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35. 시찰 >
“이겼어요! 말씀하신 대로 제 쓸모를 증명했어요.”
황제를 던져주고온 뒤, 지하수로의 입구로 돌아오자 율리아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사진?”
깊은 상처를 입고 죽어버린 집행자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이었다.
“이걸로 찍었어요.”
“카메라?”
“그렇게 부른다고 하더라고요. 소장님 차원에서는 흔하다면서요?”
“강민식이 준 건가?”
“이걸로 연옥의 구석구석을 찍어달라면서 줬어요. 근데 다시 달라는 말은 안해서 제가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탈옥에 협조했다고?”
“죄수들간의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조금 호의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었죠.”
“요약하자면 ‘탈옥을 도왔다.’가 되는데 그걸 소장한테 직접 말해?”
혹시 바본가?
“지나간 과거는 잊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요. 어차피 알고 계시고 지금은 저희가 손을 잡았잖아요?”
아하, 그냥 뻔뻔한거군.
사실 그녀의 말대로 알고 있는 일이었다. 사진에 조금 더 집중했다.
집행자의 표정이나 상처로 보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때는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나?’
집행자가 될 정도의 용사라면 모든 용사들을 줄 세워도 앞쪽에 있을 텐데 율리아에게는 작은 상처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괜찮은 거예요?”
“뭐가.”
“쪽지에 이름을 남기셨다면서요. 그건 너무 명확한 증거 아니에요?”
“상관없어.”
가장 좋은 건 강민식이 애초에 크라프트에 왔었다는 증거 자체를 남기지 않는 거다.
하지만 놈이 황궁으로 기어들어가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황제를 건드리고 수많은 목격자가 생겨난 이상,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아예 방향을 바꿨다.
“강민식은 귀휴를 나온 거야. 나와서 옛 동료인 황제를 만나고 조금 이야기를 나눈 거지. 근데 황제가 나약해서 공간 이동의 여파를 견디지 못하고 기절한 거지.”
그래, 그게 이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니 쪽지에 이름 남기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강민식의 이름을 남겨야 다른 곳으로 의심의 화살이 날아들 여지가 줄어든다.
제 3의 인물이 존재하고 그게 김우진이라는 씨앗이 싹트면 더욱 곤란해지니까.
“그게 아무 문제가 없을까요?”
“없어. 적어도 나한테는.”
어차피 김우진은 다시 연옥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크라프트에는 굳이 다시 올 일이 없겠지.
만약에, 아주 만약에 강민식이 다시 크라프트로 돌아온다고 해도 그건 그가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억울하다면, 애초에 탈옥을 안 했어야 했다.
“일단 여기서 볼 일은 다 끝났군.”
김우진이 다시금 거대하진 덕구의 등 위에 두 개의 짐짝을 실었다. 다이안의 침중한 눈빛으로 강민식을 흘겼다.
“용사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당신이 모시는 분이 답해줄 겁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없군요.”
“···예.”
“덕분에 쉽게 강민식을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다이안이 떠나갔다.
“그럼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일단은.”
“아직 남았어요?”
“네가 할 일은 아니고.”
강민식을 잡는 건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전제 조건이다.
놈이 있어야, 놈을 보여줘야지만 탈옥을 막지 못했다는 오욕을 벗을 수 있으니까.
“일단은 가자.”
이제 당면한 과제는 놈들의 방문이다.
강민식이 잡혔다는 것을, 다시 연옥으로 연행되었다는 것을 곧 알게 될 텐데 그대로 강행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만약 강행한다면 아직 문제가 하나 남아있다.
‘세계수.’
데르카인에게 맡겨놓고 왔지만 솔직히 2주안에 관리자들을 속일만한 아티팩트를 만들라는 게 얼마나 무리한 요구인지는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계수를 포기할 수는 없다. 세계수는 그에게는 아주 큰 힘이, 저들에게는 비수가 되어줄 테니.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상황부터 파악하고.’
쩌적-
공간이 갈라졌다. 차원의 입구가 열렸다.
균열은 두 명의 인간, 한 명의 하이엘프, 한 명의 집행자, 한 마리의 마수를 삼킨 뒤에 닫혔다.
아무 것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설마 한 명을 더 잡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둘 다 독방에 넣어. 이놈도 죄수야.”
연옥의 정문, 김우진은 자신을 반기는 부소장에게 축 늘어진 집행자와 강민식을 내밀었다. 교도관들이 인계 받았다.
“집행자 아닙니까?”
“집행자가 뭐지?”
“용사죠.”
“힘을 포기했나?”
“아닙니다.”
“그럼 죄수지.”
“···아?”
기적의 논리에 부소장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꽤나 많이 바뀌었군.”
