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41. 당근 종 >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차원에는 마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모든 마나는 각각의 차원의 향취를 가진다. 큰 의미는 없다. 도시의 공기보다 숲의 공기가 더 산뜻하듯이, 겨울의 공기가 여름의 공기보다 차갑듯이, 그냥 그런 거다.
일반적으로는 그다지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의 미세함. 하지만 하이엘프에게는 고향에 온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빨리 다시 데이드람에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최소 백 년 이상이었겠지.”
정상적인 루트대로 세계수가 발아하여 통신이 가능할 정도까지 큰다면 그정도 시간은 걸릴 테니.
그것도 연옥이 교차차원으로서 마나가 풍부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인 차원이었다면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을 거다.
“세계수들을 연결시켜서 연옥을 침공하기라도 하려고 했나?”
“···하늘이 참 맑네요.”
“관리자들이 이 사실을 알아야 하는데.”
“그러면 저도 혼자서는 안 죽어요. 모든 걸 다 이야기할 거예요.”
“너랑 네 뒤에 있는 자들까지 다 피해가 갈 텐데?”
“···무조건 소장님이 시켰다고 하면 안 믿겠죠?”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바로 안내해드리면 되나요?”
“아는 상단이 있나? 용사였으니 콩고물이라도 먹으려고 달려드는 상단들이 제법 많았을 텐데.”
“상단이요?”
“영약부터 구해야지.”
“알고 있는 인간 상단이 하나 있긴 해요.”
“규모는?”
“커요. 제가 떠나기 전에 나라 전체에 지부가 있는 수준이었어요.”
그 정도라면 꽤나 규모가 있는 대상단이다. 운이 좋아 바로 영약을 가지고 있거나 대륙 전역에 끈이 있어 영약 경매에 대한 정보를 구할 수 있을 거다.
“바로 가자.”
“잠깐만요. 그냥 가도 괜찮을까요? 제가 크라프트를 보고 좀 느낀 게 있거든요?”
“네 동료가 믿음직스러운 자라면.”
“눈치 채셨어요?”
“엘프들의 빈약한 인간관계가 뻔하지.”
“빈약하지는 않거든요?”
“다른 종족과 개인적인 교류가 거의 없는 건 맞잖아.”
개인차가 조금 있겠지만 대채로 그렇다. 엘프들은 그렇게 개방적이지 않다.
그 정점인 하이엘프가 주저없이 소개해줄 인간이라면, 그만큼 믿을 수 있다는 것이고, 용사의 동료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믿을 만하긴 해요.”
“그럼 됐군.”
하이엘프의 신뢰라는 건 결코 가볍지 않을 테니.
* * *
세상을 어지롭히던 광룡이 죽었다.
위대한 용사, 율리아 카르센 칼 아래 목이 잘렸다. 광룡의 시체는 산과 같았고 그 피는 강을 이루었다.
무려 17개의 왕국을 멸망시켰던 광룡의 군단은 와해되었다.
너무 많은 나라가 멸망했고, 너무 많은 토지가 황폐화 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럼에도 승리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일주일동안 축제가 이어졌다.
대륙은 종족과 나라를 초월해 진정한 하나가 되었다. 함께 연합을 이루고 광룡과 싸웠기에, 살아남았기에 그럴 수 있었다.
‘저의 과업은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모두가 기뻐하던 그때, 광룡의 목을 벤 영웅은 말했다.
‘이제 더 이상 제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겠어요.’
떠나겠다고.
갑작스러운 선언에 모두가 경악했다. 승리의 달콤함에 취하기도 전에 그 주역이 빠진다는 말에 모두가 말렸다.
‘저에게도 고향이 있어요.’
하지만 그 말에 모두가 순수하게 영웅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아니, 모두는 아니었다.
‘꼭 가야만 해? 정을 붙이면 고향이라는 말이 있잖아. 여기서 그냥 함께하면 안 돼?’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지만 마지막까지 용사를 말렸던, 그럼에도 끝내 말리지 못했던 동료들이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는 모양이네. 요새 조금 무리하긴 했지.”
일이 밀려 이주일 째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을 하고 있으니.
에드먼드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비볐다. 기지개를 펴 찌뿌둥한 어깨와 허리를 풀어주고 손수 차를 탔다.
후룩, 마르지의 꽃잎을 말린 차를 한 모금 머금자 산뜻함이 멍한 정신을 풀어주었다.
“벌써 밤이네.”
창밖은 새카만 어둠이 가득했다.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뭐지.”
“내가 추천해 준 차, 아직도 먹고 있네?”
