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46. 귀휴 >
“죄수들의 식사에 이걸 섞으라고요?”
죄수번호 1176번, 베르너 레트만은 교도관이 건네주는 작은 알약 열 개를 받았다.
“이번에 들어온 죄수들 중 엘프를 제외한 이들의 식사에 섞으면 된다. 국에 넣으면 자연스레 녹아들 거다.”
“열 개입니다만?”
“다른 하나는 1177번의 것이다.”
“이게 대체 뭡니까?”
“소장님의 지시니 그냥 따라라.”
“소장님의 지시라면 그래야죠.”
베르너가 알약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특별한 마나의 느낌도 없었다.
“진짜 그냥 약인가?”
그렇다면 새로 들어온 죄수들과 요주의 인물인 강민식만 콕 찝어서 넣을 리가 없다.
“무언가 꾸미시는 모양이네.”
베르너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이미 한 번의 기회를 얻었고 두 번은 없다고 경고를 받았다.
까라면 까고 모른 척 하라면 모른 척 하면서 연옥에서 최대한 오랫동안 붙어 있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아직 다루어보지 못한 식재료가 많으니 말이야.”
전 차원의 식재료들이 몰려드는 연옥은 아무리 생각해도 노다지였다.
* * *
고의적으로 사건을 일으켜 죄수들을 궁지에 몬다.
김우진은 지난 20년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려면 할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좋아서 연옥의 소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저들이 진짜 죄수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강민식의 탈옥 사태를 기점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
첫 시도이자 첫 실패는 신들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김우진이 알고 있는 신들이라면 결코 그 모욕감을 감내하고, 그냥 넘기는 족속들이 아니다.
신이라고 불리기에 오만한 자들. 그들에게 체면과 자존심은 스스로의 목숨을 제외하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뻔하니, 김우진도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역시 열 명의 죄수들 중 첩자를 골라내는 일이다. 아예 없다면 없는 대로 좋다. 하지만 김우진은 첩자가 없을 일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수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투기장이 완성 되었다.”
김우진은 죄수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투기장이라고 해봐야 딱히 대단한 것도 없었다.
몬스터들을 기르는 축사장, 그리고 그 내부에서 몬스터를 도축하는 도축장을 일부 개조했다.
크기를 조금 더 늘리는 확장공사와 함께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중석을 만들었다.
“참가자 접수를 받겠다. 참가자들은 손을 들어라.”
따로 특별한 시설도, 장치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판만 깔아준다면 당장 달려들 놈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소장님! 약속을 지켜주실 줄 알았습니다!”
달의 늑대가 가장 먼저 손을 들어올렸다. 뒤이어 모든 수인들과 거인족이 참가 의사를 밝혔다.
허나, 정작 참가하기를 바라는 신입들은 얌전했다. 아마, 눈치를 살피느라 그런 것이겠지. 아직 연옥에 들어온 것 자체를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니.
때문에 김우진은 기름을 부었다.
“참고로 우승자에게 내려지는 보상은 최상급 영약과 귀휴다.”
“영약?”
“···귀휴?”
“귀휴라면···잠깐이라도 감옥을 나갈 수 있다는 겁니까?”
“감옥을 나간다고?”
“이 거지같은 곳을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은 예상외의 파급력을 발휘했다.
“내가! 내가 나가겠네!”
무언가를 만드는 것 외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던 난쟁이들을 이끄는 자가 간만에 도끼를 잡았다.
“···무조건 참가할게.”
엘프들을 이끌며 탈옥을 입에 달고 살던 엘프 또한 눈을 빛냈다.
“저요! 저요! 저도 나갈래요!”
“넌 이미 나갔다 왔잖아?”
“그거랑은 다른 이야기죠.”
“아니···.”
고귀한 엘프들의 귀족도 마찬가지였다.
“출전하겠습니다!”
“귀휴! 귀휴!”
“단 하루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아아!”
“고향의 어머니 나무를 뵙고 싶습니다.”
“내 고향에는 어머니 나무가 없지만 그래도 고향 땅을 밟고 싶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난쟁이들과 귀쟁이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귀휴라고? 잘만 하면 그대로 탈옥을···.”
“일단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모든 신입 죄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총 40명의 죄수들이 참가를 신청했다.
귀휴에 혹해 참가 신청을 하려다가 김우진의 눈빛에 슬그머니 손을 내린 강민식과 연옥에 만족하고 있는 소지를 제외한 전부였다.
* * *
“강민식님은 참여 안하십니까?”
이름이 뭐랬더라. 스페인 출신의 카를로라고 했다. 지구 출신이라는 것에 어찌나 반갑던지.
강민식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흥미가 없습니다.”
“귀휴가 말입니까?”
“···뭐, 나름의 사정이 있는지라.”
차마 김우진이 막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러는 카를로님은 왜 신청했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귀휴입니다, 귀휴.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나갈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말이 귀휴지, 나갔다고 그대로 들어오지 않으면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애초에 그는 감옥에 있어야 할 죄수가 아니라 칭송 받아야 할 용사였다.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 소장이라는 괴물에게 당했지만 그런 괴물이 이 세상에 넘쳐날 리가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소장이 강한 건 당연했다. 신이 연옥을 관리하라고 소장직을 준 자가 아닌가. 신의 대리인이 약할 리가 없다.
