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42. 제안 >
“가자.”
효율은 중요한 문제다.
김우진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다. 죄수가 오기 전까지, 그 전에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가야만 한다.
본래 김우진의 계획은 스스로 발품을 파는 것이었다. 대상단이나 경매장을 직접 찾아 의뢰를 넣거나 구입하는 쪽으로.
하지만 율리아의 동료 중 대상단의 상단주가 있음으로 그 과정이 생략되었다.
최상급 영약이라는 게 그리 흔하지도, 구하기 쉬운 것도 아닌 만큼 그동안의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김우진은 그 사이 세계수를 만나고 오기로 했다.
“벌써가?”
“다시 올게.”
“혹시 문제 있으면 꼭 연락해. 아무리 봐도 저거 괴물이야.”
“근데 왜 당근이야?”
“상단의 상징이 당근이야.”
조심스레 율리아에게 당근 모양의 통신구를 건네는 데이지의 배웅을 받으며 둘은 상단을 떠났다.
율리아가 지도를 펼쳤다.
“데이드람의 엘프들은 왕국을 세웠어요. 하이엘프이신 필립스님이 왕으로 계시죠. 지금 있는 바르간 왕국과는 거리가 꽤 되요.”
“왕국이라.”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엘프들은 세계수를 중심으로 뭉치고, 세계수는 보통 차원에 하나씩 밖에 없으니.
여러 세계수가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한 나라에 왕이 둘일 수 없듯이 세계수도 마찬가지니까.
“이동마법진은 활성화 되어 있는 세계인가?”
차원의 마법적 발전에 따라 있는 곳과 없는 곳이 존재했다.
“있어요. 엘프들 쪽으로는 원래 없었는데 제가 용사로 있을 때, 숲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에 설치했거든요.”
연합을 위해서는 교류가 필요했고 율리아가 떠날 때쯤에는 작은 마을이 대도시로 발전했다.
부르테인이 바로 그곳이다.
“엄청 커졌네요. 제가 떠나기 전과 비교했을 때, 1.5배 이상은 커진 것 같아요.”
“어디로 가야할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되겠군.”
창밖, 도시의 성벽 저 멀리 숲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는 가히 세계를 떠받치는 기둥과도 같다. 하늘을 관통한 줄기는 쉽게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습게도 굳이 그걸 찾을 필요도 없었다. 공간이동마법진이 설치된 제국 마탑 지부를 벗어나자 엘프 하나가 말을 걸어왔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흔하디 흔한 엘프였다.
“어머니 나무께서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세계수의 사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발라크님.”
“오랜만입니다, 율리아님.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주변을 의식한 것인지, 엘프의 음성은 더 없이 작았으나 두 초인이 듣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위대한 분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난 드래곤이 아닌데.”
“하지만 드래곤도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것은 압니다. 그 이상은, 제 능력이 미천하여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말은 청산유수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부탁해요.”
발라크는 둘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갔다. 숲과 가까워지자 쭉 늘어선 인파가 보였다.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자들입니다. 연합과 교류를 시작한 이후, 매일 같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적은 다양하다. 단순히 엘프들을 보고 싶어서, 정기가 넘치는 숲에서 쉬거나 수련을 하고 싶어서, 엘프들과 교역을 하고 싶어서.
엘프들은 숲의 몇몇 구역을 타 종족에게 허락했고 그곳에서 주로 만남이 이루어졌다.
“여긴 샛길이네요.”
“네. 오신 게 외부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든 곳이 개방된 곳은 아니었다. 엘프의 숲은 개방된 곳보다 그렇지 않은 곳이 더 많았다.
“이곳은 숲의 파수꾼들도 잘 순찰을 돌지 않는 곳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인도해주고 계시니 설사 돈다고 해도 저희를 발견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 숲의 나무들이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김우진과 율리아를 숨겨주고 있었다.
“적어도 배타적인 건 아닌 것 같군.”
“그럴 이유가 없잖아요. 데이드람의 어머니 나무께서는 다르다고요.”
“그건 네 생각이고.”
세계수들이 세상을 구하는데 적극적인 것은 본인들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계수는 결코 선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적당히 믿을 수는 있어도 완전한 신뢰는 아직 시기상조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앞으로 쭉 가시면 어머니 나무께서 기다리고 계실겁니다.”
“왜 같이 안가고요?”
“어머니 나무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감사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발라크가 사라졌다. 나무들이 일직선으로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마치 레드카펫이 깔린 것 같았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어떤 느낌이지?”
“위대하신 분이에요.”
“크라프트와 비교하면?”
