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감옥에는 용사들이 온다-26화 (26/150)

# < 025. 꼬우면 >

잘못 들었나.

김우진이 귀를 후볐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자네가 그토록 바라는 용사로서 얻은 모든 힘을 포기하고 자발적인 출소를 하겠다고 했네.”

“갑자기 말입니까? 이거 꽤나 당황스러운데요.”

“나는 너무 늙었네. 사실상 이번 탈옥이 마지막 시도였지.”

죄수번호 1077. 그가 들어오고 난 뒤 백 명이 넘는 죄수들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용사들은 흔하지 않고, 죄수가 되는 용사들은 더 흔하지 않다. 그가 감내해야 할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절로 상상이 된다.

“내 나이가 어언 600살이 넘었네.”

드워프의 평균 수명이 500안팎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지나치게 오래 살았다. 그것이 용사로서의 힘이 작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죽을 때가 머지않았지. 이미 이 감옥에서 300년을 썩었네. 더 이상 갇혀 있는 것도 지긋지긋해. 그래서 생각했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실패하면 미련 없이 출소하자고.”

최선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거부합니다.”

“···뭐라고?”

“당신의 출소를 거부한다고 했습니다.”

연옥의 출소는 언제든 자유롭다.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출소를 관리하는 것 또한 김우진인 만큼, 김우진의 마음이 내키는 한 자유롭다는 것.

“양아치입니까? 주도해서 감옥을 개판으로 만들어놓고 혼자서 날름 빠져나가는 건 말이 안 되죠.”

“나, 나는 출소를 선택했네. 더 이상 죄인이 아니야.”

“저는 아직 당신의 출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그리고 탈옥을 주도한 죄로 벌점 1000만점 부여.”

1000만점. 숨이 턱 막히는 숫자에 데르카인의 입이 벌어졌다.

“3징벌방 100일형에 처합니다. 징계를 모두 마치고 나면 출소 절차를 밟아보도록 하죠.”

“미친. 이건 폭거네! 애초에 벌점 시스템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돼! 같은 짓을 해도 자네의 기분에 따라 부여되는 벌점이 다른 게 말이 되는가!”

“말이 됩니다. 내가 소장이니까.”

꼬우면 아시죠?

“꼬와서 나가겠다니까!”

“제가 꼬와서 안 됩니다.”

“오지 마! 다가오지 마, 이 빌어먹을 놈아!”

김우진이 천천히 걸었다. 데르카인이 주춤거리며 대경했다.

“저도 곧 나간다는 분께 이렇게까지 하기는 싫습니다만, 다른 일도 아니고 탈옥을 주도하셨으니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기는 뭐가 어쩔 수 없어! 헛소리 그만하게!”

“뭐, 아예 방법이 없는 건 또 아닙니다.”

“···그게 뭔가.”

김우진이 슬쩍 내민 당근을, 데르카인은 주저 없이 잡았다.

탈옥이 실패하고 붙잡힌 이상, 애초에 그에게는 이렇다 할 선택지가 없었다.

말년에 3징벌방에 100일이나 들어 갔다온다면 미친 광인이 될 게 뻔했으니까.

“마나를 감추는 마도구. 만들 수 있으십니까?”

“어느 정도 수준이냐에 따라서 다르네.”

“재료는 최고로 공급해드리겠습니다. 시간도 넉넉하게 드리고. 일과도 다 빼드리겠습니다.”

“무엇을 감추려고?”

“세계수.”

율리아의 도움을 받아 세계수를 정원 북쪽 끝으로 옮겼지만 그 진한 마나는 여전히 정원 전체에 감돌고 있다. 거리가 있는 만큼 입구에서는 미약하지만 세계수가 성장할수록 더 진해질 거다.

호송대의 일원들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니 또 다른 조치가 필요했다.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까 최고의 장인인 당신에게 부탁하고 있는 겁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글쎄요.”

“처음부터 끝까지 난 자네의 손바닥 위였군. 대체 언제부터 이런 그림을 그렸나?”

“그냥 아다리가 맞았을 뿐입니다.”

“내게 선택지는 없겠지?”

“있습니다. 만드느냐, 아니면 3징벌방에 들어가느냐란 선택지.”

“없다는 소리군. 알겠네. 용사로서 만드는 마지막 작품이니 최선을 다해보지. 다만, 나도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당신이 조건을 내밀 상황은 아닙니다만.”

“나 혼자서는 너무 오래 걸리네. 다른 드워프들의 도움이 필요해.”

“필요하다면야.”