“응, 피로 회복에 꽤나 좋더라고.”
“일이 엄청 많아 보이고.”
“상단의 규모가 커졌거든. 네가 떠날 때랑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짜악, 거친 손길이 에드먼드의 뺨을 후려쳤다. 스스로의 오른손이었다.
“···아픈데.”
짜악, 이번엔 왼손이 반대쪽 뺨을 때렸다.
“뭐하는 거지?”
“아무래도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에요. 이해해주세요. 원래 조금 맹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착해요.”
“그건 도저히 칭찬해줄 구석이 없을 때 하는 말 아닌가?”
“그럴 리가요. 그래도 대륙에서 제일가는 마법사였어요.”
“마법사라는 놈이 저 따위라고?”
“지금은 가업을 이어 받아서 상인의 역할이 더 크지만요. 하지만 마법사의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결국 그냥 조금 녹슨 마법사라는 건데···용사의 동료였다는 놈의 반응으로는 한심하기 그지없어.”
남자의 경멸의 시선을 인지할 때쯤, 에드먼드의 기행이 끝이 났다.
마침내, 그는 현실을 인지했다.
“···율리아?”
“안녕, 에드먼드. 오랜만이야.”
“···정말 율리아야? 진짜 그 율리아 카르센이야?”
“네가 아는 게 함께 광룡과 싸운 하이엘프가 맞다면.”
“말이 안 되잖아! 율리아는 떠났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데이지한테 어떻게 고백했는지 알고 있는 걸. 죽은 마수의···.”
“···율리아 맞네.”
“아직 다 이야기 안 했는데.”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이 너 말고 어디 있어.”
“그런식으로 고백하는 사람도 너 말고 없어.”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돌아간 것 아니었어?”
“돌아갔었어.”
비록 본래의 세계인 아르반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다시 왔다고? 왜? 아니, 물론 널 다시 보니 기쁘긴 하지만···차원 이동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거였어?”
“당연히 아니라는 걸 알잖아.”
에드몬드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았다.
떠난 지 반년이 훌쩍 지난 시점에서 율리아가 돌아오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방문, 그리고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봐서 할 말은 아니지만 부탁이 있어서 왔어.”
“부탁?”
“응, 영약을···.”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에드먼드! 내가 직접 쿠키를 구웠···는데···.”
새카맣게 탄 쿠키를 들고 활기차게 들어온 금발의 여인이 불청객들의 존재에 멈칫했다.
“···율리아?”
쨍그랑, 접시가 바닥에 떨어졌다. 파편들과 함께 쿠키조각이 비산했다. 그중 하나가 김우진의 손에 안착했다.
까득, 자연스레 입 안으로 들어갔다. 김우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딴 게 쿠키?”
퉤, 입으로 들어갔던 쿠키 조각이 다시 바닥으로 돌아갔다.
* * *
다른 차원에서 소환된 용사, 율리아 카르센과 함께 세상을 구했던 네 명의 동료들이 있었다.
대마법사, 에드먼드 프로인과 광전사, 데이지 호크네는 그들의 일원이었다.
“그러니까 영약을 구하러 왔다고?”
감정을 숨기는데 미흡한 광전사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응, 구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에드먼드가 나름 잘나가는 상인이야. 분명히 구해줄 걸.”
“아니, 그 영약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 확답은 조금···.”
“안 해줄 거야? 율리아인데?”
“노력은 해보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어떻게든 구해야지. 율리아인데.”
그녀의 말에 김우진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아가 쌓아놓은 인맥 덕분에 어쩌면 생각보다 더 쉽게 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필요한 건 최상급 영약이다. 설명초나 드와이그의 뿌리 같은.”
“그런 건 부르는 게 값이고 백 년에 하나가 나올까, 말까할 정도로 희귀합니다만.”
“그 이하는 필요 없다. 굳이 똑같은 것을 구해줄 필요는 없지만 급은 맞아야 한다.”
“일단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하던 김우진은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데이지의 파란 벽안이 줄곧 그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뭐지?”
“율리아,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내 쿠키를 뱉은 이 개, 아니 이 분은 대체 뭐야? 인간이니까 연인일 리는 없고.”
“동료다. 일단은.”
“일단은? 그 애매한 대답은 뭐야?”
“같은 목표로 힘을 합치기로 했으니 일단은 동료지.”
“하지만 일단이라는 건 언제라도 배신할 수 있다는 거잖아?”
“그건 율리아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고.”
“뭐야, 아무리 봐도 평범한 동료 관계는 아닌데?”
“···아하하, 그냥 이런저런 사정이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해.”