하지만 다른 용사들이라면?
카를로는 자신이 구원한 차원에서 더 없이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 받았다. 수많은 위험 속에서 수십 번도 더 사선을 넘어왔다.
아무리 상대가 용사라고 할지라도 지지 않는다. 꺾고 우승하여 감옥을 나가는 거다.
“다른 용사들도 다 그런 마음이군요.”
“그래봤자 저를 이길 수는 없을 겁니다. 귀휴를 나갔다가 곧장 이 거지같은 곳을 벗어날 겁니다.”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강민식의 입을 통해 그 이야기는 그대로 김우진에게 전해졌다.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뻔하지.”
그래, 너무 뻔하다. 그러니 일부러 귀휴라는 달콤한 과실을 던져준 것이 아니겠나.
“그런데 귀휴를 내보내주겠다는 게 거짓은 아니겠지?”
“절대 거짓이면 안 되네.”
“맞아요. 거짓말은 나쁜 거랬어요.”
“나가면 좋겠지만 저는 일단 싸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 효과가 너무 좋은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지만 어쨌든 좋았다. 고작 귀휴 정도야 계획대로만 된다면 얼마든지 내보내 줄 수 있다.
“귀휴도 계획이 제대로 실행된 뒤의 일입니다.”
김우진이 대진표를 펼쳤다. 40명의 죄수들이 둘씩 짝지어진 토너먼트 형식이었다.
“신입들은 강자들과 붙게 대진표를 짰습니다.”
율리아, 시에나, 타르칸 그리고 데르카인. 그리고 죄수들 중 비교적 강자라고 여겨지는 자들까지.
데르카인의 장기는 장비 제작이지만 그 또한 세상을 구한 용사다. 그의 무력은 연옥의 죄수들 사이에도 손에 꼽힌다.
“최대한 빨리 기절시켜주면 됩니다. 그럼 뒤는 교도관들이 알아서 그들을 독방으로 실어줄 겁니다.”
확실한 카드인 네 명과 붙지 않는 자들은 설사 승리하더라도 2차전에서 네 명과 붙게 만들었다. 안된다면 3차전에서라도.
결국 모두 기절해 독방으로 실려갈 운명이다.
“그 다음은?”
“그 잘난 권능을 이용한 강민식이 알아서 할 겁니다.”
감옥 층에는 그들과 극소수의 교도관들만 남게 될 거고 그 틈새로 강민식이 접촉하여 탈옥을 종용하게 된다.
교도관과 소장은 전부 다른 곳에 가 있고 구속구는 풀어졌으며 함께 탈옥하고자 하는 죄수들이 있다.
그 상황에서 탈옥을 하지 않을 죄수가 어디 있을까.
거기서 김우진이 할 일은 간단하다.
찾는 거다.
방벽과 접촉하여 나갈 수 있는 자를, 신에게 열쇠를 받은 첩자를.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고 보네만. 자네는 강민식을 믿나?”
“믿지 않습니다.”
데르카인의 물음에 김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믿지 않는다. 그저 상황을 믿을 뿐이다.
강민식에게는 선택지가 없다.
그리고 나름의 대비도 해놨다. 그가 차원의 방벽까지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중간까지 죄수들을 인도하는 것, 그게 그의 역할이고 전부다.
그 선을 넘는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그의 가치는 현재 이중첩자라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투기장이 열리는 날이 되었다.
* * *
“크흐흐.”
타르칸 톨리스는 가볍게 몸을 풀었다. 콰앙, 가벼운 발길질에 대지가 우그러졌다. 가벼운 손짓에 밀려난 공기가 나무를 베어 넘겼다.
그의 몸 풀기에 주변의 용사들이 경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새로 들어온 열 명의 용사들. 허나, 타르칸의 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시에나 올름, 율리아 카르센, 그리고 데르카인 알베트. 잘만하면 전부와 싸워 볼 기회가 있을 지도.’
수십 년간 엘프들을 이끌어 온 자와 엘프들의 귀족. 그리고 300년간 연옥에서 머물러온 노괴.
다른 죄수들은 영약과 귀휴에 혹해 눈이 돌아갔지만 타르칸은 싸움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투쟁은 수인의 본능이다. 수인들의 귀족, 달의 늑대인 타르칸은 그 본능이 더 강했다. 강자와의 피 터지는, 모든 것을 내던져야지만 하는 전투는 언제나 심장을 두근 거리게 만든다.
하물며 김우진을 따라가다보면 언젠가 신들과도 붙게 될 터, 오늘의 투기장은 아주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려면 초반에는 최대한 힘을 비축해야겠군.’
떨거지들에게는 관심이 없으나 소장의 명령을 완수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들을 빨리 처리하고 힘을 비축하는 것이 최선이다.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모두 대진표는 확인했겠지?”
부소장의 외침에 몸을 풀던 용사들이 행동을 멈추고 집중했다.
“타르칸 톨리스, 카를로 디아고 앞으로.”
