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30화 (30/150)

# < 029. 발견 >

쿠그그그그그-

소장이 사라졌어도 연옥의 시계는 돌아간다.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한 세계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굉음과 진동, 불안정한 마나의 파동을 일으켰다.

“고작 이주일만에 하늘구름을 완성시키라고? 미친 소리도 적당히 해야지.”

데르카인이 금이 간 외벽을 조금의 흠도 없이 매꾸면서 투덜거렸다.

“그쪽은 그나마 자기가 부숴놓은 거 수리하는 거지. 나는 아무 짓도 안했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옆에서 불탄 잔디를 뽑고 새로운 잔디를 심어주고 있던 시에나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 짓도 안 한 건 아니지 않나.”

“풀어달라고 해서 풀어줬더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크흠, 그런 뜻은 아니네.”

데르카인이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다시금 작업에 집중했다.

소장이 떠나버리면서 이주일이라는 시간제한이 생겨버렸다.

그는 드워프들에게는 부서진 연옥의 수복과 마도구 제작을 맡겼다.

엘프들에게는 불타버린 정원 복구와 세계수의 이동을 맡겼다.

갑작스럽게 과중한 업무를 떠안아 버린 두 죄수들은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늘구름이라면 그거지? 소장의 요구로 만들기 시작했다는 마도구.”

“맞네.”

“세계수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고?”

“이론적으로는 그렇네.”

“용케 그런 걸 순순히 만드네. 소장이라면 치를 떨지 않았어?”

“치를 떨고 있네. 하지만 더 치를 떠는 상대가 있어서 잠시 참고 있는 거고. 그러는 자네야 말로 갑자기 왜 이렇게 협조적인가.”

“나도 그럴 일이 생겼거든.”

솔직히 시에나는 현재 돌아가는 판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옥을 부수겠다고 말했다는 하이엘프와 그걸 받아들였다는 소장. 아무리 율리아가 세계수에 걸고 맹세했다고 한들, 믿을 수 있는 한계선이라는 게 있었다.

그럼에도 협조하는 것은 세계수 때문이었다. 함께 탈옥수를 잡으러 갈 정도가 된 율리아와 소장 때문이었다.

“나는 자네가 세계수를 옮길 줄 알았는데.”

“그건 다른 엘프들이 가도 할 수 있는 일이야. 정원을 복원하는 건 마력이 풍부한 내가 가장 빠르고. 빨리 끝내고 쉬는 게 낫지. 그러는 그쪽은?”

“마찬가지네. 쉴 수는 없지만. 설계도는 나왔고 제작만 하면 되는데 두 가지 일에 몰두하기보다 빨리 하나라도 끝내놓고 작업하는 게 낫지.”

때문에 모든 드워프들이 연옥 곳곳으로 흩어져 부서진 상처들을 복구하고 있었다.

“이주만에 만들 수는 있고?”

“정확히는 12일이네. 다행히 크게 부서진 건 없어서 이틀이면 이쪽은 모두 끝날 것 같거든.”

자신이 있냐고 묻는다면.

“자신이 있어서 하겠나. 그냥 해보는 거지.”

“고생이 많네. 그런데 말이야. 탈옥한 게 강민식이라며?”

“그렇게 알고 있네.”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가. 3징벌방에 갇혀 있던 인간이 대체 어떻게?”

“우리가 그렇게 연구해도 네 개밖에 풀지 못한 구속구를 몇 달 만에 죄다 풀어버린 건 이해가 가고?”

“그럴 리가.”

“솔직히 처음부터 수상했지만 탈옥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네만 이제는 이해가 가네. 구속구와 감옥에 공통적인 게 하나 있네. 무엇일 것 같나?”

“되도 않는 퀴즈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해.”

“우리를 이곳에 처박은 빌어먹을 놈들의 힘이네.”

연옥은 결국 신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감옥이다. 신이 쓸모가 다한 용사를, 말을 듣지 않는 용사를 가두는 감옥.

“강민식은 그놈들의 끄나풀이네. 의도적으로 심어놓은 첩자지.”

“무엇을 위해서?”

“뻔하네. 탈옥 아닌가.”

“더 이해가 안 가는데. 감옥을 만든 것도, 우리를 가두어 놓은 것도 저놈들이잖아? 그런데 왜?”

“만약 누군가 탈옥하면 누가 가장 큰 책임을 지게 될 것 같나?”

“당연히 소장이지.”

“그런 답이 나오지 않았나.”

아주 잠깐, 침묵이 일었다. 그리고 시에나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소장하고 개새끼들하고 한 편이 아니라고? 그게 말이 돼?”

“한 편이네.”

“뭐?”

“표면적으로는. 빌어먹을 놈들과 소장 사이에 무슨 계약이 있었던 게 아닌가 나는 생각하네. 이번 일은 그 계약을 토대로 소장에게 책임을 물려 기강을 잡으려는 거고.”

“그게 말이 돼?”

“말이 되니까 내가 이렇게 태도를 바꾸고 소장에게 협조하고 있지 않나.”

