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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31화 (31/150)

# < 030. 세계수와 관리자 >

“돌아왔다는 용사가 혹시 강민식인가요?”

세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맞단다. 그 아이는 이 차원을 구한 영웅이지.

- 그 아이가 왜 다시 돌아왔는지는 몰라도, 나는 그 기운을 기억하고 있단다.

- 그래서 궁금하구나. 그 아이가 왜 돌아왔는지도, 너희들이 왜 그 아이를 찾는 지도.

율리아가 힐끔, 김우진의 눈치를 살폈다.

세계수의 말투에서부터 강민식에 대한 호의가 물씬 풍겨졌다.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요?’

‘이제부터는 입 닫고 있어라.’

김우진이 성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데리러 왔다.”

- 데리러 왔다니. 그게 무슨 뜻이니?

“말 그대로야. 우린 강민식을 데리러 왔어.”

- 이유는?

- 네 태도와 말투에서 보건데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은 것 같은데?

세계수의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굳이 알려줘야 하나?”

- 당연히.

- 다시 말하마. 그 아이는 이 차원의 영웅이란다.

-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내가 납득할만한 이유가 아니라면.

- 결코 그 아이를 데려갈 수 없음이야.

- 분명히 말하려무나. 데리러 온 것이니, 잡으러 온 것이니?

“음, 그게 아니라요···.”

“입 닫고 있으라니까?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 헛소리 하지 마라, 세계수.”

김우진이 애써 변명을 하려는 율리아를 밀어냈다. 헛소리라는 말에 그녀의 입이 벌어졌다.

“이건 저 위의 집행이다. 만 년을 살아왔다면, 강민식의 신변 권한이 이미 넘어갔음을 알고 있을 텐데?”

순록이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높이가 맞춰졌다. 새하얀 백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 ···짐작은 했단다. 너 같은 인간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가 없지.

- 열쇠를 가지고 차원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 헌데, 그 아이도 열쇠를 들고 있었는데 말이지.

“신경 꺼라. 이건 네 영역 밖의 일이다.”

- 역시 너는 집행자겠구나.

“일단은 그렇다고 해두지.”

- 불쌍한 아이. 어쩌다 집행자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을꼬.

“위선 떨지 마라. 그 녀석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 순순히 보내지 않았나?”

- 집행자들은 전부 딱딱하고 농담도 안 통하니 재미가 없구나.

순록의 눈매가 초승달을 그리며 휘어졌다.

- 어떻게. 도움이 필요하니?

- 그 아이를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을 텐데.

- 하지만 어떡한다. 내 도움은 조금 비싼데.

- 너도 알다시피 우리는 신들과 계약 관계일 뿐이라 네게 협조할 의무는 없단다.

가식을 치워버린 세계수의 말투는 한층 경박해졌다.

커진 율리아의 동공과 벌어진 입은 다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식물들과 무난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면 족해. 헌데 말하는 걸 보니 공짜는 아니겠군. 뭘 원하지?”

하이엘프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권능 중 하나이나 그것 또한 세계수의 용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의 뿌리가 어디까지 뻗어있을 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범위는 한 대륙을 가뿐히 뛰어넘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이 대륙 위에서 세계수의 영향을 받지 않는 식물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세계의 존재와의 대화 정도는 얼마든지 차단할 수 있었다.

- 되었단다.

- 그 정도쯤은 그냥 도와주마.

“갑자기?”

- 말했다시피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보는 지라.

- 나는 수많은 집행자들을 봐왔단다. 헌데 넌 확실히 다르구나. 단순한 집행자가 아니야. 너는 더 높이 올라가겠구나.

“투자라도 하겠다는 건가?”

- 투자라는 걸 인간들만 할 이유는 없지 않니.

무슨 생각일까. 김우진이 세계수를 뻔히 쳐다보았지만 순록의 표정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솔직히, 그냥 용인해주겠다면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계수라는 존재들은 그리 믿음직스러운 자들은 아니었다.

‘세계수는 용사들의 중요한 조력자지. 허나, 그건 상하 관계가 아니다. 이득이 되니까 돕는 것에 불과해.’

