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39. 출생의 비밀 >
“복구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는데.”
김우진이 혀를 찼다.
고작 손가락 하나 까딱였고 그것을 막아냈을 뿐이지만 일단은 신이다. 신의 권능은 집무실의 모든 것을 소멸시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버러지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겠어.”
베른은 대놓고 단서를 남겼다. 신의 제안이니 당연히 피조물들이 따를 것이라고, 김우진이 알고도 막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약 이루어졌다면 김우진이 그를 막을 당위성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연옥이었고 죄수들은 모두 크던 작든 신에 대한 분노로 점철되어 있다.
잃어버린 자유와 시간만큼 곱씹은 증오가 있는데 개가 되라고 하면 쉽게 받아들이겠나.
신들은 그걸 모른다.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피조물의 감정 따위 보다는 신들의 권위가 더 위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까 신이고 그러니까 쓸모가 다한 용사를 당연하다는 듯이 토사구팽하는 거다.
“그리고 자존심을 한껏 구기고도 굳이 구태여 면담을 계속하겠다고 한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
“강민식입니까?”
“그래.”
강민식은 신들이 만든 비수다. 김우진이 계약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어 더 강한 올가미를 던질 단초였다.
실패했으나 얻어낼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당사자의 증언, 탈옥의 과정과 김우진의 대응, 그리고 감옥의 분위기와 정보들.
“강민식이 자신이 탈옥했었다고 자백하지는 않겠지요?”
“그건 상관없어. 놈들이 더 원치 않을 테니.”
강민식의 탈옥 과정은 명백하게 신들의 힘 덕분이었다. 과정이 완전히 밝혀진다면 자연스래 그들의 개입 또한 밝혀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으니.
“잡히지 않았다면 탈옥수가 발생했다는 것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지.”
강민식이 잡힌 시점에서 그건 물 건너 가버렸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세계수인데.”
죄수들 중 누구도 세계수에 대해 말하지 않을 거다. 그것만큼은 자신한다.
하지만 과연 강민식도 그럴까?
솔직히 말하면 개인면담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놈이 세계수의 존재를 알고 한 행동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그 존재가 까발려지게 생겼다.
“지금이라도 강민식의 면담을 막는 건?”
“강민식을 보려고 왔는데 그걸 막으면 잘도 순순히 돌아가겠다?”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몰라 어젯밤에 강민식한테 협박을 하긴 했는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신에게 모든 것을 말해봤자 너에게도 좋을 건 없을 거라고. 신이 널 지켜줄 거라는 착각 같은 건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건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일단은 기다리는 수밖에.”
당장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
* * *
“뭐지. 대체 뭐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잘못 되도 단단히 잘못됐다.
위대한 신, 베른 오르티안은 연옥에 온 이후 마음대로 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정도의 난항은 예상했으나 이건 도를 넘어섰다.
신이다. 무려 신의 자비다.
더럽고 괴로운 감옥에서 구제하여 신을 모실 영광을 주겠다는 것을 어찌 저 무지몽매한 것들은 거부할까.
스스로의 주제를 알지 못함이다.
하긴, 애초에 신의 위대함을 알고 스스로의 하찮음을 제대로 인지했더라면 연옥에 갇히는 일도 없었을 거다.
죄수들을 집행자로 쓰겠다는 전제부터가 글러먹었다.
베른은 스스로의 실책을 인정했다.
피조물들의 멍청함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그의 실수. 결국 누구 하나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괜찮다.
어차피 집행자는 부가적인 일이다.
하이엘프도.
달의 늑대도.
차원의 장인도 남 주기는 아깝고 집행자로 만들고 싶은 욕망은 있지만 반드시 행해져야 할 일은 아니다.
이 세상에는 저런 무식한 벌레들보다 신의 위대함을 알고, 신을 섬기는 신실한 자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이 감옥에도 그런 존재가 한 명 있다.
신을 모심에 부족함이 없고, 신의 뜻에 따라 순례자를 자처한 자.
비록 실패한 버러지이나 그 의기만큼은 높히 사줄만 하며, 지금은 김우진을 찌를 비수가 되어줄 거다.
“반갑구나, 강민식.”
다리와 눈을 제외한 모든 부분들이 결박된 강민식이 들어왔다.
신을 영접한 그의 눈이 커졌다.