“아니, 소장이 얼마나 충실하게 우리들을···잠깐만, 설마 그래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나?”

“잠깐만 기다려봐.”

어째서 율리아의 그런 말도 안 돼는 소리를 했는데 소장이 받아들였는지.

그제야 시에나는 모든 것이 이해가 갔다.

애초에 기본 전제부터가 잘못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율리아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우연이라면 말이 안 된다. 율리아의 조건은 소장의 사정을 알아야지만 내걸 수 있는 제안이었다.

* * *

몬스터들이 넘실거리는 산맥을 가로 지르며 야영, 낡은 주점에서 용병들과의 만남, 도적 길드에게 소매치기를 당하고 참교육, 마법사 길드에 방문하여 마법사들과의 대담, 어느 귀족가와의 만남.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2주라는 시간은 두 개의 차원을 뒤지기에는 더 없이 짧았다.

김우진은 모든 잡다한 이벤트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세계수는 어느 쪽에 있지?”

“꽤나 멀어요. 일단 여기서 동북쪽이에요.”

“타.”

덕구를 타고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은신의 권능을 사용한 케르베로스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최소한 한 차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강자들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 자들이 흔할 리 없으니 질주하는 덕구를 가로 막는 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약 반나절을 달려 수 천 킬로미터를 지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광활한 수림이 눈앞에 펼쳐졌다.

“엘프들이 사는 곳은 하나 같이 똑같군.”

나무가 우거진 숲. 그 정도의 차이와 나무의 차이만 있을 뿐, 대동소이했다.

“당연하죠. 숲이야 말로 엘프들의 고향이니까요. 그걸 따지는 건 인간에게 왜 집을 지어 사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고요.”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그냥 평범한 감상이었을 뿐이다.

“결계가 있다.”

“알고 있어요. 숲 중앙에서 어머니 나무의 존재감이 느껴져요. 결계는 어머니 나무를 핵으로 삼아 펼쳐져 있어요. 허락받지 않은 자는 결코 통과할 수 없을 거예요.”

“너는?”

그녀는 하이엘프였으나 이 세계의 하이엘프는 아니었다. 세계수의 존재를 느끼고 왔으나 세계수가 초대장을 보내준 것은 아니었다.

“아마 기꺼이 반기실 걸요. 결계 앞으로 좀 가주세요.”

“들었지, 덕구야?”

멍멍멍!

하지만 율리아는 자신했다.

덕구의 등에서 내려 천천히 보이지 않는 결계를 향해 나아갔다. 손을 뻗어 투명한 막을 어루만졌다. 눈을 감고 교감했다.

“어머니 나무시여, 숲의 일족이···.”

곧, 결계의 일부가 열렸다.

“봤죠? 가요.”

“내가 가도 아무런 문제없는 거 맞지?”

“일행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어머니 나무께서 배척하지 않으실 거예요.”

과연, 결계는 김우진과 덕구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풍부한 숲의 정기···.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에요.”

단순한 막 하나를 넘었을 뿐이지만 밖과 안은 꽤나 큰 차이가 있었다. 정순하면서도 깨끗한 마나의 질과 농도가 달랐다.

“···생각보다 정기가 더 짙은데. 이러면 곤란한데.”

“네? 뭐가요?”

“정지.”

그때, 다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살의 끝이 김우진과 율리아, 그리고 덕구를 향해 겨눠졌다.

“어떻게 결계를 열었지?”

“너희들은 누구냐!”

“마수다! 마수가 함께한다!”

“움직이지 마라! 머리에 구멍이 뚫리기 싫으면!”

적개심이 가득한 음성들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야기 잘 됐다며.”

“···잘 됐어요. 다만, 어머니 나무와 이야기한 걸 다이렉트로 외곽의 엘프에게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 아니에요.”

“그런 이유여야만 할 거야.”

분쟁은 최대한 피해야만 한다.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을 상부에게 알려주어서 좋을 게 없으니.

“그런 이유가 확실해요. 여러분, 잠시만요!”

율리아가 성큼, 앞으로 나섰다. 팟, 화살 하나가 그녀의 발 앞에 꽂혔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저희는 적이 아니에요.”

“저런 괴물과 함께 움직이면서? 어떻게 숲의 결계를 열었···?”

율리아가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로브를 뒤로 젖혔다.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로브가 작동을 멈췄다. 드러나지 않던 기운이 조금씩 흘러나가기 시작했다.

“···엘프?”

“아니, 이 기운은···.”

“하이엘프···?”

“하지만 처음 보는···.”

“마수와 함께하는데···?”

엘프들은 본능적으로 귀족들을 알아본다. 갑작스러운 하이엘프의 등장에 엘프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어머니 나무의 인도를 따라 왔어요. 저희를 어머니 나무께 인도해주시겠어요?”

“···그건.”

엘프들이 주저했다. 하이엘프는 엘프들에게 존중받고 신성시 여겨지는 귀족인 것은 맞다. 하지만 눈앞의 하이엘프는 처음 보는 존재였고 마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 걸렸다.

“당신이군요.”