“세계수는 의도하신 자리에 제대로 안착했습니다. 드워프들의 솜씨는 여전히 명불허전이고 말입니다.”
크라프트에서 보낸 시간은 대략 일주일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처음 예상한 2주에 비하면 절반에 불과하다.
예상보다 훨씬 짧은 여정이었기에 김우진은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허나 그 일주일의 시간 동안, 연옥은 꽤나 바뀌어 있었다. 연옥 전체를 휘감고 있던 세계수의 뿌리와 가지가 사라지고 부서진 부분들이 복구되었다.
적어도 외형만큼은 세계수를 심기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여기까지는 문제가 있다고 못하겠어.”
“내부도 3층을 제외하면 깔끔합니다.”
하지만 3층은 예외였다. 연옥의 시스템을 만든 건 관리자들이었고 그들의 도움이 아니면 부서진 시스템은 복구할 수 없으니까.
드워프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권능에 가까운 시스템을 고치는 것은 별개였다.
“3층은 폐쇄시키고 여차하면 대청소 중이라고 둘러대.”
“통하겠습니까?”
“통하든 말든, 내가 안 보여주겠다는데 어쩔 거야.”
죄수들도 다 그대로 있고 3층을 제외하면 어떠한 문제도 없으니 꼬투리 잡힐 것은 없다.
“기껏 해야 크라프트의 일을 문제 삼겠지.”
애초에 저들이 설계하여 실행한 판이다. 집행자까지 보낸 시점에서 모르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강민식을 무사히 잡은 시점에서 모든 문제는 종식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있다고 한들, 없게 만들 수 있다.
“별 다른 일은?”
“없습니다. 저들도 멍청이가 아닌 이상에야 두 번은 못합니다.”
“깨어나긴 했나?”
“예, 죄수들은 모두 깨어났습니다.”
“구속구는?”
“여분으로 일단 채워놨습니다만, 강민식은 어떻게 합니까?”
“처음 호송관들에게 인계 받았을 때의 상태 그대로, 있는 것 다 채워.”
손과 발이 묶이고, 시야가 가려지고, 귀가 막히고, 입이 봉해진 다음에도 탈옥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건 강민식의 능력이 아니다. 관리자들이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명백한 증거지.
“세계수는 어때?”
“특이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드워프들의 요구에 엘프들이 합류했습니다.”
“엘프들의 마나 운용은 확실히 뛰어나지. 그런데 순순히 협조하던가?”
“예.”
부소장의 시선이 율리아에게 향했다. 김우진은 어떻게 된 내막인지 대충 이해했다.
“직접 가서 확인해 보지.”
“저도!”
얌전히 있던 율리아가 번쩍, 손을 들었다.
“저도 보고 싶어요! 어머니 나무!”
간절한 눈빛에 김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른다. 수고에는 대가가 따른다.
율리아는 강민식을 잡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고 스스로의 무력 또한 증명해냈다. 세계수를 조금 보게 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제는 하이엘프 좀 만난다고 릴리가 홀딱 넘어갈 것 같지도 않고.’
씨앗을 통한 간섭과 몇 달 동안 쌓아온 친근감으로 인해 그럴 시기는 지났다.
율리아가 반색했다. 그녀의 목에 친히 구속구를 채워주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상관없어요!”
“소장님, 세계수 쪽에 특이 사항이 하나···.”
“가서 확인해볼게.”
기절한 강민식과 집행자를 부소장에게 넘긴 후, 율리아와 함께 정원 북쪽으로 향했다.
“···담장 같네요?”
세계수가 있어야 하는 장소에는 거대한 담장이 있었다. 고개를 90도 각도로 올려다봐야 하는, 딱 적당히 자란 세계수 정도의 높이의.
보다 가까이 다가가자 땅땅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자잘한 마나의 파동들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담장의 겉에는 온갖 술식들이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채워지고 있었다.
드워프들이 망치와 정을 들고 각인을 새기고 엘프들이 마나 회로를 덧붙여 활성화시킨다.
“···구속구까지 풀고 있네요?”
“아티팩트를 만드는데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런 게 어딨어요. 저도 아티팩트 만들래요.”
“방금까지 풀어줬잖아?”
“지금은 다시 착용하고 있잖아요. 모르시나본데 이게 얼마나 성가시고 불편하지 아세요?”
“알아야 하나?”
“이익···!”
“왔구나, 소장.”
둘의 말다툼을 들었는지 외곽 쪽의 술식을 보조하던 시에나가 다가왔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언제부터 합류했습니까?”
“드워프들이 만들기 시작한 날이니까 나흘 정도 됐구나.”
“성과는 있는 겁니까?”
“네가 요구한 게 어머니 나무의 기운을 완벽하게 감추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일단 설계도대로 완성만 된다면 완벽할 것 같구나.”
