자 발생!
- 침입자 발생!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김우진. 그 다음은 연옥의 관리 시스템이었으며 마지막은 시에나였다.
“···이건.”
“이야기는 좀 나중에 해야겠군요.”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맙소사.”
부소장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쩍 갈라진 균열은 시커멓고 악의로 넘쳐났다. 그리고 그 악의는 끊임없이 마수들을 토해낸다.
연옥이 생겨난 이례로 이런 일이 있었나?
적어도 그가 소장과 함께 연옥으로 부임한 20년 동안은 없었다.
“연옥이 침범 당하다니!”
그리고 3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드워프의 반응을 보아하니 최소한 300년 전까지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 거니?”
“막아야죠.”
김우진은 시에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일그러진 하늘을 보며 담담히 대꾸했다.
“부소장.”
“예!”
“신입 죄수들과 강민식을 독방에 수감하고 나머지 죄수들을 소집해. 연옥 방어 시스템 작동시키고 구간 모두 폐쇄해. 마수나 마물 한 새끼도 연옥 내부로 들어올 수 없게.”
하늘을 점점 채워가는 마수들은 교도관들만으로 막을 수 없다. 김우진이 나선다면 쓸어버리지 못할 것도 없지만 연옥에 피해가 없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죄수들을 이용한다. 수인들만 있어도 저것들은 감히 연옥을 넘볼 수 없다.
“예.”
“나는 잠깐 릴리한테 다녀올 테니까.”
김우진은 이것이 카를로가 말했던 신들이 준비한 소동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애초에 신들의 관리 하에 있는 연옥에 대량의 마수들이 침입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용인이나 방관 없이는 불가능했다.
물론 그래봐야 우연이고 실수라고 변명하겠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적들의 침입에 놀란 릴리가 나서지 않도록 해야한다.
차원의 방벽이 벌어지고 마기가 점점 더 잠식해 나가고 있다. 세계수의 힘으로 수복할 수 있지만 그러려면 꽤 많은 힘이 필요하다. 필연적으로 신들이 세계수의 존재를 눈치 챌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러지 않는다.
어차피 막아내기만 하면 신들이 알아서 복구할 테니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떻게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지?”
거기에는 아이러니하게 김우진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다. 김우진이 있으니 결코 이 정도 수준에 연옥이 붕괴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짓을 한다는 것 자체가 김우진의 역린을 툭툭 건드렸다.
애초에 강민식을 보내 먼저 시비를 건 것도, 그걸 수습하겠다고 이 따위 짓거리를 하는 것도 관리자들이다.
율리아로 인해 조금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그는 계약을 종료할 때까지 관리자들과 직접적으로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그도 참을 이유가 없다.
“탈옥, 케이룸, 베른, 시에나, 귀휴.”
김우진은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딱딱 맞춰 돌아간다. 마치 우주의 흐름이 그를 내몰 듯이.
“많아야 셋, 아니면 둘. 그것도 아니면 혼자.”
신은 절대 다수가 함께하지 않는다. 백신전은 그저 신들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겉포장에 불과하다.
그리고 둘이나 셋이라면.
“적당해.”
적당하다.
지난 20년 간 그가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았음을 증명해 내기에는, 신들에게 줄 경고장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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