데이지가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보냈으나 곧 거두었다. 율리아를 믿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영초를 구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율리아, 너의 생환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거야.”
용사는 영웅이다. 세계를 구한 영웅의 귀환을 알리고 무언가를 원한다고 한다면 쌍수를 들고 찾아올 이들이 넘쳐났다.
그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여러 국가들이 그걸 빌미로 너를 포섭하려고 하겠지만.”
“내가 귀환했다는 건 드러나지 않았으면 해. 어차피 오래 있지 못해.”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에드먼드의 시선이 아주 잠깐, 김우진에게 닿았다.
광룡의 목을 베어버린 율리아 만큼은 아니지만 에드먼드 또한 강자였다. 그는 여덟 개의 각인을 새긴 대마법사로서 대륙 제일의 마법사였다.
그런데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마법, 지혜의 눈이 김우진이라는 인간을 상대로 아무 것도 간파해내지 못했다. 마치 율리아처럼.
그게 의미하는 건 하나다.
강자다. 그를 압도하는 미친 수준의 강자.
어디서 저런 인간을 데리고 왔는지 의문이었다. 다른 차원의 용사라도 되는 건가.
‘···꽤 그럴 듯해.’
우연히 나온 것 치고는 제법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의 상식에서 용사와 비등한 건 용사뿐이니까.
“최대한 노력해볼게. 여차하면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걸 전부 동원해서라도.”
“고마워.”
“숙소는 있어?”
“아니.”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묵어. 별채를 하나 내어줄테니.”
“내가 안내해 줄게.”
데이지가 율리아와 김우진을 데리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에드먼드가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진짜 무슨 일이지?”
세상을 구하고 사라진 용사가 또 다른 용사와 함께 영약을 구하러 왔다라.
율리아의 부탁이니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하고는 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범차원적인 위기가 닥쳤다면 또 모를···까···?”
범차원적인 위기?
그래서 용사들이 연합을 한다?
한 가지 가정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한편, 김우진과 율리아는 별채에 도착했다.
“여기서 묵으면 돼.”
“나쁘지 않군.”
거대한 별채는 대상단의 것이라는 것을 외치듯, 호화스럽게 그지없었다.
“고마워, 그러면 내일···.”
김우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율리아가 뒤따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데이지의 손이 그녀의 옷깃을 붙잡았다.
“왜?”
“저 남자 대체 뭐야?”
“음, 아까 말했듯이 일단은 동료?”
“그게 뭐야? 혹시 협박이라도 받고 있는 거야?”
“나 그래도 용사인데.”
“저 사람도 용사 같던데. 너랑 똑같이 읽을 수가 없어.”
그건 용사의 동료였던 데이지를 아득하게 뛰어넘었다는 소리였다.
“혹시 협박을 받고 있는 거면 별채에 있는 당근 종을 쳐.”
“어?”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네가 부탁하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도와줄게.”
“아니, 그럴 필요는···.”
“너무 부담가지지 마. 네 덕분에 모두가 살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하지.”
데이지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 * *
- 그 아이가 왔구나.
차원의 장벽이 열렸다. 열어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그 흔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방문자의 존재를, 그녀를 제외한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빨리···.”
세계수를 모시는 하이엘프가 고개를 숙였다.
- 그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씨앗이 벌써 발아해 정령체가 형성되었더구나.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
“괜찮은 겁니까?”
- 일단은 무사히 이곳으로 왔으니 어떻게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봐야겠지.
죄수로서 연옥에 갇혔던 율리아가 그곳을 벗어나 차원을 넘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런 뜻이었다.
완전히 계획대로 되지는 않아도 적어도 최악으로 흘러가고 있지는 않다는.
- 무엇보다 그 소장이라는 자도 함께란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 과연, 알베니우스가 그렇게 자랑한 이유가 있었음이야.
- 괴물이 따로 없더구나.
세계수의 정령체, 작은 참새가 웃음을 흘렸다.
- 그런데 바로 올 생각은 없나 보구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으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요?”
- 직접 만나 보기 전에는 모르겠지.
- 일단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려무나.
- 소문이 나서는 안 되니.
“예, 명에 따르겠습니다.”
하이엘프가 물러났다. 홀로 남은 참새가 팔짱을 꼈다.
- 아카식 레코드에 의한 우주의 계약. 지금의 연옥은 용사들보다 소장을 묶어둔다는 느낌이 더 크다지.
- 신들이 두려워하여 계약으로 묶어둔 존재라. 연옥의 소장, 김우진. 어떤 인간인지 궁금하구나.
- 알베니우스가 말한 그대로일까?
후후, 참새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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