세계수는 신의 선택을 받아 소환된 용사를 도와주는 중요한 조력자 중 하나다. 아이템을 주거나, 동료를 쥐어주거나, 축복을 내리거나, 예언을 내려 용사를 돕는다.

모든 세계수가 용사를 돕는 것은 아니지만 대다수가 그렇다.

그건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 또한 순수한 호의가 아니다.

“그 정도는 고맙게 받지.”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세계수의 도움이 없다면 이주일만에 강민식을 찾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미지수에 가까우니까.

무엇보다 크라프트는 수많은 차원들 중 하나일 뿐이다.

강민식만 잡게 되면 다시 올 일도 없는 차원의 세계수에게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다.

- 호의를 거절하지 않아주니 기쁘구나.

-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도와주마.

- 나가면 나의 아이가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란다.

- 그의 인도를 받거라.

순록이 모습을 감췄다.

* * *

“···어머니 나무께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지 마. 세계수는 상부와 협력 관계야. 알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만···.”

“세계수 입장에서는 어지러운 차원을 안정시킬 수 있으니 좋고, 상부는 세계수를 통해 보다 원활히 용사들을 이용해 먹을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지.”

“제가 말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요.”

“저 세계수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커.”

“네?”

“만 년을 살아온 세계수의 뿌리는 조금이지만 세계의 법칙과 기억이라는 아카식 레코드에까지 닿거든.”

아카식 레코드에 뿌리가 닿은 세계수는 보다 우주의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것까진 몰랐어요. 그래서 만 년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린 거예요?”

“만 년 이전이라면 적당히 속이면서 이용해먹을 수 있지만 만년이 넘었다면 보다 그 이면을 알고 있을 테니까. 대화해보니 알겠어. 연옥의 존재를 알고 있고 강민식이 탈옥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어.”

결코 크라프트로 돌아올 일이 없는 강민식이 돌아왔고 집행자가 등장했다는 것은 그 가능성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 크라프트의 어머니 나무께서 신들에게 모든 것을 말하면 큰일 나는 거 아니에요?”

“말했잖아. 세계수는 협력 관계지, 상하 관계가 아니라고.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조금 귀찮긴 하겠지만 제대로 강민식을 잡아 연옥으로 데리고 간다면 큰 문제까지는 없어.”

“어째서요? 집행자를 사칭하고 강민식이 탈옥했었다는 것을 알렸잖아요.”

“내가 언제?”

“네?”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집행자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

“제가 들었는데요?”

“일단은 그렇다고 해둔다고 했지. 그렇다고는 안 했어. 나는 그냥 휴가 중에 우연히 세계수가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거 눈 가리고 아옹이잖아요.”

“이 탈옥 자체가 상부의 눈 가리고 아옹이다.”

“그러면 강민식을 잡으러 왔다고 말한 건요?”

“잡으러 왔다고? 내가? 데리러 온 거겠지.”

“말이 안 되잖아요. 무엇에서부터?”

“너무 적응을 못해서 적당히 휴가를 보내줬다, 정도로 해주면 돼. 구속구는 계속 채워두고 있었다고 하고.”

진짜 채워두었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결국 이번 일은 이주일 안에 김우진이 강민식을 잡느냐, 못 잡느냐로 판가름이 날 테니.

“···사기꾼.”

“사기꾼은 너지.”

“제가 왜요?”

“소지가 되고 싶어서 세계수의 씨앗을 넘긴다고 했던가.”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애초에 속지도 않았지만 네 정체를 조금이나마 알고 나니 더 이상해. 널 사주한 게 알베니우스 아닌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든 걸 밝히는 게 나았을 텐데?”

“알베니우스가 확신할 수 없다고 했어요.”

“무엇을?”

“당신의 의중을. 신들의 개가 될만한 사람이 아닌데 개 노릇을 하고 있다고요.”

“개라. 그렇게 보이긴 하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약 관계다. 정말 어쩔 수 없이 묶여버린, 절대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계약.

때문에 김우진의 계획은 어디까지나 계약이 끝난 이후로 상정하고 있었다. 율리아의 등장과 알베니우스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뒤로 조금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요?”

