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32. 집행자 >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환상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에 대한 선망일수도, 유토피아에 대한 망상일수도, 서로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다.
엘프들에게는 그 대상이 보다 명확하고 공통된다.
세계수, 어머니 나무.
율리아의 본래 세상, 아르반의 세계수는 환상 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고고하고 고귀하며 푸근하고 자애롭다.
언제나 엘프들을 보살피며 세계 안정에 기여했다.
두 번째인 데이드람의 세계수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드람의 세계수는 살아온 세월이 비례해 아르반의 세계수보다 훨씬 크고 강대한 마나를 품고 있었다.
보다 장난스럽고, 신들을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긴 했지만 세상을 향한 자애는 그대로였다.
헌데 크라프트는 달랐다. 짧은 만남이었기에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었다.
김우진의 설명은 거기에 쐐기를 박았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자.’
율리아가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모든 인간은 같지 않다. 모든 엘프도 같지 않다. 당연히 세계수 또한 개개인의 차이가 있는 거다.
결국 이유야 어찌 되었든 세계를 구했다는 대의는 모두 같았다.
‘그보다는.’
그녀의 시선이 김우진을 쫓았다.
묻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는 모든 걸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감질나게, 그녀를 시험하듯 하나씩, 하나씩 툭툭 건네준다.
일종의 거래다. 그녀가 먼저 풀면, 김우진도 하나 푸는 식으로.
‘모든 걸 다 말해도 될까?’
연옥에 들어와서 겪어본 바로는 그렇게까지 나쁜 인간은 아니었다.
신들이 김우진을 대하는 방식이나, 김우진의 신들에 대한 적개심을 보면 신들의 개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알베니우스의 걱정도 기우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직···.’
확답을 받지는 못했다. 손을 잡았으나 진정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협력을 해줄 것인지, 말 것인지.
김우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다.
“그분께서는 저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강 주변의 새싹을 보듬던 다이안의 말에 생각이 끊어졌다.
“강으로 뛰어들었다는 겁니까?”
“그 뒤입니다.”
“지하수로네요.”
드와인에서 시작된 추격은 팔라이크까지 이어졌다.
대로의 작은 새싹들부터 제국 마탑의 분점 화분에서 기르는 식물들까지.
식물들은 강민식과 늘어난 일행의 행적으로 그대로 알려주었다. 가히 사기적인 능력이었으나 그래서 하이엘프가 특별한 것이다.
“확실히 숨기에는 더없이 적합하겠군요. 사람들도 거의 오지 않을 테고.”
“예.”
입구 근처에서도 악취가 조금씩 느껴진다. 입구가 그럴 진데 그 심처는 어떠할까. 제법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멍!
그때 덕구가 율리아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꼬리를 흔들며 김우진을 향해 짖었다. 냄새가 느껴진다는 신호다.
“여기 있는 게 확실하군.”
그렇다면 지체할 이유가 없다.
“덕구야, 앞장서.”
멍!
덕구가 내달렸다. 만약에 대비해 입구에 다이안을 남겨둔 김우진과 율리아가 그 뒤를 따랐다.
지하수로의 내부는 무척이나 컸다. 천장은 약 5m, 가로는 약 20m 정도. 양쪽으로 길이 나 있고 중앙으로는 물이 흐른다. 또한 복잡한 미로와 같았으나 단 1초도 멈출 필요가 없었다.
덕구의 후각은 권능에 가깝다. 어떤 악취가 있더라도, 아무리 멀어도 원하는 냄새를 포착해내고야 만다.
덕구가 가는 길이 놈을 향한 가장 빠른 길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일거다.
벌컥-
“뭐하냐, 쥐새끼들아?”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놈들이 미처 도망가지 못한 것은.
당황하는 강민식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섯 명의 집행자. 그리고 기절한 다크엘프 하나.
그 단편의 모습은 김우진이 모든 상황을 납득하기에 충분했다.
* * *
“···김우진!”
강민식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집행자들이 등장할 때만 해도 안심이 되었다.
신이 날 버리지 않았구나. 이제 살았구나. 믿었다.
허나 김우진이 나타난 순간, 그 믿음은 플라스틱처럼 부러졌다.
집행자들은 강하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김우진이 그에게 남긴 전율은 그 이상이었다. 16명의 용사들을 짓밟고 와 일곱 용사들의 합공마저 가뿐히 짓이겼다.
집행자들 또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의심하지 마라. 알도.”
“예.”
“강민식을 데리고 가라. 절대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숨고 도망쳐라. 고작 며칠이다.”
“예.”
알도라는 집행자가 강민식의 손을 붙잡았다. 공간이동을 위한 마나가 움직였다.
파직, 마나의 간섭이 마법을 뒤틀었지만 집행자들이 끊어냈다.
“연옥의 소장 김우진, 너는 우리가 상대해주마.”
“비켜.”
“네 위명은 꽤나 들어왔다. 네가···.”
티딕, 화염이 일렁였다. 김우진의 곁에서부터 시작한 전이는 곧장 은신처 내부 전체로 연쇄작용을 일으키며 뒤덮었다.
거대한 폭발이 은신처를 통으로 날려버렸다.