“신실한 종에게 감히 이따위 것들을 덕지덕지 붙여놨구나.”
딱, 그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강민식을 구속하고 있던 모든 제약장치들이 해제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
“가만히 서 있지 말고 앉아라. 내가 누구인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신이십니까?”
“그래.”
“···신이시여.”
강민식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리고 신앙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기꺼웠다.
이거다. 이것야말로 하찮은 피조물이 신께 보여야하는 당연한 경배와 찬양이다.
이 썩어빠진 감옥에도 아직 쓸만한 피조물이 하나는 있구나. 베른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내 너의 노고를 알고 있다. 과업을 수행하다 실패하여 고초를 겪고 있지.”
“···맞습니다.”
“허나, 너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가 왔으니.”
“정말이십니까?”
“의심하지 말라. 나는 네 신이다.”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우선 과업을 수행한 너의 과정과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예.”
강민식은 자신이 탈옥을 위해 했던 일들을, 겪었던 일들을 모두 고했다.
독과 신들이 부여한 관리자의 권한을 이용해 구속구를 해제하고.
죄수들의 신뢰를 얻고 대규모 탈옥 사태로 발전시켰으며.
한 번의 실패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아가 결국에는 연옥을 탈출하기까지.
그리고 다시 붙잡히기까지.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비록 실패했으나 너의 공이 높다. 그러니 내 네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노라.”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 함은···?”
“한 번 더, 탈옥을 시도하거라.”
“···예?”
“왜 놀라느냐.”
“···한 번 더 말씀이십니까?”
“너는 실패자다. 신의 과업을 수행하기에는 그 능력이 부족하지. 많은 신들이 너의 부족함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관대한 내가, 네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는 거다.”
“···불가능합니다. 저는 할 수 없습니다.”
“너의 신이 네게 은총을 내리니, 네게 불가능은 없다.”
“저는 지쳤습니다.”
“허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
“저를 연옥으로 보내신 신께서는 고향을 약속하셨습니다.”
계속되는 거부에 베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힘을 환원한다면, 지금이라도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기회를 이야기했다. 헌데 다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너의 의도가 무엇이냐.”
베른의 눈이 조금 차가워졌다.
“···그저 한 번 더 확인해보고 싶을 뿐입니다. 무사히 탈옥하게 된다면 그 이후의 일을.”
“걱정 말아라. 너는 그 공을 인정받아 집행자가 될 것이다.”
“···고향은?”
“네가 원한다면 돌려보내줄 것이다. 허나, 힘은 환원해야만 할 것이다.”
그제야 강민식은 깨달았다.
애초부터 저들은 그를 순순히 돌려보내줄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 * *
치솟는 분노를 애써 가라앉히고, 강민식은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이번에는 꼭 과업을 완하겠습니다. 집행자가 되어 신을 모실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대함은 신의 덕목 중 하나다.”
흡족한 베른은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받아라, 이것이 부족한 네 능력을 조금이라도 보조해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신의 권능이 깃든 것이니 네가 대놓고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김우진 따위에게 들킬 일은 없을 것이다.”
“예.”
그렇게 베른은 흡족해하며 강민식을 내보냈다. 다음 죄수의 면담이 이어졌다.
강민식은 자신을 다시 독방으로 인도하는 교도관들에게 말했다.
“소장을 만나고 싶다.”
“소장님께서 널 만나 줄 이유가 없다.”
“어젯밤, 소장이 그랬다! 면담은 언제든 받아주겠다고!”
그런 적은 없었으나 소장이라는 존재들은 교도관들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좋다. 소장님께 여쭈어보도록 하지. 하지만 독방에 다시 들어가는 게 우선이다.”
다시 독방에 갇혀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시야가 밝아졌다. 소리가 들려왔다.
강민식이 고개를 들었다. 김우진이 눈앞에 서 있었다.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저놈들은 애초에 나를 순순히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걸 이제야 알았어? 이제와서 나한테 한탄해봤자···.”
“나는 신에게 세계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김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놈은 내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지. 연옥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이전보다 더한 관리자의 권한도. 마음만 먹으면 구속구를 0.1초 만에 풀어버릴 수 있다.”
“그래서?”
“놈은 나에게 연옥 자체를 붕괴시키라고 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일까?”
