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48화 (48/150)

# < 047. 사냥 >

“으음···.”

눈을 떴을 때, 카를로는 독방 안에 있었다.

“···투기장은?”

마지막을 떠올렸다. 짐승의 성난 눈동자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커다란 충격이 뇌리를 강타했다.

“···말도 안 돼.”

상대가 용사라고 한들 그 또한 용사였다. 헌데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패배하다니.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나는 선택을 받았는데···!”

이건 무언가 잘못 되었다.

카를로가 현실을 부정했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기랄. 이런 곳에서 대체 어떻게.”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까? 깜깜함이 눈앞을 지배했다.

자신의 오러를 단숨에 으깨던 그 괴물도 감히 탈옥을 하지 못했는데 과연 자신이라고 가능할지, 자괴감이 들었다.

물론 신들께서 기회를 만들어 주신다 하셨···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배급구를 연 것은 그때였다.

“···강민식님?”

“다행히 일어나 계셨군요. 깨우는 수고를 덜었으니 다행입니다.”

“강민식님이 어떻게?”

연옥에 있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대충 돌아가는 흐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면 소지를 제외한 모든 죄수들은 통제된다. 무엇보다 교도관을 동행하지 않고 혼자서 다닐 수는 없다.

헌데 지금은 정해진 시간도, 강민식의 곁에 교도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강민식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탈출했습니다.”

마치 마실을 나간다는 듯한 평이한 어조였다. 그래서 더 괴리감이 있었다.

“···예?”

“구속구를 부수고 감옥의 문을 따고 탈출했습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불가능할 건 또 뭡니까?”

치익, 강민식이 반쯤 부식된 구속구를 내밀었다.

“···이걸 어떻게?”

“저는 독의 권능이 있습니다. 마나와 섞어 술식 자체를 부식시켰습니다.”

···그런 게 가능하다고?

물론 사명을 부여 받은 그 또한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만 이건 또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소장과 대부분의 교도관들은 여전히 투기장에 있습니다. 지금 이 층은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탈옥 하기 딱 좋은···.”

“맞습니다. 그래서 묻겠습니다만, 함께 하시겠습니까?”

“···방법은 있습니까?”

“제가 왜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오직 이 날만을 기다렸습니다.”

“···아.”

귀휴라는 큰 보상이 걸려 있음에도 왜 참가하지 않는지 의아했는데 그런 이유가 있을 줄이야. 더 없이 신뢰가 가는 말이었다.

카를로가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콰앙, 그 순간 문이 부서졌다. 강민식이 손을 내밀었다.

“가시죠.”

“예!”

강민식의 손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신이 내려준 동아줄 같았다. 잡아야 한다고, 이 기회를 놓치면 결코 두 번은 없을 거라고 본능이 소리쳤다.

손을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엘프를 제외한 아홉 명의 신입 죄수들이 함께였다.

* * *

“나갈 수 있다.”

마지막 도전이 실패한 이후, 데르카인은 탈옥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김우진이 신들과 한 배를 탄 게 아니라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오히려 적대감이 있다는 것을 안 이후부터는 신에게 복수하는 것에 남은 인생을 바치고자 했다.

거기에 당연히 고향으로의 귀향은 없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능하단다.

귀휴를 내보내 준단다.

이걸 어떻게 참겠는가.

그 보상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단 하루라도 좋다. 나갈 수만 있다면. 고향으로 가서 가족들의 안위를 살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기꺼이 도끼를 잡으리라.

싸우고 투쟁하여 승리하리라. 귀휴를 쟁취하리라!

그의 도끼가 빛을 발했다. 두툼하고 예리한 도끼는 이미 세 명의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설사 상대가 70년을 넘게 함께한 엘프라고 해도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까아아앙! 공간을 꿰뚫으며 날아온 섬광은 더 없이 빨랐다. 도끼로 쳐냈으나 오러가 튀어 오르며 충격이 엄습했다.

‘진심이군···!’

그야 당연했다. 연옥의 죄수치고 귀휴를 싫어하는 이는 없으니.

그가 도끼를 휘둘렀다. 다시 한 번, 날아들던 화살이 튕겨졌다. 빠르게 발원지를 찾았다. 짧으나 근육으로 가득한 두 다리가 대지를 박찼다.