“그 대가로 그들에게 징벌방 징계를 없는 걸로 해주면 안 되겠나?”

“출역과 징계는 별개입니다.”

“내가 나간다니까? 자네도 사망으로 인한 출소보다는 자발적인 출소 쪽이 더 좋지 않은가?”

“당신이 그들을 모두 데리고 출소한다면 생각해보겠습니다.”

“···끄응.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 같으니.”

탈옥을 꿈꾸던 늙은 난쟁이의 미래가 결정되었다.

* * *

“오셨습니까!”

부소장이 환하게 웃으며 김우진을 반겼다. 두둥실 떠 김우진을 따라오던 반시체들이 1층 로비에 곱게 쌓였다.

“전부 구속구는 채워놨으니까 교도관들 시켜서 4층에 집어넣어.”

“예.”

“교도관들은?”

“대부분은 어떻게든 수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곱 구가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어떤 놈 짓이야?”

“전부 수인들과의 전투에서 찢어졌습니다.”

“하아, 이 개새끼들이 진짜.”

수인들은 악의적으로 교도관들을 찢어 발겼다. 그 과정에서 재생 불가 상태까지 손상된 것들이 무려 일곱 구였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죽이실 겁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야, 말이.”

열은 받지만 죽이진 않는다. 그거야 말로 상부가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바니까.

툭툭, 김우진이 집무실의 책상을 두들겼다.

3층의 대부분 박살났고 교도관들이 여럿 다쳤으며 아예 복구 불능인 자들도 있다.

탈옥에 가담한 이들은 32명. 율리아가 그와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들 엘프들이 나섰다면 연결 고리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소지를 제외한 모두가 한 손씩 보탰다고 봐도 무방했다.

“1176번이 말을 전해주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독방에 갇혀 있는 죄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려면 반드시 대화를 이어줄 촉새가 필요하다. 베르너는 분명히 그 역할을 했을 거다.

“그 정도쯤은 일상이지. 탈옥 이야기가 도는 걸 이야기하지 않은 게 괘씸하긴 하지만 넘어가 줄 수 있어.”

결국 본인은 탈옥을 하려 하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관여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진짜 죄수가 아닌 연옥의 특성상 그 정도는 넘어가 줄 수 있다.

물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간의 공을 상쇄해 조금 유하게 대응할 뿐.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더욱 경쾌해졌다.

“풀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어. 정리를 좀 해야겠어.”

“이번 일에 관해서는 확실한 벌을 주어야 합니다. 탈옥은 가벼운 죄가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진짜 죄수가 아니든, 맞든 어쨌든 수감자들이었다. 수감자가 교도관들을 때려눕히고 탈옥을 한 것은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수인들과 거인, 다크엘프까지 전부 3징벌방에 처넣어.”

“이주입니까?”

“그래.”

이주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정신이 돌아버릴 가능성이 있어서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관리가 힘들어지니까.

“문제는 엘프야.”

“그들은 교도관들을 기절시키고 죄수들을 풀어줬습니다.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식물원에 돌아가 있다고 해서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알아, 아는데···.”

그들은 김우진의 자비를 역이용했다. 그 괘씸함은 이미 도를 넘었다.

하지만 율리아 카르센이 걸린다.

“알베니우스를 알고 있었어.”

“알베니우스라면 설마 그···?”

“맞아.”

김우진이 낯익은 이름을 되뇌었다.

알베니우스는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타인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명확하게 우호적인 끈이 있다는 뜻이다.

허나, 그 끈이 현재 율리아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지, 끼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대놓고 알베니우스의 이름을 그에게 말한 것으로 봐서는 전자인 것 같지만 언제나 그렇듯 속단은 옳지 않다.

“알베니우스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만나봤다는 거야. 헌데 율리아는 글라크 출신도, 글라크의 용사도 아니야.”

“알베니우스가 1178번의 차원으로 갔을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

“알베니우스의 상태가 그렇게 좋지는···.”

아.

무언가를 깨달은 김우진이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소장 짓을 시작한지도 벌써 20년이 지났지. 여기에 있으니까 시간관념이 사라지는 것 같단 말이야.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빌어먹을 감옥에 있다 보니 시간 감각이 더뎌지는 느낌이다.

엄청난 중상이었으나 수십 년의 세월이라면 충분히 회복됐을 가능성이 있다.

“일단 엘프들의 처우는 율리아와 대화를 더 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예. 드워프들은 어쩌시겠습니까?”

