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26. 하수인 >
탈옥의 흔적은 감옥 곳곳에 남아 있다.
환히 열려있는 문들, 바닥에 굴러다니는 부식된 구속구들, 벽 곳곳에 새겨진 상흔들과 불타버린 정원,
김우진은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며 밖으로 나갔다.
정원 북쪽, 탈옥의 여파가 미치지 못한 곳에는 활동을 멈춘 세계수가 있었다.
릴리는 세계수의 가지 위에 누워 나뭇잎을 덮고 자고 있었다.
차원의 방벽에 간섭하느라 모든 힘을 소진한 게 틀림없었다. 김우진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을 때, 교도관이 율리아를 데리고 왔다.
“엘프들의 행위는 저와 상관이 없어요.”
그리고 대뜸 내뱉는 말은 꽤나 재미있었다.
엘프들의 귀족이라는 하이엘프가 엘프들과의 관계부터 부정하고 시작하는 것은.
“엘프들의 행위?”
“들었어요. 교도관들을 때려눕히고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준 게 엘프들이라는 걸요. 절대, 절대 제가 지시한 것이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지시한다고 해서 듣지도 않을 거고요.”
김우진이 알기로 하이엘프가 엘프를 버리는 경우는 하나다. 보다 큰 대의나 목표가 있을 때. 그것이 버려지는 엘프들도 납득 가능한 수준일 때.
그리고 이 경우, 그 대의는 김우진 본인과의 악감정을 쌓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쯤 되자 김우진은 슬슬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율리아 카르센이 세계수의 씨앗을 넘겼는지, 알베니우스와 어떤 관계인지, 그녀의 계획이 무엇인지.
“변명은 그쯤하지. 이 난리를 처놓고 혼자서만 빠져나가려고?”
허나 티내지는 않았다.
“정말이에요. 저는 연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세세한 계획을 세웠겠어요?”
“엘프들이 함께 탈옥했다면 네 말이 맞았겠지. 하지만 엘프들은 죄를 짓고도 남았어. 왜? 너 때문에.”
그 이유가 세계수든, 하이엘프든, 둘 다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어쨌든 탈옥을 돕고도 남아있다는 건 그 이유가 반드시 있다는 것이니.
“···전 억울해요.”
“조사해보면 다 나와. 만약 엘프들의 입에서 네 이름이 나오면 너도 3징벌방으로 가게 될 거야.”
“···그건.”
“하지만 그 전에 우리 사이에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지?”
김우진이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나무에 몸을 기댔다. 불안하게 떨리는 율리아를 관찰한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김우진은 이제 모든 내막이 이해가 되었다. 허나,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것과 단순한 추정은 엄연히 다르다.
“알베니우스를 만났다고 했지. 어떻게?”
“···말씀드릴 이유는 없어요.”
“미안하지만 너한테는 선택권이 없어. 네가 죄수로 이곳에 들어온 이상, 철저하게 갑은 나거든.”
정보의 이점을 가지고 동등한 거래를 하고자 하겠지만 김우진이 그걸 받아줄 이유는 없었다.
소장과 죄수. 그것만으로도 김우진이 저자세로 나갈 이유는 하등 없었다.
세계수라도 제대로 피어올라 율리아의 통제에 들어갔으면 또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맞아요. 소장님이 어머니 나무의 씨앗에 간섭하는 순간, 다 어그러졌어요.”
율리아 또한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좋아요.”
침묵과 고민은 짧았다. 율리아가 교도관이 내어준 차를 단숨에 원샷했다.
“이렇게 된 이상,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기대되는군.”
“저와 손을 잡아요.”
“소장인 나와 죄수인 네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재차 이어지는 물음에 율리아는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돌이킬 수는 없었다.
어차피 망했다. 이미 망한 거, 빵이 되든, 숯이 되든 일단 가야할 때다.
“이 연옥이 죄수들에게 감옥이지만, 당신에게도 감옥이라는 것을 알아요.”
“터무니없는 소리군. 죄수도 아닌 내게 왜 이곳이 감옥이지?”
“저야 모르죠. 알베니우스가 그랬으니 그냥 믿는 거지.”
“이제 그냥 뻔뻔하게 나오기로 한 건가?”