콰앙,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는다. 도끼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허나, 상대는 이미 그 자리에 없다. 측면을 파고드는 두 대의 섬광에 허공에서 도끼를 비튼다.

허나 화살들은 의지라도 달린 듯 허공을 유영하며 위아래로 도끼를 지나친다.

“큽!”

온 몸을 감싼 오러를 폭발시키며 사각을 노리는 화살들과 상쇄시킨다.

데르카인이 도끼 자루를 열었다. 김우진을 상대로도 쏘아졌던 마력포가 모습을 드러내며 다섯 발을 연달아 쏘아낸다.

허나, 포탄들은 화살들과 부딪혀 모조리 상쇄되었다. 끝이 아니었다. 그보다 많은 화살들이 데르카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제기랄.”

활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말은 들었는데 직접 겪는 건 또 처음이었다.

하물며 저 화살은 하나하나가 모두 오러였다.

데르카인이 도끼를 정면을 향해 곧추세웠다. 찰칵, 도끼의 날이 방패처럼 커졌다.

하지만 화살들은 또 다시 방향을 틀었다.

“하, 자네 능력 말이네. 직접 겪으니 더 성가시군.”

시에나 올름이 각성한 권능. 마력 조작이라고 했던가. 자신이 조형한 마력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최고의 궁수에게 들어갔으니 더 없이 위협적이었다.

데르카인이 그대로 도끼를 휘둘렀다. 거대한 참격이 정면의 화살들을 쓸어냈다. 그리고는 도끼와 함께 몸을 회전시켰다. 오러로 이루어진 회오리가 사방을 가격했다.

모조리 소멸하는 화살들에 시에나가 다시금 시위를 당겼다. 빈 활대 위로 오러의 화살이 만들어졌다.

이전보다 훨씬 크고 강맹했다. 그대로 쏘아냈다. 도끼와 충돌했다.

파괴되었다.

다시 쏘아냈다. 더 크고 파괴적이었다.

다시 파괴되었다.

다시 다시 쏘아냈다.

시에나는 멈추지 않았다. 데르카인도 멈추지 않았다. 누가 먼저 쓰러지느냐의 싸움이었다.

바스라진 오러의 파편들로 대지가 들썩였다. 해소되지 못한 충격파들이 투기장 벽면을 두들겼다. 방호 마법 각인들이 빛을 발하며 저항했다.

“난 나가야 해.”

“나도 나가야 하네!”

“내가 더 급해. 난 72년을 참았어.”

“난 300년을 참았네!”

“이왕 300년 참은 거, 조금 더 참아도 되겠네.”

“이런 미친 깐프 같으니!”

화살의 폭격이 더욱 격렬해졌다.

그리고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데르카인이었다.

“허억, 허억···! 제기랄, 늙으면 죽어야지.”

아무리 용사라고 한들 육체가 노화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의 육신은 용사치고는 노화했고 체력적인 한계를 맞이했다.

결국 도끼를 거두고 주저앉았다.

“항복, 항···!”

퍼억-

두터운 발길질에 데르카인의 몸이 허공을 몇 바퀴 돌았다.

“내가 나가.”

시에나가 따라붙어 다시 한 번 복부를 후려쳤다.

“항복! 항복 했잖은가!”

데르카인이 피를 토하며 소리친 이후에야 전투는 끝이 났다.

시에나 올름의 승리였다.

“···피가 끓어오르는군. 역시 전투란 저래야지. 이성이 뜨겁게 타오를 정도로 격렬하게!”

“···음, 싸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나약한 소리! 전투에 모든 것을 맡기는 저 모습이 아름답지 않나!”

“···무서운 집념이 느껴져요.”

항상 차분하고 조곤조곤하던 시에나의 평소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되면 결승의 한 자리는 시에나인가.”

상상 이상으로 격렬한 시에나의 반응은 무언가 사정이 있어 보였지만 연옥에 갇힌 용사치고 사연 없는 이들은 없었다.

또한 지금은 그런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가질 시간이 아니었다.

“잡으러 가자.”

때가 되었다. 김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죄수들은 연옥의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때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만나지 못했다. 교도관과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이렇게 쉬울 수가 있나 의문이 들 정도로 간단했다.

‘분명 연옥의 탈옥은 만만치 않을 거라고 했는데.’