“장난끼가 좀 있으시지만 그런 속물적인 느낌은 없었어요.”
“네가 속은 건 아니고?”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엔 그래요.”
“알베니우스와는 어떻게 만난 거지?”
“음···. 여기까지 와서 숨길 이유도 없으니 상관없겠죠. 알베니우스님과 어머니 나무께서 이미 연이 있으셨어요.”
“이미 계획이 있었고 거기에 너를 끌어들인 거군.”
“맞아요.”
“그게 맞습니까?”
김우진의 시선은 율리아를 향하지 않았다. 하늘. 그 위에는 숲에 들어온 직후부터 꾸준히 뒤를 쫓던 자그마한 참새가 있었다.
김우진도, 율리아도 그것이 평범한 참새가 아니라는 것을 진즉에 눈치 챘다.
- 맞단다.
참새가 율리아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어머니 나무님, 오랜만에 뵈어요.”
- 숲의 아이야, 다시 보니 좋구나. 너를 그런 사지로 몰아놓고 하루도 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단다.
“직접 몰아놓은 당사자가 할 말은 아니군요.”
- 당사자이니 하는 거란다. 설사 위선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위선도 선이니.
참새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크라프트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정령체가 작군요. 정령체는 살아온 세월에 비례해서 커지는 게 아닙니까?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거대하던데?”
- 정령체의 크기는 세계수가 내키는 대로란다. 자신의 한계 내에서 키우고 싶으면 키우고, 아니면 마는 거지.
- 크라프트의 세계수는 다른 이들에게 위압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딱히, 그 정도에 위압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냥 흉측하게 생겨서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
- 그래서 너구나.
목을 반쯤 돌린 참새가 김우진과 눈을 맞췄다.
- 연옥의 소장, 그리고 내 아이에게 릴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인간이.
“예, 접니다. 초대장은 잘 받았습니다.”
- 꼭 한 번 보고 싶었단다.
- 저 오만한 신들이 그토록 경계하는 인간이 어떤 자인지.
“소감은 어떻습니까?”
- 그럴만 하구나.
참새가 다시 날아올랐다. 천천히 걸어가는 김우진의 앞에서 날개를 퍼덕였다.
-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우리의 계획에 동참할 생각은 있다는 거겠지?
“악마나 그런 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 이야기를 전부 들은 것 아니었니? 그래서 납득하고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보낸 첩자의 경계심이 생각보다 두텁습니다. 연옥을 부수기 위해 세계수를 심었다라는 것과 알베니우스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습니다. 아, 이번에 세계수끼리 연동해 통신을 주고 받을 생각이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 숲의 아이들이 원래 경계심이 많단다. 허나, 그래서 이번 일에는 더 없이 적격이었지. 섣불리 모든 걸 털어놓고 네게 이용당할 수는 없으니.
- 어쨌든, 다 왔단다.
반투명한 결계를 통과하자, 세계수의 기운이 보다 크게 다가왔다.
어마어마한 마나의 밀도는 과연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다웠다. 데이드람의 그녀는 크라프트의 세계수보다도 한 수 위였다.
- 그렇다면 보다 확실하게 설명을 해줘야겠지.
- 율리아의 말이 맞단다.
- 우리는 연옥을 부술 생각이란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과정일 뿐이지.
연옥을 부숴 죄수들을 보내고 심어놓은 세계수로 교차 차원, 연옥을 탈취한다.
- 그게 첫 번째.
- 그리고 연옥의 탈취 소식을 듣고 당황하는 신들을 연옥으로 끌어 들인다.
- 그게 두 번째.
- 그 다음은 무엇일 것 같니?
“재미있는 농담을 하는군요.”
- 농담처럼 들리니?
“명색이 신입니다. 그리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그러니까 네가 필요한 거란다.
- 너는 다른 용사들과 달리 진짜 죄를 짓고 연옥에 수감된 죄수 아니니.
세계수의 음성에 마나가 공명한다.
- 신을 죽인 자.
찌르르 울리는 압박감은 어느새 참새는 어느새 봉황이 되어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 신살자, 김우진.
봉황이 또박 또박 이름 석 자를 내뱉었다.
- 우리와 함께 하는 게 어떻겠니.
* *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제는 이제 그냥 시종 정도로 생각하는 건가?”
소멸된 집무실을 리모델링하던 드워프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근데 뭐 딱히 새삼스럽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래.”
업무가 벌목이나 호수 만들기 같은 환경조성 출역에서 리모델링으로 바뀌었을 뿐, 드워프들은 꾸준히 소장에게 부려먹어져 왔다.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되네. 무슨 천하제일 노예 대회도 아니고.”
