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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38화 (38/150)

# < 037. 제안 >

교차 차원에서도 태양은 떠오른다.

따스한 햇빛이 새벽녘의 찬 공기를 덥힌다. 빛을 발하며 어둠을 밀어낸다.

날이 밝았다. 김우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든 채, 마지막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하늘구름은 완성 되었다. 세계수의 나무는 완전히 가려졌고 영약을 세 개나 쥐어준 릴리 또한 새장으로 들어갔다.

연옥에서 세계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세계수의 지척까지 가면 또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옥의 건물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능이다.

“죄수들은?”

“모두 얌전히 독방에 들어가 있습니다.”

“집행자는?”

“말씀하신대로 폐쇄한 3층의 멀쩡한 독방에 가둬 놓았습니다.”

“강민식은 어떻게 하고 있지?”

“얌전합니다. 사실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도, 말도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시야와 청각을 막고, 움직임을 봉쇄한 뒤 입에는 재갈을 물렸다. 그리고 1징벌방에 집어넣었다.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몇 시야?”

“8시 51분입니다.”

9분 남았나.

“좋아.”

김우진이 모자를 썼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관리자는 9시 정각에 오겠다고 전언을 남겼다. 시간은 칼 같이 지키는 놈이니 정확히 올 거다.

“가자.”

1층 로비로 내려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교도관들이 고개를 숙였다. 김우진은 차분히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폈다.

탈옥 사건으로 난장판이 되었던 벽면과 바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했다. 억지를 부리지 않는 이상, 꼬투리 잡힐 건 없다.

“긴장할 것 없다.”

김우진이 긴장한 교도관들을 다독였다.

“관리자가 직접 연옥을 찾는 경우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너무 과민반응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놈이 무슨 지랄을 하든 그걸 받아내는 건 나니까.”

“예!”

교도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1분이 남았다.

“각자 위치로.”

“위치로!”

정문을 중심으로 교도관들이 양 옆으로 섰다. 그 끝에 김우진이 자리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일단은 상부이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한다. 김우진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리고 정확히 50초 후, 문이 열렸다.

끼익-

열 명의 집행자들이 먼저였다. 그들은 자연스레 들어와 교도관들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은은한 푸른 빛 머리카락, 보석과도 같은 황금빛 눈, 새하얀 피부와 조각 같은 얼굴과 비율.

온갖 미사여구가 붙여지지만 김우진은 간단하게 놈을 평했다.

기생오라비 같은 놈.

언제고 저 얼굴을 뭉개버리고 말 거다.

발걸음은 김우진의 앞에서 멈췄다.

“오랜만에 보는군, 연옥의 소장 김우진.”

“그러네, 베른 오르티안.”

베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건방지군. 나는 상급자로서 그대의 감옥을 시찰하러 온 것이다.”

“관리자가 소장의 상급자라는 언급은 어디에도 없는데. 백신전이 상부일 뿐이지.”

“말장난을 하는군. 뭐, 좋다. 하찮은 피조물들이 하는 짓거리가 항상 그렇지. 다만, 이번에도 그게 끝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군.”

베른이 김우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우선 그동안의 연옥 관리에 대한 보고를 듣고 싶은데.”

“집무실로 가지.”

김우진이 베른을 이끌고 집무실로 향했다. 두 명의 집행자들만이 베른의 뒤를 따랐다.

집무실로 가는 내내, 그는 복도 곳곳을 살폈다.

“그래봤자 문제없다.”

“그건 내가 판단할 문제다.”

아무리 그래도 용사였던 드워프들의 솜씨가 워낙 귀신같아서 진짜 없다.

“졸개들은 들어오지 마.”

“밖에서 대기하도록.”

곧 집무실에 도착했다. 베른이 당연하다는 듯이, 상석에 앉았다. 김우진은 픽 웃으며 그 앞에 자리했다.

“어떻게, 커피라도 줄까?”

“그딴 구정물을 들이밀지 마라. 누가 하찮은 피조물 아니랄까봐 입맛도 거지같군.”

“명색이 신이라는 네 주둥이는 걸레를 문 것 같고.”

“언제고 네 건방짐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다.”