첫 번째 순사넌 타르칸. 상대는 카를로 디아고라는 스페인 인간이었다. 모든 이들이 물러나고 거대한 투기장 안에는 오직 둘 만이 남았다.
‘자신 있다는 건가?’
혹시나 했지만 진짜로 구속 장치를 모두 풀어버린 행태에 카를로는 조금 당황했다.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언뜻 보면 허술해 보이지만 사방에 마법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뚫으려면 뚫을 수는 있지만 단숨에 찢어발기지는 못하는 수준.
‘잠깐 머뭇거리는 순간, 교도관들이 달려들겠지.’
허나 진짜 문제는 상석에 앉아 오만하게 투기장을 내려다보는 소장이다.
무슨 짓을 해도 소용 없다는 자신감. 아마 그게 구속 장치를 모두 풀어준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 좋아. 여기서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없어.’
카를로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질까. 토너먼트에서 승리하고 귀휴를 나가게 되어도 그럴까?
만약을 대비한 안전장치들이 있겠지만 소장이 직접 따라오지는 않을 거다. 그거면 된다. 그러면 무조건 탈옥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면 우선 네놈부터 죽여버려야겠군.”
카를로의 시선이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서 있는 짐승에게 돌아갔다.
“구경은 끝났나?”
“신사인척 하지 마라, 더러운 짐승아.”
“···뭐라고?”
“너희들의 추악함은 수도 없이 겪어 왔다.”
카를로가 용사로 있던 세계에도 수인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야만족이었다.
이성은 있으나 야성을 이기지 못하고 본능에 몸을 맡긴 짐승들. 그들은 하나의 왕국을 이루었으나 말만 왕국이었지 늘 인간의 국가들을 약탈하기 위한 도적때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마물화가 되어 진짜 적이 되기도 했다. 그에게 수인은 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
은빛의 짐승이 웃었다.
“내 앞에서 그 따위 말을 한 놈은 한 명 밖에 없다. 왜인 줄 아나?”
“알아야 하나?”
“알아야지.”
야성이 드러났다. 살기가 폭사되었다.
동시에 바람이 일었다.
───!
카를로가 본능적으로 권능을 발현시켰다. 오러로 이루어진 갑옷과 창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게 네 미래니까.”
공간을 격하여 날아드는 손톱과 충돌한다.
“크윽···!”
창이 부서진다. 갑옷이 찌그러진다.
카를로가 신음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지만 상대는 그가 재정비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
“···어떻게 수인 따위가!”
이어지는 충격.
산산이 부서져 소멸하는 갑옷.
숨 막힐 듯 한 살기와 광기.
그것이 카를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약해 빠졌네. 저런 능력으로 타르칸을 도발한 거야? 밖에서 만났으면 바로 머리가 뜯겨졌겠네.”
“저 짐승 놈. 신났군.”
관중석에 앉은 난쟁이가 자신의 애병을 어루만졌다.
“그토록 싸우기를 바랐는데 이루어졌으니 신날 수밖에.”
“귀휴는 내거네.”
“어머, 그건 날 이기고 이야기하지?”
“이길 거니까 하는 말이네.”
대진표 상, 서로 승리가 이어지면 데르카인은 시에나와 부딪히게 되어 있었다.
“어이가 없네. 누구 마음대로?”
“포기하게. 만약 자네가 날 이긴다고 해도 만약 율리아와 싸우게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겠나?”
율리아는 타르칸과 부딪힌다. 그리고 승자는 결승에서 데르카인 혹은 시에나와 만나게 된다.
“못 싸울 건 또 뭐야?”
“이길 순 있고?”
“날 너무 얕보는 것 아니야?”
애초에 하이엘프는 고귀한 것이지, 강한 것이 아니다.
“전 안 봐드릴 건데요.”
“네가 무조건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니? 애초에 넌 타르칸이나 이기고 오렴.”
“그냥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에요.”
“나도 마찬가지란다. 이런 상황에서 하이엘프에 대한 예우 같은 걸 찾는 건 아니겠지?”
“아무렴요. 필요 없어요.”
“그 자신감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하네.”
두 엘프가 처음으로 반목하며 으르렁거렸다.
“엘프들의 동족애는 우주 최고라더니 아주 콩가루가 따로 없군.”
“그런 그쪽이야 말로 들어가서 잠이나 자지 그래? 실력도 예전 같지 않을 텐데.”
“누가 말인가? 내가? 내 도끼는 아직 녹슬지 않았네. 저 따위 짐승 놈은 단숨에 쪼개 버리지.”
“도끼는 아니어도 관절은 녹슨 것 같던데.”
“아직 팔팔하네! 500년은 더 살 수 있어!”
“늙고 힘들어서 그냥 출소하겠다며?”
“심신미약과 감정에 호소한 선처 모르나!”
“아주 노괴가 따로 없네. 누가 이걸 드워프라고 해?”
김우진은 그 모든 대화를 들으며 강민식을 향해 눈짓했다.
미리 가서 이것저것 준비를 해놓으라는 뜻이며 그 뜻을 알아들은 강민식이 다른 죄수들의 눈을 피해 자리를 비웠다.
교도관 둘이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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