데르카인이 설계를 비롯해 제작을 총괄했다면, 시에나는 마나를 다루는 쪽을 총괄했다.
그녀는 벽면 전체에 새겨진 술식들을 파악했고, 확인했다. 그리고 그 효웅이 확실히 뛰어다는 것을 알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어린 세계수를 감추기에는 확실하다는 거군요. 어린의 범주가 어디까지 입니까?”
“천 년이요.”
율리아가 대답했다.
“보통 천 년이 넘어가면 성체로 여겨요.”
“그럼 릴리는 몇 년이라고 봐야 하지?”
“음, 한 500년 쯤?”
“영약 조금 먹였다고 500년을 단축시켰다고?”
“영약 조금이 아니죠. 그리고 단순히 그것뿐이라기에는 무언가 더 있고요.”
“뭐지?”
“···정확히는 몰라요. 그냥 짐작할 뿐이죠. 소장님의 간섭이 무언가 영향을 끼쳤을 거라는.”
“흐음.”
씨앗에 간섭하기 위해 막대한 마나와 권능을 퍼붓기는 했다. 그게 이렇게 영향을 준 걸까.
어쨌든 악영향은 아니니 나쁘지 않았다.
“완성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아니라 저 드워프한테 물어봐야지. 그리고 문제가 또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문제요?”
“직접 가봐.”
그때였다.
삐이이이이!
자그마한 파랑이 하나가 김우진의 품속으로 다이빙했다.
퍽, 제법 묵직한 느낌과 함께 릴리의 성난 울부짖음이 들렸다.
삐이이!
삐! 삐삐!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소리들에 김우진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릴리, 오랜만이야. 잘 있었···화가 난다고?”
삐삐삐!
“저것들이 짜증난다고?”
릴리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삐이이이이! 삐이이!
하지만 이건 모르겠다. 너무 열이 받아 말이 헛 나오는 것 같았다.
“난쟁이랑 귀쟁이가 자기를 감옥에 가두려고 한데요. 아니, 잠깐만. ···난쟁이랑 귀쟁이요? 아니, 어머니 나무님. 그런 못된 말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삐이이이이!
“귀쟁이 대장이라뇨! 일주일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입이 왜 이렇게 험해지셨어요?”
삐삐!
“자유 만세? 갑자기 무슨 자유에요?”
“···살다보니 이런 장면도 다 보네.”
세계수와 하이엘프의 말다툼이라니.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왜 저런 겁니까?”
“데르카인한테 가면 다 알 수 있을 거야.”
김우진이 망치와 정으로 벽면에 마법진과 술식을 새기는 데르카인에게 다가갔다.
“···왔나?”
데르카인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어떻게, 일주일 안에 되겠습니까?”
“엘프들 덕분에 가능은 할 것 같네.”
일반적인 엘프와 드워프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차원의 최강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일찍 온 걸 보면 뜻하는 바를 이룬 모양이군.”
“기절시킨 채 감옥에 넣어놨습니다.”
“다행이군.”
데르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하지만 자네가 요구한 사항 중에 미적 요소는 없었네.”
“상관없습니다. 디자인보다는 성능이 중요하니까요.”
“말이 통하는군. 엘프들은 내게 미적 감각이 없다고 난리를 치던데.”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면 고려할만 하지만 당장은 아닙니다.”
“내 말이 그 말이네.”
“그런데 릴리는 왜 저런 겁니까?”
“이걸 보면 알 걸세.”
데르카인이 품속에서 설계도를 꺼냈다.
“조심해서 보게. 저 망할 나무 정령한테 들키면 찢기니까.”
“망할 나무 정령?”
설계도를 훑은 김우진은 곧 그 의미를 파악했다.
“이 울타리가 전부가 아니군요. 새장?”
“나무도, 정령도 모두 본체네. 완벽하게 감추려면 둘 다 숨겨야지. 나무 정령이 발광하는 이유네.”
아, 그래서 자유 만세를 외친 거였나. 왜 잠깐 못본 사이에 릴리가 험악해졌는지 알겠다.
“괜찮겠나? 만들긴 하겠다만 나는 나무 정령을 새장에 가둘 수 없네.”
“걱정마세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기껏 쌓아놓은 호감이 뚝뚝 떨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건 편의를 봐주는 게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데르카인님은 그저 일주일 안에 완성만 해주시면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 말씀해주세요.”
“그러지.”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소장님.”
평화로운 오후. 부소장이 김우진에게 전서 하나를 전달했다.
슥, 훑어본 김우진이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무슨 내용입니까?”
“예상한 그대로의 내용.”
“그 말씀은···.”
“내일 잘 나신 관리자께서 한 분 감옥을 시찰하러 오신다네.”
올 게 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