허나 그 화염이 거친 자리에 남은 것은 고작 넷이었다.
용사와 영웅, 그리고 집행자 하나가 혼란 속에서도 기어이 사라졌다.
“공간의 권능을 가진 놈인가.”
“맞다. 넌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거다.”
다섯 집행자들의 수장, 베오르가 손에 묻은 잔불을 털어내며 대답했다.
“그건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말이 끝나는 그 순간, 베오르가 본능적으로 창을 들어올렸다. 쩌엉, 불꽃의 검이 그의 코앞에서 멈췄다.
이글거리는 화염의 열기가 뜨거웠다.
김우진의 이름은 지겹도록 들었다. 솔직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한 번의 부딪힘만으로 실감했다.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베오르는 집행자였다.
“인정하마. 혼자서는 널 이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다.”
만약을 위해서 알도와 강민식을 보냈으나 아직 셋의 집행자들이 남았다. 넷의 집행자라면 충분히 해볼 만하다.
아니, 해볼 만하지 않아도 해야만 한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완수하라는 신명이 있었다 한들, 진짜 무의미하게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집행자들 또한 기세를 드러냈다.
허나, 김우진은 웃었다.
“얼마 전에도 그렇게 말한 놈들이 있었지.”
힘겨루기가 끝났다. 카가각, 불의 검이 미끄러지듯 창대를 타고 올라갔다. 밀고 들어오는 검격을 간신히 쳐냈으나 검은 눈속임에 불과했다.
전후좌우상하. 모든 곳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너무도 쉽게 그의 마나를 뚫고 들어왔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놈이 웃는다.
“미친···!”
베오르가 욕설을 내뱉었다. 육신이 단단해진다. 온갖 마법에, 열기에도 높은 저항력을 갖는다. 그의 권능, 철인이다.
콰앙, 강렬한 폭발, 격통에 육신이 출렁이나 버텨낸다.
철인으로 한층 강해진 힘이 창을 휘두른다. 김우진의 검을 붙잡고 늘어진다.
그 사이, 그의 의도를 눈치 챈 집행자들이 움직인다.
화살이 가장 먼저 포문을 연다. 수십 미터 지하의 어두운 통로에 강렬한 폭풍이 불어온다.
그 뒤로 검이 따른다. 모든 것을 베어내는 거대한 오러 블레이드가 어둠을 밝히며 전진한다.
거대화된 권능의 주먹이 연달아 떨어진다.
아무리 김우진이라고 할지라도 저것들 앞에서 초연할 수는 없을 터. 일격을 맞고 주춤하는 사이 그의 창이 다시 한 번 급소를 노릴 것이다.
분명히 그래야만 할진데.
“···맙소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열기가 느껴진다. 세상을 붉게 물들인 불의 장벽이 그와 김우진의 사이를 갈라놓는다.
불길은 바람을 삼키며 화살을 불태운다.
오러를 녹이고 주먹을 먹어 치운다.
그 어떠한 것의 범접도 용인하지 않으니.
진짜 철벽이었다.
“내가 지금 너희랑 놀아줄 여유가 없어.”
벽의 불길이 번져나간다. 불의 칼날이 뒤섞인다. 집행자를 노린다.
크아아악!
오러를, 활을, 검을, 주먹을. 모든 무기를 불태우고 베어 버린다.
끄아아악!
크악!
비명 하나에 집행자 하나가 쓰러진다.
“···말도 안 돼.”
베오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동료들의 몸이 불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몸이 덜덜 떨렸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증거를 남기지 말라는 신의 명령은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것. 회로를 폭주시킬 필요도 없었다. 열화는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있으니.
“···하하.”
이딴 게 위안이라고?
베오르가 입술을 깨물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흐으, 집행자 셋을 순식간에 처리한 김우진이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베오르에게 향했다.
“마지막은 네 몫이다.”
아니었다. 그가 아닌 엘프에 닿아 있었다.
“···저요?”
“나는 능력이 부족한 자를 협력자로 여기지 않아.”
약해빠진 자는 오히려 짐이 된다.
“제가 그래도 용사거든요?”
“데이드람을 구하고 다시 관리자와 만났을 때, 너는 세 가지 제안을 받았을 거다.”
일반적인 제안은 두 가지다. 힘을 포기할 것이냐, 그렇지 않을 것이냐.
하지만 아주 간혹, 특별한 세 번째 제안을 받는 자들이 존재한다.
[신을 섬길 생각이 있느냐.]
용사들 중에서도 극소수. 선택받은 용사들 중에서도 다시 또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떨어지는 제안.
그들의 강함이, 그들의 특출함이 그냥 보내버리기에는 아까워 수족으로 부리고자 하는 마음.
위대한 하이엘프라면 능히 세 번째 제안이 날아왔을 거다.
“그랬어요. 하지만 거절했죠.”
“저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받아들였지.”
“···그 말은?”
“저들은 용사‘였’다.”
거기서 고개를 끄덕인 이들은 새 삶을 산다.
“허나, 지금은 집행자라 불린다.”
신들의 수족, 집행자로서.
“···몰랐어요.”