그때, 엘프들의 뒤편에서 새로운 엘프가 나타났다.

“다이안님.”

건장한 체격,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과 자주빛 눈을 가진 엘프, 아니 하이엘프였다.

“다행히 너무 늦지는 않았군요. 어머니 나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세상의 하이엘프가 찾아올지니, 막지 말고 길을 열어라.”

하이엘프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이안 펠롬베그입니다.”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이쪽은···?”

“제 동료들이에요. 함께 어머니 나무를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물론입니다. 어머니 나무께서 일행이 함께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설마 마수가 함께 할 줄은 몰랐습니다만.”

세계수의 언질이 있었기 때문일까, 다이안은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마수를 보고도 감상평은 그게 끝이었다.

“다이안입니다.”

“김우진입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들은 제가 인도할 테니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예!”

김우진과도 인사를 마친 다이안이 그들을 이끌고 수림의 내부로 들어갔다.

* * *

엘프들이 살아가는 숲속에 나타난 거대한 마수는 새하얀 백지 위에 찍어놓은 먹물 점 같았다.

수많은 관심과 이목을 끌었고 수많은 인파가 덕구를 경계했다.

“처음 보는 하이엘프야.”

“다이안님이 함께 하신다. 적이 아니라는 거야.”

“어째서 하이엘프가 마수와 함께 다니는 거지?”

“불길함이 가득해.”

하지만 하이엘프인 다이안이 함께 하기 때문일까, 그 이상의 소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어서 오시게.”

저 멀리 보이던 하늘을 꿰뚫은 나무가 더 없이 가까워질 무렵, 일단의 무리가 일행을 반겼다.

선두에는 나이가 지긋한 하이엘프가 자리하고 있었다.

“반갑네. 나는 크라프트의 엘프들을 책임지는 대족장, 젤리얀 케이드네이네.”

“아르반의 하이엘프, 율리아 카르센이에요.”

“어머니 나무의 전언이 있기는 했지만 설마 진짜로 다른 차원의 아이가 올 줄은 몰랐군. 어머니 나무께서 부르셨으니 목적은 묻지 않겠네. 다이안을 따라가게. 이 아이가 자네를 어머니 나무께 인도해 줄 거네.”

“호의에 감사드려요.”

“하이엘프를 돕는 것은 당연한 것이네.”

예의상 나온 것 같은 대족장이 수행원들을 데리고 다시 사라졌다. 그 이후로 더 이상 엘프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머니 나무의 허락 없이는 어떠한 엘프도 곁으로 다가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 나무의 마나가 짙어 능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세계수가 품는 마나는 더 없이 정순해지고 풍부해진다. 그 정도는 경지가 부족한 엘프들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이니, 과유불급이었다.

“마나가 너무 넘쳐서 감당을 못할 정도란 말입니까? 혹 세계수가 언제부터 뿌리를 내렸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지만 어머니 나무께서는 약 만 이천 년전부터 뿌리를 내리시어 저희 엘프들을 보살피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김우진의 표정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저는 여기까지입니다. 조금만 더 가시면 어머니 나무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같이 안가시나요?”

“어머니 나무께서 여러분들과의 독대를 원하셨습니다.”

다이안이 사라졌다.

“아까 그건 왜 물어보신 거예요?”

“골치 아프게 된 것 같아서. 만 년은 안 넘길 바랐는데.”

“만 년이 넘으면 뭐가 달라지나요?”

“보면 알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정면 돌파를 해야겠군.”

그리고 마침내, 김우진은 거대한 나무 앞에 섰다.

크릉.

순수한 마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덕구가 콧김을 내뱉었다.

- 만나게 되어 반갑구나. 다른 차원의 아이야.

- 크라프트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때, 세계수가 떨렸다. 흩날리는 나뭇잎 사이로 은빛의 거대한 순록이 땅 아래에서부터 솟아났다.

세계수의 정령체였다.

“어머니 나무를 뵈어요.”

- 긴 삶을 살아왔지만 설마 다른 차원의 아이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구나.

율리아가 고개를 숙였다.

- 저런 상태의 인간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순록의 시선이 김우진에게 향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세계수는 겉모습만으로도 그 본질을 조금 엿볼 수 있었다.

- 개인적인 호기심이다만, 혹 그대를 조금 더 살펴보아도 되겠느냐?

“아니.”

- 아쉽구나. 허나, 딱히 그대에게 해를 입히거나 위험한 것 같지는 않으니 그대의 말대로 하겠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알고 있는 듯한 말투에 김우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릴리도 더 커지면 저렇게 되는 건가.

귀여운 맛이 없어서 별로인데.

저 세계수보다 작고 소중한 파랑새인 릴리가, 그가 좋아서 뺨을 부비는 릴리가 더 낫다.

- 다른 차원의 아이야.

- 네가 저 인간과 함께 날 찾은 것은, 얼마 전에 이곳으로 돌아온 용사 때문이겠지?

찾았다.

굳이 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강민식은 이곳에 있었다.

하지만 김우진은 웃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세계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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