“연옥에는 핵이 있다면서? 그 핵을 손상시켜서 연옥 자체를 무너트리라고 했다. 관리자의 권한이라면 가능할 거라고 하더군.”
“···이 새끼가 미쳤나.”
연옥은 결국 신들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런 곳을 아예 무너트려 버리자는 건, 궁지에 몰린 쥐새끼가 악바리로 살을 주고 뼈를 취하겠다는 소리였다.
다른 신들과 합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것에 김우진은 자신이 가진 돈 모두와 손모가지를 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널 잡아 족칠 거라고 했다. 다른 신들과 함께.”
“한 번 실패하더니 돌아버렸군. 그래서 네 대답은?”
“지금 너에게 모든 걸 이야기하는 걸 보면 모르겠나? 보아하니 너와 신들은 같은 하늘 아래 못사는 모양인데.”
내가 도와주겠다.
“신을 유인해서 없앨 수 있게 도와주마. 내 조건은 하나다. 나를 힘을 포기하지 않아도 지구로 돌려보내줘.”
처음부터 강민식이 원하던 것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다지 나쁜 제안은 아니군.”
사적인 감정을 때고 본다면 아주 좋은 제안이다. 이중첩자라는 건 그만큼 위험하지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니.
허나, 김우진은 사적인 감정을 때어놓고 생각하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 전에 우리가 정산해야 할 것이 있지 않나?”
“···정산이라고?”
“내가 너 때문에 개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이가 갈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분골착근 좀하고 사지만 부러트릴게.”
“머, 멈춰!”
“너는 내가 멈추라고 할 때 멈췄나?”
“그때는 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네 편할 대로 생각하면 안 돼지. 내가 만만해?”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난 다시 신께···!”
“방금 네가 말한 걸 그 잘난 신에게 다 이야기하고 네가 배신했다고 해야겠군.”
“······!”
“고마워, 별 다른 대안도 없이 미주알고주알 다 불어줘서.”
김우진이 웃었다.
“걱정 마. 다시 붙여주긴 할게.”
이빨 꽉 깨물어라.
뿌득-
* * *
삐-
높게 세워진 울타리는 주변의 모든 것을 차단한다.
앙상한 새장은 릴리의 모든 것을 봉쇄한다.
답답하다. 릴리가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퍼덕였다. 툭, 날개에 얻어 맞은 새장이 휘청였다.
하지만 그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루해.
심심해.
괴로워.
당장이라도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뱃속으로 들어가버린 두 개의 영약이 그 행동을 막았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루. 딱 하루야, 릴리. 힘들겠지만 하루만 얌전히 있어줘.’
더 없이 좋아하는 김우진이 부탁했고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소중한 것. 그리고 김우진은 더 소중한 것. 릴리는 소중한 것들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다.
- 삐이···.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릴리가 물 맞은 지점토처럼 축 늘어졌다.
[아아, 들리니?]
어디선가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담장과 새장 안에는 그녀뿐이었다.
[나는 네 울음소리가 들리는데. 너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니?]
착각이었나, 생각할 때쯤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보다 명확하게.
- 삐삐!
[누구냐고?]
[음, 그러는 너는 누구니.]
장난끼가 다분한 목소리에 릴리가 힘차게 대답했다.
- 삐!
[릴리라. 누가 지어줬는지 예쁜 이름이구나. 율리아, 그 아이가 지어준거니?]
율리아라면 김우진 다음으로 마음에 드는 하이엘프였다. 릴리가 고개를 저었다.
- 삐삐.
[아니라고? 이상하네. 그곳에서 네 이름을 지어줄만한 존재가 율리아 말고 또 있다는 뜻이니?]
- 삐이!
[김우진? 그건 연옥의 소장인데···.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구나.]
- 삐삐삐?
[아, 이런 내 소개도 제대로 안해줬구나.]
[나는 데이드람의 세계수란다. 이름은 딱히 없고. 애초에 세계수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 말이지.]
음, 그리고.
[인간들의 말을 빌리자면, 너의 생물학적 부모가 되겠구나.]
- ···삐이?
[그래, 부모. 그 뜻을 모르지는 않겠지?]
- ······!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릴리가 경악했다.
[반갑구나. 나의 아이야.]
[어찌 되었든, 무사히 싹을 틔운 것을 보니 기쁘구나.]
[예상보다 훨씬 빠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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