“너와 내가 바라는 그 목표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가장 밑에서부터 마주할 적.”
그러니 증명해라.
“네가 쓸모 있음을.”
“···못할 것도 없죠. 고작 하나인데.”
율리아가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래, 그럼 잘해봐. 이따 보자.”
“네. 이따···네? 뭐라고요?”
잘못 들었나? 율리아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말했잖아. 시간이 없다고. 도망친 놈을 찾는 게 우선이다. 공간 이동 마법이 발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면···.”
김우진이 집행자와 강민식이 사라진 자리에 섰다. 마나를 더듬으며 공간에 손을 박아 넣고 찢었다.
“···어?”
“······!”
균열이 벌어졌다.
“추적할 수가 있거든. 이놈 죽이고 밖에서 기다리는 다이안과 함께 날 기다려.”
그 말을 끝으로 김우진이 사라졌다.
“······.”
“······.”
대부분 녹아내린 지하수로 안.
“···아니, 나도 일단은 죄수인데.”
한 명의 집행자와 하이엘프가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 * *
···신뢰 받는 건가?
죄수가 아닌 협력자로서. 그래서 그냥 내버려 두고 간 건가?
아니, 아니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을 가지기에는 아직 이르다.
몇 달 동안 김우진을 지켜봐온 감으로 짐작해 보자면 별다른 이유가 아니다.
자신감이다. 어디로 도망쳐도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니 이건 신뢰가 아니라 시험이다.
“그런데 저 능력은 또 뭐래.”
화염을 다루는 것이 끝이 아니었나.
공간을 찢어 추적하는 건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힘인데.
놀랐지만 그 놀라움은 눈앞의 집행자보다 크지는 않을 거다. 율리아의 시선이 멍하니 서 있는 집행자에게 닿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율리아 카르센이라고 해요. 용사였고 지금은 죄수에요.”
꾸벅, 인사를 했다. 멍한 시선이 그녀에게 온다.
“그런데 그렇게 가만히 있을 여유가 있어요? 왠지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쁜데요.”
“···그래, 그렇지.”
집행자의 눈에서 빛이 돌아왔다.
“나에게는 신께서 주신 사명이 있다. 예상 밖의 일이지만 사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창끝이 적을 향해 겨눠진다.
“김우진의 개, 너를 죽이고 김우진의 뒤를 쫓겠다.”
“개라는 말은 저보다는 당신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자칭 신들의 충성스러운 개새끼잖아요.”
“···엘프 아니, 하이엘프가 제법 더러운 입을 가지고 있구나.”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는 차리지 않는 편이에요.”
특히, 저는 신들을, 그 개들을 싫어하거든요.
“같잖구나. 신들이 아니었다면 네가 용사가 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이 세상이 온전할 것 같으냐?”
드드드-
“나 또한 용사였다. 따지고 보면 네 선배지. 네가 태어나기도 이전부터 나는 용사로서 세상을 구하고 위대한 신의 선택을 받았다.”
“우와, 그거 정말 대단하세요.”
짝짝짝, 영혼 없는 박수소리가 울렸다.
“선배 대접을 받고 싶으신 건가요? 해주면 목 내밀어주실 건가요?”
“건방지구나.”
창이 공간을 꿰뚫었다. 카앙, 율리아의 검이 그 진로를 가로 막았다. 튕겨져 나간 창은 어느새 주인의 손으로 돌아가 있었다.
허나.
“아니죠.”
“······!”
손은 주인에게 붙어 있지 않았다.
팍, 붉은 피가 튀었다. 잘려나간 손목이 창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건방진 건 선배죠. 예의도 없고요. 대화 도중에 기습이라니.”
율리아가 태연히 웃었다. 그녀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베오르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거대한 의문이 밀려드는 격통을 압도했다. 대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나 대답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약하시네요. 집행자라고 해서 그래도 나름 긴장했는데.”
율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죠. 제가 강한 거겠죠?”
역시, 그녀가 중얼거렸다.
“맞아요. 제가 약할 리가 없죠. 소장님과 함께 있다 보니까 제가 너무 약자가 된 것 같다니까요.”
소장이 압도적인 무력 앞에 서는 그녀 또한 작아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 베오르에게는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속력이 소장에게는 그저 조금 빠를 뿐이라고 인식된다.
“그리고 솔직히 처음에 보여준 모습은 너무 실망스럽긴 했어요. 오랫동안 구속구를 차고 있다가 아주 잠깐 푼 거라서, 다른 제약이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힘이 온전하지 않았거든요.”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라뇨. 물음에 대한 대답이잖아요.”
푹, 차가운 금속이 베오르의 폐부를 찔렀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는 권능, 철인은 너무도 쉽게 박살났다.
“당신이 나보다 약하다고요. 그래서 보지 못했을 뿐이고.”
“이 개···!”
베오르의 신형이 허물어졌다.
율리아가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마나를 이용해 흔적을 지웠다.
“위로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려나?”
지난 몇 달의 시간동안 율리아는 어째서 알베니우스가 소장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의 곁에 달라붙어 있으라고 한 건지 여실히 깨달았다.
당장 그녀가 있어야 할 곳은, 소장 김우진의 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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