“이미 글러 먹었으니까요. 조금 더 글러 먹는다고 뭐 달라지겠어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율리아가 스스로의 입을 때리며 다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제 손을 잡으신다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당신의 감옥을 제가 책임지고 부숴드릴게요.”
* * *
무모한 도박이다.
율리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었다.
김우진이 세계수의 씨앗에 간섭하고 성공한 시점부터, 세계수가 그녀보다 김우진을 더 잘 따르게 된 시점부터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연옥은 감옥이다. 김우진은 소장이고 율리아는 죄수다.
소장과 죄수라는 신분이 생겨버린 이상, 연옥 내에서 그녀가 앞서는 포인트는 오직 세계수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세계수를 통해 협상하고 설득하며 결국엔 바라는 걸 이루어 내겠노라고 세웠던 계획이 뿌리부터 흔들려 버렸다.
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도박뿐이었다.
“······.”
“······.”
대답은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율리아는 마른 침을 삼켰다.
“왜 그렇게 보세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더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생글 생글 웃었다.
“그러니까.”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김우진의 입이 열렸다.
“내 직장을 없애줄 테니 손을 잡자는 거군.”
“직장이 아니라 감옥이죠.”
“너 같은 죄수에게나 감옥이지, 내게는 그냥 직장일 뿐이야. 그리고 나는 너에 대해 아는 게 없어. 아무것도 모른 채, 무작정 네 손을 잡으라고?”
“저에 대한 서류를 다 보셨다고 들었어요.”
“네가 어디 출신인지, 용사가 되어 어떤 일을 했는지, 몇 살이고 어떤 성향인지도 다 알지만 알베니우스와의 관계까지 나와 있는 건 아니지.”
“제가 있던 차원에서 만났어요.”
“용사로서?”
“아니요.”
“그러면 데이드람이 아니라 아르반이군. 정확히 어떤 관계지?”
“협력 관계에요. 소장님이 제 손을 잡는다면 비슷한 관계가 되겠죠.”
“무엇을 위한?”
“말했잖아요. 소장님을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겠다고요.”
“그건 나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이지. 하지만 네가 들어온 목적이기도 할 테고. 방법은 역시 세계수인가? 차원에 간섭해서 방벽을 박살내 버리려고?”
“너무 저만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요?”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나니까.”
“···분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네요.”
주도권이 없다는 건, 쓸 만한 카드가 없다는 건 이리도 뼈아팠다.
카드를 고작 한 장만 가지고 온 탓이었으나 딱히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이엘프를 상대로 세계수라는 카드를 찢어버릴 수 있는 상대가 이상한 거다.
“감옥을 부수고 싶어 한다는 건 죄수들을 모두 탈옥시키고 싶다는 건데 아무리 봐도 그게 최종 목표 같지는 않고···.”
톡톡, 그 다음은 대화가 아닌 생각에 잠긴 김우진의 중얼거림이었다.
“너.”
“네.”
“백번 양보해서 네가 성공했다고 치자. 내가 멍청해서 그냥 세계수를 심었고 주도권이 너한테 넘어갔으며 덕분에 죄수들이 죄다 탈옥을 했다고 치자고.”
실제로는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면 세계수는 네 말을 들을 테고, 방벽에 영향을 주어 죄수들이 모두 탈옥할 수 있게끔 만들겠지.”
한계를 벗어난 용사들의 탈주. 상부에서 결코 원치 않던 상황이 펼쳐지는 거다.
한둘이 아니라 33명 모두의 탈옥인 만큼 아무리 숨는다고 해도 숨을 수는 없다. 낭중지추라고 그들은 어디에 던져 놓아도 특별하니까. 그러니까 용사다.
“그런데 말이야. 이 다음은?”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죄수들이 모두 사라진 연옥은 의미가 사라지고 김우진은 관리를 잘하지 못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율리아 카르센. 세계수의 씨앗을 주어 연옥을 망가트린 주범을, 자칭 신들이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
“운 좋게 숨는다면 평생을 숨어 다녀야 해. 매일 매일을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지. 그런데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무엇을 위해서?”
계기가 필요하다. 수 천 년을 사는 고귀한 하이엘프가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릴 만한 계기.
“세이드 델름.”
“···너와 어떤 관계지?”
“어렸을 때부터 저를 지켜준 호위 기사에요. 아버지 같은 존재죠.”