“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신들이 연옥을 만들고 용사들을 가뒀는데 왜 탈옥을 하게 하는 거죠?”

“말했을 텐데. 나를 옭아매기 위해서라고.”

계약의 연장을 위해서. 김우진을 더 오래 연옥에 박아 두기 위해서. 이를 테면 독소조항이다.

“하지만 죄수들이 전부 탈옥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더 크지 않나요?”

“내가 결국 이런 식으로 잡아들일 거라는 걸 아니까.”

“아.”

“그러면 나도 묻지. 알베니우스가 노리는 것은 대체 뭐냐.”

연옥을 부순다는 것까지는 안다. 그리고 그 무기가 율리아고, 이후 그녀의 미래는 알베니우스의 손에 달렸다는 것까지.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다.

“뿌리부터 썩은 나무는 뽑아내지 않고는 도리가 없어요.”

“관리자들을 모조리 도려내겠다고? 그게 가능할 것 같아?”

김우진은 그들을 관리자라 부르나 대부분의 인류는 그들을 신이라 부른다.

그건 그들 스스로가 자칭하는 것도 있지만 그만한 힘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알베니우스가 당신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당신은···.”

“조용.”

김우진이 율리아의 입을 막았다. 저 앞에서 다이안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어머니 나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용사님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둘은 다이안의 집으로 안내되었다. 그가 차를 내왔다.

“다만, 엘프들을 이용해 공개적으로 수색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김우진이 바라던 바였다. 대충 이유가 짐작이 갔지만 일단은 물었다.

“왜입니까?”

“강민식 용사님께서는 저희를 구원해준 영웅이기 때문입니다.”

용사란, 세상을 구해야만 하는 자다.

해당 차원의 인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을 처치하기 위해, 차원의 굴레에 종속되지 않은 타 차원의 인류를 데리고 오는 거다.

용사는 차원의 유일한 희망이다.

전 차원의 이목이 용사에게 쏠리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큰 화제가 된다.

차원의 모든 인류가 용사를 응원하고 지원하며 그를 보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그리고 그렇게 온갖 고난 끝에 결국에는 세상을 구해낸 자다.

영웅이다.

그런 자를 어떤 의도에서든 찾는 다는 건, 결코 호의적인 눈빛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용사님의 귀환 사실조차 모를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희가 용사님을 찾고 있으면 이유를 묻고, 경우에 따라서는 먼저 용사님을 찾아 보호하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의도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세상을 구한 용사는 이미 압도적인 비대칭 전력이다.

알아서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 준다면 기쁘게 환송해주지만 돌아온다면, 각국에서 용사를 자신들의 품 안으로 들이기 위해 혈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따로 방법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누가 되었든 차원의 방벽을 통과하여 들어오면 흔적이 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나무께서는 그 흔적을 알고 계십니다.”

다이안이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 * *

“···망할 놈들. 이야기가 다르잖아.”

낡은 주점. 벌컥 벌컥, 시원한 흑맥주를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넣은 강민식이 이를 갈았다.

탈옥만 하면 뒷일은 모두 책임져 준다고 했었다.

그걸 믿었다. 그런데 이제와서 말이 바뀌었다.

“이제 와서 이주를 버티라고?”

이주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하지만 자신을 찾는 상대가 십수 명의 용사들을 상대로도 압도하던 소장이라면 1분, 1초도 짧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괜스레 숨이 턱 막혀왔다.

“···아니, 괜찮아. 괜찮을 거야.”

차원은 많다. 무수히 많다.

그 수많은 차원들 중 소장이 그가 어느 차원으로 왔는지 어떻게 바로 알겠나.

케르베로스의 후각이 아무리 뛰어나도 차원을 넘지는 못한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많은 차원들 중에서 고작 이주 만에 나를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냥 이주만 조용히, 죽은 듯이 숨어 지내면 된다.

“···어? 혹시 강민식 용사님 아니십니까?”

“···사람 잘못 봤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내가 아니라고 했지. 용사님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어떻게 여기 계시겠냐?”

“그런가···?”

이 세계를 구한 그는 너무도 유명했지만 괜찮을 거다. 아마도.

강민식이 여전히 자신의 업적들을 찬양하고 있는 신문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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