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48. 호구 >
“후우.”
율리아 카르센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눈을 치켜뜨자 상대가 보인다.
“준비는 끝났나?”
더 없이 강대한 광기와 살기를 머금은, 오직 만전의 상대와 싸우기 위해 들끓어 오르는 본능을 간신히 억제하고 있는 존재.
강하다. 신이나 소장을 제외하면 바로 아래 단계가 아닌가 싶을 정도.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으나 그녀는 패배해서는 안 된다. 질 수 없다.
귀휴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연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따지고 보면 자발적인 입소에 가까웠다.
심지어 소장과 함께 데이드람에도 다녀온 전력이 있었다. 귀휴는 그녀에게 그다지 큰 메리트가 아니었다.
율리아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승리, 그 자체였다.
신. 그녀의, 알베니우스의,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의, 그밖에 수많은 조력자들의 최종 목표.
신과 싸워야 한다. 신에게 대적해야만 한다.
그러니 고작 죄수 하나에 무너질 수는 없다. 비록 그 죄수가 용사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라고 할지라도. 신은 더 강하니까.
율리아가 천천히 검을 뽑았다. 연옥에 들어올 때 압수당했던 애검은 오랜만에 만난 주인의 손길이 반가운지 파르르 공명한다.
“끝났어요.”
호흡을 가다듬고 그대로 검을 뻗는다. 쩌엉, 질주하던 짐승의 손톱과 충돌한다.
엄습하는 충격을 대지로 흘려보낸다. 몸을 비틀어 또 다른 손톱을 피하고 검을 긋는다.
허나, 오러를 머금은 은빛 늑대의 가죽을 베기에는 예기가 부족하다. 율리아는 오러를 더욱 날카롭게 벼려냈다.
쾅쾅쾅!
이어지는 건 힘과 기술의 대결이었다. 압도적인 힘이라는 장점을 이용해 폭격해대는 타르칸과 그것을 비껴내고 흘려내며 빈틈을 향해 검을 찌르는 율리아.
“내 속도를 온전히 따라오는 건 네가 세 번째다!”
신난 타르칸의 외침이 굉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하지만 율리아는 동의하지 않았다.
“누가 누굴 따라와요.”
적어도 속도는 그녀가 장기로 삼는 무기였다. 아무리 특별한 짐승이라고 한들, 뒤진다는 것은 그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물론 소장, 그 괴물은 별개다.
율리아가 달뜬 숨을 내뱉었다. 마나에 의지를 실었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용사의 힘을 받은 용사 중, 특별한 이들은 권능을 각성한다.
강민식의 독처럼, 시에나의 마력 조작처럼.
율리아는 바람의 힘을 각성했다. 바람을 자유자재로 지배하는 힘.
집행자라 불리던 이를 상대로는 사용할 필요도 없었지만 타르칸 톨리스는 아니었다. 듣기로는 권능을 각성하지 못한 용사라던데 육체적인 힘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괴물이다.
율리아가 검을 뻗었다. 바람이 일었다. 폭풍이 되었다.
콰콰콰콰, 그대로 타르칸을 덮친다.
율리아가 움직인다. 바람에 몸을 싣고 더욱 빠르게.
바람의 정령들이 그녀에게 힘을 보탰다. 정령의 가호가 검에 깃들었다. 오러와 뒤섞인 바람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콰앙, 타르칸과 충돌한다. 버텨내나 율리아의 검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문제는.
“날파리 같은 방법이다.”
타르칸 톨리스가 그 모든 것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율리아를 따라갈 속도가 없다.
허나, 율리아가 죽었다 깨어나도 얻을 수 없는 무식한 힘과 단단한 육신이 있다. 짐승의 본능적인 감각이 있다.
튕겨낼 것은 튕겨내고 받아낼 것은 오러와 육신으로 받아내며 바람의 결을 뜯어낸다.
흐름을 어그러트리고 파괴한다. 강제로 뚫고 전진한다.
“전사라면! 당당히 맞서라!”
그가 포효한다. 권능에 가까운 사자후에 바람이 진동하며 약해진다.
“찾았다.”
두 다리가 급격히 팽창한다. 콰앙, 대지를 박살내며 박차고 일직선으로 쏘아진다.
“흡!”
율리아가 다급히 바람을 딛고 몸을 비튼다.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가는 손톱 너머로 또 다른 손톱이 서성인다.
카가각, 검이 가까스로 손톱을 비껴낸다. 그 충격에 몸이 휘청이지만 바람이 율리아를 받쳐준다.
그리고 정령의 바람이 무방비 상태가 된 타르칸을 사방에서 덮친다.
콰콰쾅!