“맞습니다. 저희가 진짜 죄수도 아니고.”
연옥에 갇혔고 죄수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죄수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이 진짜 죄수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죄를 짓지 않았으니까. 그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의미가 다르네.”
불평하긴 했지만 데르카인이 순순히 김우진의 말을 듣는 건 그 이유가 가장 크다.
김우진의 숨겨진 비밀을 알았기에, 그가 단순한 신의 개가 아닌 무언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그리고 신을 향한 적의가 느껴졌기에.
어째서 신들에 의해 임명된 연옥의 소장이 신들을 적대하고 그들의 눈을 속이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나.
예로부터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전 조금 불안합니다. 연기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연기? 굳이?”
데르카인 또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장에게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함정을 파봐야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징벌방에 넣는 것뿐이다. 그리고 소장은 아무런 이유 없이 넣을 수도, 저번 탈옥을 핑계로 그들을 완전히 나락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장은 그러지 않았다.
“연기도 다 얻을 게 있으니까 하는 거네. 그런데 소장이 그걸 연기해서, 우리를 속여서 얻는 게 뭐지?”
“···없네요?”
“그래, 없네. 그래서 내가 주저 없이 소장의 손을 잡기로 한 거고. 내 촉이 말하고 있네. 소장과 함께하면 우리를 여기 가둔 개자식들한테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라고.”
데르카인의 발언에 드워프들이 흥분했다. 데르카인 만큼은 아니지만 그들 또한 연옥에서 버린 시간들이 적지 않았고 그만큼 신에 대한 분노를 쌓아왔다.
“···근데 저것들은 뭐하는 겁니까?”
와아아아!
막아!
죽여!
드워프들의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했다. 축사장이었다. 풀려난 축사장의 몬스터들이 수인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소장이 이제는 수인들에게 축사장을 맡겼다고 했네.”
“수인들도 소장과 손을 잡은 겁니까?”
“16대 1을 하고 의지가 팍 꺾인 것 같더군.”
“소장이 진짜 괴물이긴 하군요. 저 같아도 꺾일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지.”
대충 대꾸해준 데르카인이 집무실의 설계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한 장 더 넘기자, 또 다른 종이가 드러났다.
집무실 리모델링과 더불어 소장의 또 다른 명령.
[투기장 건설.]
투기장이라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끄응, 데르카인이 신음을 사켰다.
* * *
“그러게 가지 말라고 했지 않나. 김우진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고.”
우주가 보이는 신전.
연옥에서 복귀한 베른 오르티안은 신전의 정원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면 바라던 대로 무언가 얻은 것이라도 있나?”
“···신경 끄십시오.”
“조급한 건 알고 있지만 신이라는 자가 그리도 권위가 없어서야.”
“크게 보면 실패한 건 당신 때문이 아닙니까?”
“그건 또 재미난 추론이군.”
후후, 남자가 느긋하게 술을 음미했다.
“당신이 보낸 집행자들의 수준이 부족해 고작 이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강민식이 붙잡혔습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 되었을 겁니다.”
“이야기는 똑바로 해야지.”
남자가 다리를 꼬았다.
“너희들이 도움을 요청해 그 조잡한 계획에 조금 도움을 준 것 아니더냐. 나는 애초부터 그 따위 조잡한 계획에 찬성한 적이 없었다.”
신들의 위신을 깎아먹는 한심한 놈 같으니.
“네놈들이 바라는 대로 한 번의 기회를 주었고 실패했다.”
“···아직 한 수가 있습니다. 이번에 심어놓고 왔습니다.”
“그래 봤자겠지. 한 번 더 주제를 모르고 설치면 더 이상의 자비를 보여줄 수 없음이다.”
아무리 관대한 신이라도 그 자비는 무한하지 않으니.
“그러니.”
쨍그랑, 잔이 깨어졌다. 유리 조각들과 술 방울들이 허공에 체공했다.
“얌전히 있거라. 가만히, 죽은 듯이. 괜히 김우진이 경계하게 만들지 말란 말이다.”
“······.”
“꺼져라.”
그의 축객령에 베른이 이를 악물고 사라졌다.
“신이시여.”
그를 모시는 여인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인원을 추렸습니다. 전부 다섯입니다.”
“적당하구나.”
“예, 목숨을 바쳐서 반드시 과업을 완수할 겁니다.”
“그래. 이후 김우진의 반응이 궁금하군.”
딱, 조각들을 다시 하나로 합친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술이 씁쓸했다. 하지만 과업이 완수되는 날이면 다시 달아질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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