아무리 투기장에 모든 소장과 교도관들이 정신이 팔려 있다고 한들, 이게 맞나 싶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쉽다면 좋은 거다. 이걸 의심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그 이유가 명확하니까.

‘강민식.’

카를로의 시선이 탈옥을 주도하는 강민식에게 향했다.

그는 죄수들을 정원의 서쪽으로 이끌었다. 한참을 달린 서쪽에는 숲과 일부 식충 식물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고 식충 식물은 구속구가 풀린 용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곧 그들은 거대한 벽과 마주했다.

강민식은 능숙하게 벽면의 술식을 해제했다. 문이 생기면서 통로가 만들어졌다.

“가시죠.”

그리고 거기서 카를로는 확신했다.

목소리를 낮추며 조심스레 강민식의 곁으로 접근했다.

“강민식님.”

“왜 그러시죠?”

“···강민식님께만 살짝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조심스레 운을 땠다.

“저는 사실 신께서 보내신 과업을 수행 중에 있습니다.”

강민식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되물었다.

“과업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연옥을 탈옥하는 것입니다. 신께서 저에게 내려주신 사명입니다.”

“이곳에 저희를 가둔 자들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겁니까?”

“신께서는 큰 뜻이 있으시니까요. 그리고 강민식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게 무슨 뜻입니까?”

“신께서 말씀하시길, 어려움이 가득하겠지만 가면 조력자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게 저라는 겁니까?”

“신께서 말씀하시길, 조력자는 독의 권능이 있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벽의 술식을 해제하는 것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연옥은 권능으로 만들어져 있다고, 신의 힘만이 그것을 해제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강민식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수 없겠군요. 맞습니다, 저 또한 신께서 내려주신 과업을 수행중입니다.”

“역시···!”

“저는 과업을 받고 오늘의 탈옥을 계획했습니다. 카를로님이 저와 같은 사명을 받았다면 오히려 좋습니다. 함께 나가시는 겁니다.”

“예.”

그때였다.

애애애앵-

커다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교도소 전체가 흔들렸다.

“···저들이 눈치 챘다!”

“더 빨리 움직이자!”

들켰다는 것을 깨달은 죄수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컹컹!

멍멍멍!

멀지 않아 짐승의 울부짖음이 뒤를 쫓아왔다. 강민식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소장이 기르는 마수입니다. 후각이 뛰어나 한 번 추적을 시작하면 쉽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싸워서 죽여 버리고 가면 되지 않습니까?”

“만만한 놈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놈이 혼자 다니겠습니까? 교도관들이 함께하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끌리면 반드시 소장이 온다. 굳이 강민식이 말하지 않아도 용사들은 그 사실을 인지했다.

“모두 먼저 가십시오. 제가 독으로 후각을 교란시키겠습니다.”

“···강민식님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아뇨, 가십시오.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지리를 조금이라도 더 잘 아는 제가 아니면 다른 분들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느 방향으로 가든 차원의 끝으로 가면 됩니다. 그러면 차원의 방벽이 나올 거고 탈출할 수 있을 겁니다.”

차원의 방벽이라는 말에 일부 용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급박한 상황은 그들에게 궁금증을 해소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빨리 가세요!”

“감사합니다!”

“나가면 반드시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꼭 오십시오!”

강민식의 비장함에 모든 용사들이 감사 인사를 하며 떠났다.

그러길 잠시, 덕구를 대동한 김우진이 나타났다.

“의외군. 기회다 싶어서 도망칠 줄 알았는데.”

“말했을 텐데. 네게 전폭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신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야.”

“행동이 곁들여지니 조금은 믿음이 가는군. 헌데.”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자신의 처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최선을 다해서 따르겠습니다.”

“나는 소장이고 넌 죄수야. 그 태도를 잊지 말도록.”

“예.”

“특별히 나온 게 있나?”

“카를로가 첩자입니다. 제게 직접 신의 사주를 받았고, 제가 조력자라는 신의 당부를 들었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이는?”

“제게 추가적으로 접근한 이는 없었습니다.”

“일단은 한 명인가.”

김우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눈짓에 뒤따라오던 교도관들이 강민식에게 구속구를 채우고 인계해갔다.

“자.”

김우진이 덕구를 쓰다듬었다.

“덕구야, 사냥을 시작해보자.”

아우우우우-

세 개의 머리가 기쁨의 포효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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