거대한 폭발이 투기장 전체를 휩쓸었다. 이번에는 효과가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타르칸이 바람을 찢으며 뛰쳐나왔다. 그럼에도 야성과 투기는 전혀 죽지 않았으며 율리아 또한 이번 한 방으로 끝낼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던 검이 마중 나갔다.
콰득, 예리한 검격을 타르칸이 이빨로 낚아채듯 받아냈다.
“고작 이 정도냐? 소장에 비하면 어린 아이나 다름없군.”
“그런 모습으로 이야기 해봤자, 별로 멋있지도 않거든요.”
그리고.
“당신도 소장님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건 마찬가지에요.”
검에 깃든 오러가 폭발했다. 타르칸의 머리가 크게 흔들렸다. 이빨이 검을 놓쳤고 검은 춤을 추었다.
허나 고작 이 정도로는 소장을 이길 수 없다.
당연히 신도 넘지 못한다.
그렇기에 율리아는 더욱 마나를 쥐어짰다.
속도를 올리고, 바람을 더욱 거세게 만들고, 검격을 더욱 날카롭게 벼려낸다.
피하고 부딪힌다. 막고 부딪힌다. 비껴내고 부딪힌다.
격렬한 힘의 파도 앞에 버티고 또 버티며 검을 내지른다.
그리고 결국 승리를 쟁취해낸다.
“···증명해냈어요.”
그녀의 검에 타르칸이 쓰러진다. 일어서고 또 일어서며 좀비처럼 그녀를 힘들게 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의지는 있을지언정 상처투성이의 육신에는 한계가 찾아왔다.
힘든 상대였다. 오러도 거의 고갈되었고 온 몸이 욱신거린다.
그럼에도 그녀는 승리했다. 여전히 김우진이나 신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적어도 바로 아래인 용사들 중에서는 최상위급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이제 한 걸음.”
시에나 올름을 이긴다면, 적어도 이 안에서는 최강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녀에게 그 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히, 힘이 하나도 없어요.”
타르칸 톨리스와의 사투에 모든 힘을 쏟아낸 율리아 카르센은.
“귀휴는 내 거야.”
“잠깐만요, 잠깐 타임! 휴식 시간 같은 건 없어요? 공평성과 선수 보호를 위해서 최소한의 휴식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감옥에서 그런 걸 따지니?”
“아니, 잠깐만요! 아악! 뼈, 뼈 맞았어요!”
“맞으라고 쏜 거야.”
“전 하이엘프에요!”
“그래, 끝나고 대우해줄게.”
이어지는 시에나와의 결승전에서 거짓말처럼 참패를 당했다.
* * *
“···율리아 카르센. 생각 이상의 괴물이었군.”
모두가 대놓고 증명하거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죄수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죄수들 중 최강이 타르칸 톨리스라는 것을. 그는 수인족의 귀족, 달의 늑대였고 투쟁하며 살아왔다.
그의 무력은 다른 수인들과는 궤를 달리했고 시에나도, 데르카인도 쉽사리 넘볼 수 없었다.
헌데 율리아가 이겼다.
비록 그 다음 대전에서 시에나에게 허무하게 지긴 했지만 그건 모든 힘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지, 그녀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소히 말하는 대진빨. 타르칸의 상대가 율리아가 아닌 시에나였다면 아마 타르칸이 올라갔을 거다.
헌데 율리아는 그 타르칸을 이겼다.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대체 소장은?”
그런 죄수들이 한 번에 덤벼도 모조리 쓸어버리던 소장의 한계가 어디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신은 신인가.”
그리고 그런 소장조차도 당장 함부로 하지 못하고 저자세로 나가는 신들의 위용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데르카인이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 * *
투기장의 죄수들이 우승자를 정하고 있을 무렵, 탈옥자들은 연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었다.
“마수의 후각을 이용해 쫓아온다면 결국 따라 잡힐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니 아예 산개해서 일부라도 사는 게 어떻습니까?”
강민식을 뒤로한 채 나아간 용사들은 카를로가 낸 의견에 수긍했다.
그리고 아홉 명의 용사들은 아홉 갈래로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허억, 허억···!”
카를로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용사가 된 이후, 단순히 달리기만으로 이렇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 적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늦으면 소장이 온다. 그 괴물은 못 막아!’
소장의 힘은 이곳에 들어온 순간 뼈져리게 느꼈다. 부딪히면 필패다. 그 전에 빠져나가야만 한다.
‘제발 나 말고 다른 놈들부터!’
어차피 신에게 열쇠를 받은 자신이 아니면 다른 놈들은 이곳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없다. 그러니 그를 위한 미끼라도 되어주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나.
‘이곳 자체가 하나의 차원이야.’