“···그렇군.”
그리고 그녀가 내뱉은 이름은 그 계기를 납득시키기에 충분했다.
알베니우스를 알고 세이드와 친분이 있다라.
톡톡, 김우진이 책상을 두들겼다. 짧은 침묵은 곧 사라졌다.
“···잠깐만. 율리아. 율리아라고?”
“갑자기 제 이름은 왜 부르시죠?”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절 아시나요?”
“아니, 됐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지.”
잠시 후, 그녀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사라졌다. 김우진이 손을 뻗어 나뭇잎 하나를 꺾어 손가락으로 비볐다.
의미있는 행동이라기보다 그냥 무의식적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릴리가 일어났다.
삐!
김우진을 발견한 그녀가 힘차게 얼굴을 부볐다.
“그래, 그래.”
김우진이 쓰다듬자 고렁거리며 다시 잠이 들었다.
“세이드 델름···.”
그리운 이름이다.
그와 등을 맞대고 함께 싸웠던 동료이자 용사.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친우.
“설마 그 율리아가 이 율리아일 줄이야.”
우연이라면 참으로 기가 막히다.
* * *
3징벌방에 들어간 죄수들, 율리아, 다음으로 처리해야할 것은 드워프들이었다.
김우진은 데르카인과 개인 면담을 실시했다.
율리아와 달리 집무실에서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면담이었다.
“당신이 만들 것을 정확히 뭐라고 명명해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목적은 명확합니다. 세계수를 숨기는 것. 그 모습, 기운, 분위기 모든 것을 완벽히 차단하는 것.”
“세계수는 신의 나무네. 그러한 것을 완벽하게 감추는 게 가능할 것 같은가?”
“그러니 당신께 의뢰하는 겁니다. 여러 차원에서도 손에 꼽히는 드워프 장인인데 심지어 용사? 써 먹지 않을 이유가 없죠.”
“끄응.”
데르카인이 신음을 삼켰다. 솔직히 자신할 수는 없을 만큼 어려운 요구였으나 그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나 혼자서는 안 되네.”
“모든 드워프들이 당신을 돕게 해주겠습니다. 그들이 징벌방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는 별개지만.”
“철저하군.”
“재료는 뭐가 필요합니까?”
“일단은 구상을 좀 해보고 이야기 해주겠네. 아무런 대책 없이 무작정 시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설계도를 만들 때 필요한 것들도 말씀해주시면 전달해드리겠습니다. 당분간 출역도 없고요.”
“이게 출역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죠.”
짝, 김우진이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럼 개인 면담은 끝입니다. 독방으로···.”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되나?”
“무엇입니까?”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네. 이 연옥의 주인이나 다름 없는 자네가 굳이 세계수를 숨길 필요가 있을까, 하는.”
대체 누구에게서?
이미 모든 교도관들과 죄수들은 세계수의 존재를 알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존재들에게서 숨긴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다 제외하고 나니 하나가 남더군. 자네와 교도관, 그리고 죄수들을 제외하고 연옥을 드나드는 이들은 하나뿐이니.”
호송대. 용사를 붙잡아 죄수로 만들어버리는, 연옥으로 연행하는 존재들.
“생각이 너무 갔습니다. 제가 그걸 호송대에게 숨길 이유가 무어 있습니까.”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호송대 따위 일리가 없지. 그 위라면 모를까.”
그 위. 호송대를 수족처럼 부리는 자들.
“신.”
용사들을, 데르카인을 실컷 이용해 먹고 이곳으로 보낸 자들.
“나는 말이네. 자네가 저들의 충실한 개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꼬리를 흔들며 최대한 애교를 떨고 있다고.”
그런데 아니었다. 차원의 방벽에 영향을 줄만큼 대단한 세계수를 숨긴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자네, 그들의 하수인이 아니지?”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고 말고. 난 그놈들을 증오하거든.”
데르카인이 웃었다.
꺼져가던 노장의 불꽃이 다시금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모두가 잠이 든 교도소는 조용했다. 교도관이 복도를 순찰했다.
교도관이 한 방 앞을 지나가는 순간, 아무런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그림자 하나가 빠져 나왔고 다시 닫혔다.
그럼에도 방은 달라진 게 없었다. 적어도 밖에서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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