김우진이 베른을 무시했다. 짝, 가볍게 박수를 치자 교도관들이 커피와 서류더미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지난 11년간의 운영 보고서다.”

“왜 11년이지? 나머지 9년은?”

“그건 다른 놈이 와서 그때 보고 갔으니까 그놈한테 물어보고.”

“나는 네가 소장으로 부임한 20년 치, 모두를 볼 권리가 있다. 가져와.”

눈이 마주쳤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연옥의 감찰관으로서 나는 분명히 가져오라고 말했다.”

황금빛 동공에 서기가 일렁인다.

톡톡, 김우진이 탁자를 두들겼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가져와.”

“세 번.”

김우진이 손가락을 폈다.

“세 번 말했어, 너.”

“가져와.”

“그래, 그렇게까지 보고 싶다면 봐야지.”

김우진이 교도관을 불렀다. 잠시 후, 또 다른 서류더미들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근데 지구에는 그런 말이 있어.”

“딱히 궁금하지 않군.”

“너무 센 척 하지 마. 더 없어 보이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네놈의 위세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지?”

베른이 미간을 찌푸리며 보고서의 첫 장을 넘겼다.

째깍, 째깍 집무실 한 켠에 놓인 시계의 소리만이 고요한 집무실의 침묵을 깨트렸다.

김우진은 팔짱을 끼고 베른을 지켜보았다.

“의문점이 꽤 많군.”

관리자의 정독은 인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대략 30분. 방대한 보고서를 모두 읽어 내린 베른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정확히 27일 전,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지?”

“그냥 평범한 하루였는데.”

“그날은 연옥의 차원의 장벽이 요동친 날이다. 그런데 평범? 심지어 보고서에는 그것에 대한 단 한 줄의 언급도 없다. 의도적으로 은폐한 것처럼.”

“특별한 일이 아니니까.”

“차원의 장벽에 이상이 생기는 것이 특별하지 않다면 이 세상에 특별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실수로 장벽을 조금 건드렸을 뿐이야. 그런 것까지 적을 필요는 없잖아?”

“믿으라고 하는 소린가?”

“오면서 장벽을 확인해봤을 텐데 서로 피곤하게 이러지 말지.”

세계수는 장벽과 차원에 개입할 수 있다. 허나, 반대로 말하면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는 릴리에게 부탁해 장벽에 닿아있던 마나를 모두 거둔 상태였다.

베른이 탐탁지 않은 눈빛을 보냈으나 표면으로 드러난 문제는 없었다.

“17일 전에는 차원의 장벽이 열렸다.”

“죄수 하나가 고향을 너무 그리워하다 향수병에 걸렸다. 그래서 귀휴 보냈고. 너희들도 죄수가 죽는 건 바라지 않잖아?”

“강민식의 고향이 크라프트는 아닐 텐데.”

베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2의 고향이지. 수십년을 있었으니.”

“강민식은 크라프트에서 황제를 납치하여 문제를 일으켰다.”

“황제랑 원한이라도 있었나 보지.”

“황제를 납치한 수단은 공간전이. 강민식에게는 공간 계열의 능력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도 용사였는데 동료가 한둘이었겠어?”

“그 이후에 장벽은 두 번 더 열렸다. 귀휴라면 한 번으로 족할 텐데?”

“혼자서는 못 돌아오니 직접 데리고 온 거지.”

“고작 귀휴를 나간 죄수를 데리고 오기 위해서, 네놈이 직접 말이지.”

“그래.”

“···적어도 보고서 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군.”

쫘악, 베른이 서류를 찢어버렸다.

“그래서 더 의심이 가고.”

“그거 꽤나 공들여서 쓴 건데.”

“강민식이 탈옥이 아니라 귀휴였다면 지금 당연히 연옥에 있겠지?”

“당연한 소리를.”

“죄수들의 상태를 확인하겠다.”

베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데르카인이 조심스레 배급구를 열었다.

막혔던 소음들이 멀리서부터 들려온다.

“왔군.”

마침내 관리자가 왔다. 데르카인이 어제의 면담을 떠올렸다.