연옥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들은 결국 차원의 방벽에 가로 막히리라.
오직 그만이 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그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조력자가 있어서 다행이야···!’
마나를 완전히 통제하는 구속구, 압도적인 힘의 소장.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막막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비록 신께서 상황을 만들어주신다 하셨지만 소장이 주는 충격은 그만큼 컸다.
하지만 강민식의 조력으로 생각보다 쉽게 감옥을 벗어났다. 너무 쉬워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그는 신이 이야기한 조력자였다.
신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강민식의 말대로 그가 오랫동안 오늘만을 기다리며 준비한 덕이겠지.
그러니까 강민식은 신의 안배다. 신의 안배가 잘못될 리는 없으니 이대로 달리기만 하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
‘제기랄, 투기장인지 토너먼트인지 그걸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옥의 용사들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같은 용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네놈들은 여기서 평생 썩어라! 나는 간다!”
하지만 결국 신의 과업을 받고 나가는 건 카를로다.
죄수 주제에 소장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는 멍청이들은 평생 여기서 살라지.
“아쉽게도 여기서 썩는 건 너도 포함이다.”
불쑥,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든 건 그때였다. 아무런 고조가 없는 담담한 목소리.
“······.”
카를로가 고장 난 로봇처럼 끼긱거리며 멈췄다. 필사적으로 기감을 퍼트렸으나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못 들었겠지?’
잘못 들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장이 있었다.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하하.”
사방으로 흩어진 죄수들이 아홉이었는데. 왜 하필.
“왜 하필 나야!”
“걱정마라. 다른 탈옥수들도 모두 잡혀서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그딴 말이 듣고 싶은 줄 알아!”
카를로가 은밀히 모아두었던 오러를 일거에 방출했다. 콰콰콰, 세상을 구한 용사가 작정하고 토해낸 기운은 그야 말로 막대했다. 오러의 폭풍이 김우진을 덮쳤다.
카를로는 그 반동을 이용하여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멀지 않아!’
싸우는 건 필패다. 그러니 도망친다. 다행히 방벽이 멀지 않···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카를로를 덮쳤다.
“···케르베로스?”
머리가 세 개 달린 마수였다. 용사라고 할지라도 쉽게 상대할 수 없는 괴물.
케르베로스의 세 입이 벌어졌다. 검은 불꽃이 토해졌다.
“큭···!”
카를로가 다급하게 오러를 몸을 둘렀다. 하지만 예정된 열기는 다가오지 않았다.
김우진이었다. 어느새 케르베로스와 카를로의 사이에 끼어든 김우진이 가볍게 불꽃을 소멸시켰다.
거친 손길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콰앙, 그대로 대지에 내리 꽂았다. 엄습하는 충격에 카를로가 피를 토했다.
“자, 말해봐라.”
김우진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신이 널 이곳에 보낸 목적이 뭐지?”
“나, 나는 그냥···!”
“그래, 처음부터 말하면 재미가 없지. 걱정 마. 나한테는 네 입을 열게 만들 무궁무진한 수단이 있어.”
가볍게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에 마나가 침투했다. 카를로의 사지가 뒤틀렸다.
“끄아아아아악!”
“오러홀은 살아가는데 크게 지장이 없지. 그렇지?”
“자, 잠깐만···!”
“말할 기분이 들었나?”
“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시, 신께서 금제를···!”
“걱정 마.”
마나가 다시 한 번 카를로의 몸속을 침투했다. 허나, 이전과는 달랐다. 그의 심장과 뇌에 침입해 신이 새긴 금제를 벗겨냈다.
자신의 몸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지 깨달은 카를로가 경악했다.
“미, 미친! 신의 금제를 깨트려?”
“나도 20년 동안 놀고 있던 건 아니라서 말이지.”
당연히 카를로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불어라.”
이미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신들이 단순하게 똑같은 계획을 준비할 리가 없다.
김우진은 확신했고 그 확신은 정답이었다.
“신께서 연옥을 탈출해 ‘케이룸’이라는 차원으로 가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케이룸? 케이룸은 너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고향이 케이룸인 것도, 용사로서 활동했던 곳이 케이룸인 것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케이룸은···
“신께서 케이룸으로 인도할 각인을 새겨주셨습니다. 감옥 안에 조력자가 있을 테니 도움을 받아 탈출하라고 하셨습니다!”
“조력자?”
“가, 강민식님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신께서 직접 보호해주신다고···.”
신의 직접적인 보호라.
“···이 새끼들 봐라.”
케이룸이라는 차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기에, 어째서 케이룸으로 카를로를 보내려고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굴 개 호구로 보나.”
뿌득, 김우진의 안광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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