“그것들은 모두 아티펙트 제작에 투입시킬 거야. 단순히 옮기는 것만으로는 세계수를 완벽히 숨길 수 없으니.”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데르카인이라면 능히 신도 속일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겠죠. 헌데 순순히 만들겠습니까?”

“신이 아니라 관리자.”

“예, 관리자.”

“징계 받기 싫어서 출소할거라고 하길래 만들어주지 않으면 징계방에 먼저 넣어버리겠다고 했거든.”

“···출소하겠다고 했단 말입니까?”

“애초에 성공하면 탈옥하고 아니면 출소할 생각이었다더군.”

“합리적이군요.”

“약은 거지.”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다.

“어쩌면 다른 드워프들도 우르르 나갈 수도 있어. 데르카인은 그들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호재군요.”

“최악의 사태를 막았는데 호재 하나 정도는 있어야지.”

그럼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놈들은 이후에 3징벌방에 들어가게 될 거다. 원래 들어가야 했던 거니 불만을 토해낸다고 무를 생각도 없다.

“1177번은 어쩌시겠습니까?”

“강민식이라.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야.”

2징벌방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은 태도부터, 상부의 권능이 들어간 구속구를 손쉽게 부식시켜버리는 것까지.

무언가 숨기고 있다. 목구멍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턱 하고 걸린다.

“일단은 3징벌방에 처 넣어.”

불라고 한다고 순순히 불지는 않을 거다. 그러니 3징벌방도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게 먼저다.

“예.”

“나가면서 율리아 좀 불러오고.”

“예, 알겠습니다.”

부소장이 나갔다. 김우진이 소파 위에 푹 늘어졌다. 창문 사이로 따스한 햇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담벼락을 따라 올라온 줄기 하나와 나뭇잎이 보였다.

“···아, 맞다.”

릴리.

* * *

“죄수번호 1177번. 널 3징벌방 14일 형에 처한다.”

끼익-

문이 닫혔다.

마나가 요동친다. 사방에서 밀려오는 벽들은 폐쇄 공포증을 자극한다.

강민식은 담담히 그것을 받아들였다.

시야가 차단되어 시각이 사라지고.

소리가 차단되어 청각이 사라진다.

새카만 어둠이 그를 뒤덮는다.

‘큭···!’

그리고 이어지는 자극은 평생 살면서 느껴본 적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표현할 단어는 생각나지 않았다.

허나, 고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

어둠이 걷혔다. 어느새 그는 전장에 던져져 있었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고막을 흔들고, 비릿한 피 냄새가 후각을 마비시킨다.

“용사님! 괜찮으세요?”

푸른 로브의 마법사가 다가온다. 익숙한 얼굴의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 봤다.

“제가 치료해줄게요.”

“나는 괜찮은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배에 구멍이 뚫렸는데!”

“아.”

복부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통증에 강민식은 그제야 자신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지지마. 독이···.”

“안 만져요. 마법을 쓰는 거지.”

그녀가 주문을 외웠다. 따스한 빛줄기가 상처를 보듬었다.

“제이니···.”

고마움에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피가 튀었다.

“···아?”

단발마의 비명. 심장에 구멍이 뚫린 그녀의 육신이 허물어졌다. 서로의 몸이 포개어졌다. 흘러나오는 핏물이 강민식을 붉게 적셨다.

“제이니!”

강민식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그녀를 부여잡고 한참을 흐느꼈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익숙한 장면. 익숙한 풍경.

이것은 과거였다. 그가 후회하고 또 후회하던, 목숨을 바쳐서라도 고치고 싶은 그런 과거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은은한 빛이 그의 몸에서부터 비롯되어 환상을 밀어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다시 한 번 그를 맞이했다.

허나, 은은한 빛은 어둠마저 밝혀냈다.

“···소장, 이 개새끼가···!”

어째서 죄수들이 3징벌방을 그토록 꺼려하는지. 육체와 정신을 함께 자극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버렸다.

뿌득, 사람에게는 누구나 역린이라는 것이 있다.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무리 순한 사람이라도 발작을 일으키는.

강민식에게는 그녀가 그랬다. 언제나 약해서 상처입고, 무리하던 그를 치료해주던 연인이 눈앞에서 머리가 날아갔다.

자신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제이니는 죽지 않았을 거라고, 평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던 순간이었다.

“나간다. 반드시 나가서 널 꼭 좆되게 만들어줄게.”

어떻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적어도 징벌방에 갇히는 순간, 죄수는 완전히 노마크가 된다.

강민식이 징계방의 시스템에 개입했다. 징벌이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밖에서 보기에는 그대로일 터.

입술을 짓이기며 기회를 엿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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