‘나가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어쩔 수 없이 나간다고 했지. 나가고 싶다고는 한 적 없네.’

‘안 나가면 징벌방에 들어가셔야 할 텐데요.’

‘내가 도움이 될 거네. 이번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나?’

‘왜 이렇게 협조적으로 변했습니까?’

‘나는 늙었네.’

‘그 말은 지난번에도 했습니다.’

‘용사로서 너무 오래 살았어. 고향으로 돌아가봐야 내 가족들이 날 알아볼까? 내가 아는 가족들이 살아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가 연옥에 갇힌 시간만 300년이 넘었다.

일반적인 드워프가 태어나고 일생을 마감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의 가족들은 이미 모두 죽었을 거다. 자식의 자식 정도가 남아 있겠지만 만나보지도 못한 손주와 증손주에 대한 애착은 그다지 없다.

‘솔직히 말하겠네. 내게 남은 건 복수심이네.’

잃어버린 300년은 데르카인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모든 것을 잃은 노인에게 남은 것은 증오와 독기뿐이었다.

요구대로 세상을 구했음에도 원수로 갚은 신들에 대한 분노.

‘그건 데르카인님의 선택이 아닙니까. 나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가둬놓고 강요하는 게? 가둔 신들의 잘못이지, 그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은 내 잘못은 아니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잖습니까?’

‘변했으니까. 세계수가 발아하고 난 뒤 자네도, 상황도. 자신하네. 나는 도움이 될 거네.’

‘···그 부분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죠.’

김우진은 확답을 내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뒤로 미루고 고민한다는 것만으로도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신.”

아니, 관리자.

데르카인이 직접 본 관리자는 오직 한 명이다. 스스로를 발로스라고 하던 자.

그는 데르카인에게 용사 제안을 했으며 집행자 제안까지 했다. 그리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데르카인을 연옥에 처박은 당사자였다.

처음에는 그 신이기에 유일한 존재인 줄 알았다.

허나, 여기서 알았다.

관리자는 무수히 많다는 것을.

“백신전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신이 아니라는 증거다.”

전능하고 전지하다면 여럿이 있을 필요가 무엇인가. 소장의 말이 맞다. 그들은 신이 아닌 관리자다.

그저 이 우주를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분에 넘치는 힘과 권능을 얻었고 그것을 이용해 패악질을 부리고 있는 개새끼들이다.

“다른 관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 한 번 보고 싶군.”

훗날 다시 마주쳤을 때, 잊지 않고 면상을 뭉개버리기 위해서.

다른 관리자는 어떤지 궁금해서.

데르카인은 관리자가 부디 4층으로 올라와주기를 바랐다.

* * *

“신···.”

율리아가 초조하게 손톱을 물었다.

용사가 되는 과정에서, 세계를 구하고 난 뒤에 당연히 신을 보았다.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용사로서가 아닌 죄수로서 신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대답해 줄리는 없겠지만 신은 과연 죄수가 된 용사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왜 용사들을 가두는지 궁금했다.

소장과 신들의 관계가 명확히 어떠한지, 그리고 연옥에 보다 본질적인 목적이 없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놈이 연옥의 소장이라고? 그놈들한테 죽은 게 아니라?’

‘목숨을 구걸한 건가? 그럴만한 인간은 아닌데.’

김우진이 어떻게 연옥의 소장이 되었는지도.

“설마 나에 대해 다 말하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의 모습은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아직 완전히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신뢰는 없었다.

아마 김우진도 그녀를 완전히 믿지는 않을 거다.

만약 김우진이 마음을 바꿔 율리아와 알베니우스에 대해서 관리자에게 고한다면···

“···에이, 설마.”

율리아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손톱을 물어뜯는 입놀림은 더욱 격해졌다.

“믿자.”

김우진을 믿는 알베니우스를.

그리고 세계수를 숨긴 김우진의 행동을.

자신의 요구에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김우진을.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끼익-

감옥의 문이 열렸다.

의문도 잠시.

“너로군. 연옥의 하이엘프가.”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났다.

“자비로운 내가, 너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

하지만 율리아는 상대가 누군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집행자가 될 생각이 있느냐?”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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